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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호산나를 크게 외치자 (막 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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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나 크게 외치자 (막 11:1~11)


오늘은 종려주일이며, 봄철 성례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가시면서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가실 때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기뻐 환영하였습니다.   그들은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잡고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수난주일로 함께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은 초대교회로부터 종려주일로, 그리고 수난주일로 함께 지켜왔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여 한 주간을 수난주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을 종려주일로만 지키면, 승리하신 예수님,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기리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주일은 부활주일이 됩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수난을 생각하며,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성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이 모두다 주중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한 주일 단위로 만나고 모여 예배드리다보니, 종려주일에서 부활주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을 수난주일로 함께 지키면서 수난을 기리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시오노 나나미’여사가 쓴 ‘로마인의 이야기’에는 개선장군이 로마 성에 입성하는 개선행진에 대하여 상세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변방에 나가 외적들과 싸워 승리한 군인들은 반드시 개선식을 거행한 후에야 로마 성내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온 군인들이 성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성 밖에 머물면서 개선식을 준비하고 예행연습을 해야만 합니다. 군인들만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도 꽃길을 만들고 붉은 카펫을 길에 펴고, 많은 깃발을 내어 걸어 거국적인 행사가 되게 하고,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였습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개선장군과 그의 부대가 개선행진하면서 로마 시내로 들어옵니다. 개선행진이 있는 날이면 로마의 황제는 모든 신하를 거느리고 중앙 연단에 나와 앉았고, 원로원을 비롯한 귀족들이 도열하여 맞이하고, 모든 시민들이 대로변에 나와 군인들을 맞이합니다.   개선장군이 선두에 서면 그의 휘하에 있는 모든 대장들이 따르고, 부대별로 행진하여 들어옵니다.   개선장군은 화려하게 장식된 백마를 타고 호위대에 둘러싸여 개선문을 지나고 신전으로 향하여 개선행진을 벌입니다.  참으로  멋지고 감격스러운 행진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말씀입니다.  로마의 개선장군이 개선문을 들어오면서 행진하는 것에 비교하면, 참으로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행진이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시골 중고등학교의 가장행렬에 비교하신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성은 그 어떤 개선장군에 비할 수 없는 영적인 의미가 있고, 하나하나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행이 예루살렘 가까이와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라는 동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리고에서 출발하셨다면, 부지런히 걸어오셨다고 해도 오후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리고에서 출발하여 오시는 길이라면 먼저 베다니에 이르고, 벳바게를 거쳐 감람산에 오르게 되어있기에 제자 두 사람을 벳바게로 보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에 두 사람을 보내시면서,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는 말씀은 “쓰시고 나면 지체 없이, 즉시 나귀가 매어있는 이 자리로 돌려보내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이 타고 가시려는 나귀는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아니한 어린나귀였습니다.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아니한”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적인 행위를 드러내기에 합당한 순결한 동물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위하여 헌신할 때에는 처음 사랑과 순결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거룩한 용도로 쓰여지는 동물은 일상생활에서 한 번도 쓰인 적이 없는 순결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고, 훈련받지 못하였기에 사람을 태우고 언덕길을 오르고, 내리막길을 가려면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것을 총동원하여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쓰임을 받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귀를 풀어 끌어온 두 제자는 누구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데, 합당한 말씀이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일을 시키면, 그것은 기쁜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이 안 되는 일을 시키거나 사람의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하면 그런 일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의 짐승을 그냥 끌어오라는 것이나, 임대료를 지불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사실 염치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고, 도둑으로 몰릴 수도 있고, 하여간 그렇게 합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경험,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내오면서 겪은 여러 경험을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시키신 일들이 어느 것 하나라도 잘못된 일이 없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은 일들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낭패를 본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불가능한 일을 시키신 적이 없고, 잘못된 일도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다 알고 시키시는 일이요, 다 감당할만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오직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두 제자는 혹시 베드로와 요한 두 제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통역을 감당하고 다닌 마가의 상세한 기록을 본다면,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은 베드로이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른 복음서보다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 당신 심부름하였던 베드로를 통하여 상세히 들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목요일에 해당하는 사건으로 성내에 들어가서 성만찬을 가질 수 있는 집을 보라고 하실 때에 두 제자가 먼저 들어갔는데,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이 그 일을 맡아 처리하였습니다.  신약에서 두 제자라고 하면 베드로와 요한을 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두 제자는 교회의 초석이 되신 분들입니다.  교회가 기둥과 같이 여기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아니오’라고 하지 않고 오직 순종하던 제자들이었는데, 순종하다보니 좋은 습관을 가지게 되었고, 그 좋은 습관이 위대한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고, 좋은 인격을 형성하게 되었고, 위대한 사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두 제자가 맞은 편 마을에 가보니 문 앞거리에 나귀 새끼가 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제자는 나귀가 매어 있는 것을 풀고 있으니, 거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이 “나귀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라고 따져 물었습니다.  “지금 무엇하고 있는 거요” 다소 큰 목소리로 소리쳤을 것입니다.  낯선 청년들이 와서 나귀를 끌어가려고 하는데, 아니 좋게 말할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두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용한 후에는 지체하지 않고 이 자리로 돌려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나귀의 주인이라는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그가 사는 정도가 어떤 수준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넉넉한 마음과  지나가는 나그네를 위하여 한번 봉사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나의 짐승이라고 해도 나만을 위하여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귀라는 동물은 잡아먹으려는 동물이 아니라, 일시키고,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짐승을 길러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위하여 처음 내어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까짓 것 나귀 하나 빌려준 것을 가지고 생색을 낸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로 다가온다면, 지금 누구를 믿고 나귀를 내어줄 것입니까?    우리는 나귀의 주인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당시 나귀 한 마리는 우리네 농촌에서 황소처럼 아주 요긴한 밑천이었을 텐데 어떻게 선뜻 내어 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구약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는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고 있었고, 자기의 나귀지만 누가 사용하겠다고 하면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고 말하는 두 사람 청년들이 인격을 믿고, 그 두 사람의 주인이라는 사람의 인격을 믿어주었습니다.    나귀의 주인은 정말 넉넉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내 것을 드리고, 사용하실 수 있도록 내어놓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것을 사용하시고 나를 통하여 귀한 뜻을 이루시도록 우리의 것을 제공하는 것은 특권 중의 특권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것을 주님께 드리고, 베풀고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헌신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주시옵소서” 라고  일평생 간구하는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시여 나를 사용하십시오.  나를 써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기도는 성숙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제자들이 나귀새끼들을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나귀는 안장도 없는 어린 나귀인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벗어 걸쳐놓은 그 옷 위에 타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나귀란 동물은 짐을 운반하는 비천한 짐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왕의 왕이 되시며, 금마차를 타시고 개선장군과 같이 로마의 황제와 같이 위풍당당하게 입성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입성은 승리의 입성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것을 구약의 스가랴 선지자는 이미 내어다보면서 예언의 말씀을 남겨놓았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고 했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상상해봅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등장하시는 모습은 결코 화려하거나 멋져 보이지 않습니다.   나귀를 타시는 것보다는 백마를 타고 입성하시면 위풍당당하고 화려할 것입니다.  그런 우리 주님에 대하여 이미 예언의 말씀이 있었는데,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시고 입성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준마를 타시고 개선장군처럼 입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시면서 온유하시고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 그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나중에 빌라도 총독은 무심코 한 말이 “보라 너희 왕이로다”(요19:14)라고 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나귀는 성격이 온순합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당신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셔서 무거운 멍에를 지고 많은 짐을 지시겠다는 의지로 나귀를 타시고 들어가셨습니다.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것을 통하여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여든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면서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유대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였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고 민족의 자존심을 살리고 로마로부터 독립을 가져올 민족의 해방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기대하는 것은 정치적인 메시아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외친 말을 직역해보면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되도다.”라는 말인데, “호산나”라는 말은 “제발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많은 군중의 환호성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호산나”를 크게 외치고 싶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길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길을 가시고 있습니다.  주님은 영광 받으시는 것 같지만, 사실 수난의 길이요, 핍박을 받으시고, 죽으시면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그 길을 가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을 갈 수도 없고, 그 깊으신 뜻을 다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무지와 불신까지도 주님은 다 끌어안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박수갈채를 받으시면서 고난의 길에 접어드시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 무지하여 예수님을 오해하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비웃는다고 하여도 예수님은 우리의 무지와 불신까지도 품어주셨고,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한 가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우리도 겉옷을 벗어 주님께 드리고 우리는 옷 벗고 일하는 종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의 옷이란 인격과 성품과 신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낮아지고 겸손하게 주님의 뒤를 따르는 종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도 한 마리의 나귀가 되어 주님을 모시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을 모시고 갈 수 있는 것은 보잘것없지만 한 마리의 나귀가 되어보는 것입니다.  나의 등에, 주님을 모시고 높은 언덕길을 걸으며, 가파른 내리막길을 걷고 깊은 골짜기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고난 받으신 자리에서 나도 고난을 받고, 주님이 머무시면 우리도 머물고, 주님이 일하시는 나도 일하는 주의 종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모합니다.  주님은 나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주님은 저의 생명이십니다.  주님은 저의 사는 모든 것이 되십니다.  주님은 저의 자랑이요, 저의 전부이십니다.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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