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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십자가를 져라 (눅 23:26, 32~43) - 고난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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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져라 (눅 23:26, 32~43)


고난주간의 주제는 십자가요, 그 결론은 부활이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다. 십자가에 관한 태도에 따라, 그 사람이 멸망당하기도 하고, 구원받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가져야 된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증인이 되는 일이다. 십자가를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고, 기독교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다. 

왜 세상이 이렇게도 어지럽고 혼란한가? 인간의 중심 속에, 십자가를 제외시켰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 믿는 성도들도 십자가의 의미가 점점 더 퇴색되어 가고 있다. 요즘 십자가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목에 걸고 다닌다. 그런데 십자가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이, 더 많이 사용한다. 

어느 지방에, 교회와 절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런데 절간은 조용한데, 교회는 조금 시끄럽다. 교회에서 열심히 찬양을 불러대자, 그 소리가 다 절간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절간에서 야단이 났다. 승려들이 지지 않으려고, 불경을 외우는 목소리가, 덩달아 커지게 되었다. 

그래서 주지승은, 승려들을 모두다 모아놓고, “이 중에 누가 대표로 교회에 가서, 제발 좀 조용히 하라고 해라. 너무 시끄러워서, 염불이 자꾸만 헷갈린다고 해라. 누가 좀 빨리 가라!”고 했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교회에 가는 것이 그렇게 두려워!”하자, 

그때 한 동자승이 일어나서, “주지 스님, 제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하더란다. 지금까지 십자가는 기독교 용어요, 기독교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정치인, 깡패, 심지어는 절간에서도, 십자가를 들먹이는 세상이 되었다. 

1. 그러면 십자가는 무엇인가? 
본래 십자가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시작됐다. 국가 반역죄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매달아 죽이는, 아주 끔찍하고 잔인한, 사형 법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로마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그때부터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다. 십자가는 누가 뭐라고 해도, 무섭고 끔찍하고 잔인한 형벌이다. 고통 중에서 가장 큰 고통이다.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일 뿐 아니라, 부끄러움의 상징이다. 이방인은 십자가가, 부끄러움의 상징임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님이 고난당하시는 장면은, 복음서에 나타난다. 그러나 대부분, 육체적 아픔이 아니라, 정신적 아픔, 즉, 조롱, 멸시천대, 창피로 인한 고통을 묘사하고 있다. 수치가 고통보다 참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은 아픔은 참아도, 부끄러움은 참기 어렵다. 죄의 심판은 부끄러움에서부터 시작된다. 

유대인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온다. 수제자 베드로에게 3번이나 부인당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받는다. 옷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때린다. 머리를 흔들었다. 정말 메시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자신을 구해보라는 놀림을 받는다. 가시 면류관을 씌웠다. 
유대인은 오늘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그 이유는 기독교가, 십자가를 전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누구든지 나무에 달려 죽으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믿기에(신21:23),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는다. 그런데 바울은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는지 말씀한다.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해 대신 저주를 받으셨다는 증거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버림받고, 철저히 심판을 받으셨다. 모든 인류의 죄가 십자가 위에서 심판받았다. 주님이 당하신 수치와 고통은, 인류가 죄 값으로 당하는,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죄에는 무서운 심판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죄를 짊어졌을 때, 죽을 수밖에 없다. 십자가는 그만큼 무섭고, 죄는 반드시 심판을 당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증거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자,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 휘장은 담을 말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담이 있었지만, 막힌 담이 무너졌다. 예수님의 몸이 찢어지면서, 하나님과 나 사이의 휘장이 찢어졌다. 천주교는 직접 나갈 수 없고, 신부를 통해서 나가지만, 우리는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나갈 수 있다. 이처럼 십자가는 화목하게 만드는 능력이다(엡2:14-16). 

십자가는 부활의 능력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자, 무덤이 열리면서,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났다(마27:52-53). 이는 부활에 대한 예시였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는, 악한 권세가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기에, 모든 인류는 다 땅에 묻히고 부활은 없었다. 

그리나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사망의 결박이 다 풀렸다. 사망의 권세를 꺾으심으로, 부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죽음에 대한 종말선언이다. 십자가를 붙들 때, 사망 권세가 물러나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주변에는, 많은 십자가가 있었다. 

2. 십자가의 종류  
(1) 저주의 십자가, 사망의 십자가가 있다(33下).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가 있다. 그 당시 십자가 처형은, 가장 악독한 사람들을 본보기로 죽였다. 유대인의 율법이 아니더라도, 두 강도는 천국을 감히 바라보지도 못할 사람들이다. 십자가에서 숨이 끊어질 때까지 달려 있다가, 새와 짐승에게 다 뜯기고 죽어야 할, 강도들이다.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한 강도는 십자가에 달렸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았다. 그가 십자가 아래서의 삶이야 어떻든지, 마지막 순간만큼은 진실해야 하고, 회개하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데, 죄 없으신 예수님을 비방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남을 위한, 용서의 기도, 자기를 조롱하며 못 박은 사람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들었다. 그랬다면 그는 자기 죄 값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고 있었기에, 마음이 녹고, 그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일어나, 감동이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조롱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비방하는 이 사람은, 결국 저주의 십자가를 지고,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가고 있다.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을 기회를 놓쳐버린 멸망의 십자가다. 오늘날도 구원의 길인 예수님을 소개받고도, 영접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죄 값으로, 저주의 십자가이다. 그래서 지옥의 불을 면치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우리는 결코 이런 사람이 되지 말자. 이 안타까움을 보면서, 먼저 구원받은 우리들이, 그들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 작정하고, 기도하고, 헌신해야 한다. 

(2) 회개의 십자가, 용서받은 십자가, 구원받은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다른 행악자는 (42)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 하소서”라고 하며, 예수님께 구원을 간청한다. 그도 처음에는 다른 강도와 함께 욕했다(마27:44). 

그러나 자신의 죄를 보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깨달았다(40). 자신은 죄 값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알았다. 그러나 옆에 계신 주님은, 죄 없으신 분이심을 알이,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41)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구원을 요청하였다(42).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서 (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면서, 그의 간청을 들어 주셨다. 그는 자신의 죄악을 용서받고 구원받았다. 무엇으로 구원받았는가? 그의 선한 행위가 아니다. 그에게 선한 행위는 없었다. 

그는 주님을 위해, 냉수 한 그릇도 떠 드린 적이 없다. 그의 손이 못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발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 발자국도 옮기지 못했다. 그의 두 발은 못 박혔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선행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다. 

본문의 행악자만 아니라,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이다. (롬3:10)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하였다. 자신이 죄인임을 자백하고,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죄를 회개하고, 자신을 의탁하면 구원받는다. 

(3) 구원의 십자가, 죄사함을 주시기 위한 십자가가 있다(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자신의 죄 값이 아닌,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들 한 가운데 서 있다. 

예수님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심한 고통, 갈등, 괴로움, 수치의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 위에서(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의 담을 허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시기 위한, 용서의 십자가이다. 예수님이 용서해주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사방에 있는 자들이 모두 대상이다. 모두가 죄로 인한 원수였고, 원수처럼 처신했다. 

바리새파, 사두개인, 로마 군병, 지나가던 행인, 좌우에 달린 죄수, 심지어 제자들도 다 배신하고 도망갔다. 모두 미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용서의 기도를 하신다.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예수님의 기도를 대할 때, 우리도 용서해 주지 못할 사람은 없다. 

오늘 이 구원의 십자가를 바라보라.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자. 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하라. 그러면 죄를 사함 받고,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런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4) 사명의 십자가, 내 몫의 십자가가 있다(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ἐπιτίθημι, 두다, 놓다), 예수를 따르게(Ὄπισθεν, 뒤에서부터) 하더라.”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는 말은, 헬라어로 뒤에서 지고 가게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주경 학자들 중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위 부분을 계속 지고 가고, 시몬은 뒤에서 밑 부분을 지고 갔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갈 때, 구레네에 사는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되었다. 그러나 시몬은 불평 없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과 함께 골고다까지 올라갔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졌다. 이 십자가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십자가요, 사명의 십자가이며,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다. 

그런데 우리는 괴롭고 힘들다고,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았는지요! 예수님은 (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이라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가 아니라 무리들이다. 무리란 자기 필요에 의해서, 주님을 따라다니다가, 자기 욕망과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어떤 유형의 십자가든, 달게 지는 사람이 있을까? 없다. 누구나 십자가는 꺼려한다.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다. 

그러다 보니까, 본회퍼가 지적한 대로, ‘값싼 은혜’만을 추구하는, ‘값싼 신자’들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다.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없다. 씨 뿌리는 수고가 없으면, 추수의 기쁨도 없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는 선택이 아니다. 

십자가를 져야 부활이 있고, 진정한 기쁨이 있고, 영광이 있다. 십자가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지면 좋겠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는 잘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원하는 마음이 없다고, 아예 포기해야만 하는가? 아니다. 억지로라도 제야 한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므로, 많은 축복을 받았다. 

3. 억지로 지었던 십자가 
(1) 하나님께 쓰임 받는 축복이다. 
교회 역사 가운데,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아니라, 이방 안디옥 교회다. 

(행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 교회에는, 여러 명의 선지자와 교사들이 있었다. 여기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은, 니게르는 ‘검다.’는 라틴어다. 

시므온과 시몬은 똑같은 이름이다. 구레네 시몬은 그 후에, 안디옥 교회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 다음에 구레네 사람 루기오가 나오는데, 구레네 시몬이 같은 동네 사는 친구, 루기오에게 복음을 전해서, 교회 리더로 쓰임을 받았다. 이처럼 억지 십자가를 졌는데,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 

주님의 일은 자원해서 하면 좋지만, 때로는 억지로라도 해야만 한다. (눅5장)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잡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 화가 치밀어서 순종하기 힘들었지만, 억지로라도 순종했다. 

그 결과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고, 다른 배의 동무들에게 와서 도와달라고 하니,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께, 사람을 취하는 종으로 쓰임 받는 존재가 되었다. 

(요11장)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유대지방으로 가자고 했더니, 제자들은 단체로 불평한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8) 그들은 가기 싫은 길을 억지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억지로 끌려갔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일생 놀라운 경험을 한다. 억지로라도 복종하니까, 이런 축복의 자리에 서게 되는구나!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2) 온 가족을 구원했다(막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시몬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다. 

(롬16:13)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 시몬의 아내는 예수님을 믿고, 얼마나 헌신하는지, 바울이 그를 어머니로 불렀다. 교회에 나온 사람들 중에, 이런 고백을 하는 분들이 많다. 

많은 사람이, 가족들이 사정하고 부탁하며, 거절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강제로 끌려와 구원받은 경우들이 많다. 저도 어머니가 죽기 전에 소원이라고 하셔서, 강제로 끌려왔는데,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었다. 억지로라도 나오지 않았으면, 평생 후회할 뻔했다. 

그 당시에는 분명히 억지였는데, 구원받은 후에는 너무나 잘했고, 나를 이끌어 준 사람들이,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 그러므로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져야 한다. 자원해서 기쁨으로 하면 더 좋겠지만,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시기 바란다. 순종하지 못하면, 복종이라도 하라. 

순종은 이해가 되고, 납득이 돼서, 따름을 말한다. 그러나 복종은 이해가 안 되고, 납득이 안 되도, 무조건 따름을 말한다. 바울은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이렇게 억지라도 십자가를 지면, 축복이 따른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경우가 있다.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를 드리는 일이다. 마귀는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나가고, 예배하는 일을 싫어하기에 방해한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모이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렇기에 억지로라도 모여서 예배해야 한다. 

억지로라도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대면하여, 기도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고 기쁜 시간이다. 그런데 기도하기 싫을 때가 있다. 영적으로 침체될 때, 육체적으로 피곤할 때, 기분이 영 좋지 않을 때, 기도하기 싫어질 수 있다. 그때 기도하지 않으면, 승리하는 생활을 할 수 없다. 

억지로라도 전도해야 한다. (눅14: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고전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 하였다. 

억지로 맡은 사역과 직분의 경우도 있다. 찬양대의 직분을 맡았다면,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져야 한다. 시간이 나면 하고, 기분이 좋으면 하고, 이런 식으로 하면 일을 하면 안 된다. 이러한 일들은 억지로라도,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다. 그 외에도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져야할 때는 많다. 

결론이다.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그분을 둘러 서있는 군중들을 그렸다. 예수님과 둘러 서있는 군중들 속에, 전체 그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를 한, 남자를 그려 넣었다. 그는 화가 자신이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 있다. 어떤 모습으로 십자가 앞에 서 있는가? 

회개하고 주님께 구원간청해서 구원받았던 강도의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우리의 허물을 자백하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자. 그러면 죄용서의 은총이 임한다. 예수님께서 달리신 구원의 십자가, 용서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자. 

또한 구레네 시몬처럼, 주님을 위해 대신 져야 할 사명의 십자가, 내 몫의 십자가를 바르게 지고 나아가는, 귀한 은혜가 이 고난주간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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