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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그리하지마옵소서 (마 16: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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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지마옵소서 (마 16:21~28)


세상에는 귀중한 것일수록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생명이지요. 
만약 값을 매길 수 있게 되면 그것은 상품이 되는 것입니다.
상품에는 값을 매기지만 작품에는 값을 매기지 않는답니다. 값을 매기게 되면 그것은 작품이 아니라 상품이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작품 중에 작품입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생명의 문제기에 세상 사람들은 그 가치를 몰라주지만
오늘 믿는 우리들은 복음의 가치에 눈이 뜨여지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하시러 십자가를 짊어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날이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백성들이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환영하였다는 유례에 맞추어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부활절까지를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들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부활하셨는데 굳이 종려 주일로 시작하여 고난주간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고난을 통하지  않고는 진정한 부활의 의미를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종려주일의 의미를 십자가를 통해 눈이 뜨여지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 이때로부터 ] 라고 시작합니다.
이때로부터 하는 말은 13절에서부터 시작되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언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나타내셨으며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은 무엇입니까?(21절)
그 사건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무리들을 떠나 헬몬산 기슭에 위치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합니다. 
[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14절에 [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 
제자들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한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견해는 대체로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독교의 창시자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회 혁명가, 또는 자선 사업가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오늘날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견해가 전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두들 예수님의 극히 일부분만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사람, 훌륭한 인물 그 이상의 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15절을 보십시오. [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이 질문은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직접적이고 주관적인 견해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얘기하듯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수제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였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여기서 그리스도란?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의 헬라어로 구약 시대에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들을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야, 우리말로는 구세주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 구원을 얻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단순히 위대한 인간이 아니라 구원자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되십니다. 
이 신앙고백을 하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17절에 [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 라고 했습니다

이 복이 어떤 복입니까?
1) 18절 [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베드로란 이름은 예수님께서 처음 시몬을 부르실 때 주신 이름으로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른 신앙고백을 통해 누리는 최대의 특권은 하나님의 교회로 세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교회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교회란 중세 시대 이후 내려오는 뾰족한 첨탑에 십자가와 종이 달린 그런 웅장한 건물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며 죄사함과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주님이 세운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2) 그리고 19절을 보십시오.
천국 열쇠를 네게 주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임하는 축복입니다. 즉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발견하고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되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그 특권이 무엇이냐? 바로 천국 열쇠인 것입니다.                 
 
열쇠가 무엇입니까? 무슨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까? 잠겨있는 것을 푸는 것이 열쇠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키요, 열쇠입니다. 본문의 이 열쇠는 단수로 나타나지 않고 복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열쇠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째는 구원의 열쇠입니다.  둘째, 말씀의 열쇠입니다.
셋째는 기도의 열쇠입니다.  넷째는 용서와 축복의 특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우리에게 이런 열쇠를 맡겼느냐? 는 것입니다.  
바로 주의 제자가 되어 주의 몸된 교회를 잘 섬기라고 맡긴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라는 말은             
이때에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른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암시해 주는 말씀입니다.

복이 있도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천국 열쇄를 주겠다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제자들의 어깨가 으쓱했을 것입니다.
야! 정말 예수 잘 믿기로 했다 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서론이고 이제 본론에 들어간다 하시면서 
[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이다 ] 라고 합니다. 이 말은 베드로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직 복음을 온전히 이해를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복음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참된 복음을 전하면 외면합니다. 되려 거부반응을 나타냅니다.
시골에서 오랫동안 농사를 짖고 살던 중년부부가 서울로 이사를 와서 무얼 할꼬 하다가 참기름 집 개업 준비를 했습니다. 시장조사를 위하여 시중 참기름을 먹어 본 이 부부는 통탄을 했는데 
시중 참기름이 저질이거나 가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낙화생 기름을 섞거나, 참개 깻묵에 다른 기름을 섞어    한 번 더 짜거나, 저질의 수입 깨를 섞어 짠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짜 토종 참깨로 참기름을 짜서 시중 가격보다 조금 비싼 가격으로 판매했습니다.
이윤이 박해도 신용을 지켜 장사하면 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가지 못해서 이 참기름 집이 문을 닫게 됩니다.
바로 그 집 참기름 맛이 이상하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가짜 참기름을 먹고 살아온 동네 사람들이 진짜 참기름 맛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랍니다.

이건 오늘 교인들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당시 베드로처럼 참된 복음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하면 도리어 거부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참된 십자가 복음이 선포되면 󰡒내가 죽든지󰡓아니면      
󰡒예수를 죽이든지󰡓 둘 중 하나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참된 십자가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자신을 고치든지 아니면 자신들이 잘못되었다고 폭로하는 예수를 죽이든지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들은 베드로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2.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들은 베드로의 반응은 어떠했으며 
나의 신앙에 비추어 볼 때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22-23절)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 이제는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를 이야기해도 되겠다 싶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했을 때 베드로의 입에서 엉뚱한 반응이 나오고 맙니다.
22절 - 주여 그리마옵소서
왜? 이런 반응이 나올까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베드로의 귀에는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시겠다는 이야기는 작게 들리고   
예루살렘에 가서 많은 고난을 당한 후에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처참한 이야기만 크게 들렸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우리 귀에 들릴 때 고난과 죽음만 들리면 우리의 심령도 죽고 맙니다. 그러나 복음은 결코 고난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있고 영광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성도의 행복 된 삶이 십자가에 있음에 눈이 뜨여지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3절 [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
[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한다 ] 는 말은                        
[ 하나님의 관심에 마음이 맞추어져 있다 ] 는 말이고, 
반대로 [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 는 말 역시 [ 사람의 관심에 마음이 맞추어져 있다 ]  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나는 예수를 믿고 신앙고백을 하는 자로서                
나의 관심이 어디에 맞추어져 있습니까?
우리가 만일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지 않고 내게 맞추어져 있다면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일을 한다할지라도 좀 섭섭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 사단아 네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 라는 
주님의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 원문 - 너는 내게 장애물이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니며 적이 걱정이 되어 만류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에 맞춘 그 어떤 열정도 수고도 되려 하나님의 일에는 방해가 된다는 것 아셔야 합니다.

무지한 결과로 인해 일어났던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던 스토카우스키(Leopold Stokowski)가
베토벤의 서곡을 연주하면서 나름대로 기발한 생각을 하나합니다. 
평소대로 라면 트럼펫 주자가 무대 위에서 독주를 해야 하는데 
그 날따라 관람석 뒤에 주자를 숨겨놓고 깜짝쇼를 연출하도록 한 것입니다. 
갑자기 뒤쪽에서 트럼펫을 독주하게 함으로써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던 청중들을 놀래주려고 합니다. 
드디어 연주는 시작되고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웅장한 음악이 절정을 향해 치닫습니다. 
그 순간 지휘자가 지휘봉이 트럼펫 주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트럼펫 소리는커녕 아무 소리도 나오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당신이 나올 차례라고 신호를 주어도 깜깜 무소식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지휘자의 이마에 진땀이 흐릅니다. 
얼굴이 불그락푸르락 해집니다.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겨우겨우 마무리 짓기는 했지만 결국 그 연주회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사람이 지휘자의 신호를 확인하고 트럼펫을 입에 갖다 대려는 긴장된 순간, 
공연장 후문 쪽을 순시하던 경비원이 우연히 그 사람의 행동을 보게 된 거예요. 
늘 무대 위에서 하는 연주만 보아왔던 터라 이는 필시 연주회를 훼방하려는 못된 녀석의 짓으로 생각하고 몸을 날려 그 사람을 끌어냈던 것입니다. 
그 수위는 성공적인 연주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불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그 연주회를 망가뜨린 장본인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열심히 뭔가를 하려고 애를 쓰고 수고를 했지만 
지휘자의 뜻이 무엇인가를 몰랐기 때문에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하고만 거예요.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내 열심과 내 노력만 믿고 함부로 행동하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일을 이루기보다는 오히려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리에 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영적으로 무지할 때 사단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답게 간청합니다. 
[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 
우리가 문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간언은 
베드로의 주님에 대한 깊은 사랑과 충성심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전혀 예기치 못한 반응을 하십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는 충성스런 제자를 격려하고 칭찬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주님께서는 분위기를 엄청나게 경직되게 만들었습니다.
23절에 [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

우리가 이 말씀 가운데서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왜? 주님이 베드로의 간언에 책망을 했습니까?
바로 제자가 가야할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내 뒤로 물러가라(opiso mou)`는 말은 
`나를 좇으라` `나를 따르라` 는 명령과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내 뒤로 물러가는 것이 곧 주님을 따르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22절 보세요.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예수님을 ‘붙들었다’는 말은 ‘붙들고 한쪽으로 돌려 세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깐 예수님! 나 좀 봅시다 는 식입니다. 그리고 항변을 합니다. 
드러내놓고 십자가의 길을 설명하시자 베드로가 “그렇게 함부로 말해도 되는 겁니까?” 하는 식으로 따진 것입니다.

주님을 우리가 어떻게 잘 따라갈 수가 있습니까? 내가 주님 뒤로 물러서야지 주님이 내 뒤로 물러서면 
우리는 십자가의 길에 방해거리가 된다는 것 아셔야 합니다. 

그럼 제자가 가야할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십자가의 길을 따를 수 있습니까?
3. 신자가 가야할 길이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라면 어떻게 해야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습니까?(24절)
24절을 보십시오.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여기서 예수님은 신앙 고백을 하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제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말합니다. 

첫째, 자기를 부인하라고 합니다. 자기 부인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자 하는데 가장 방해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바로 자기 생각이나 감정 - 이기심을 말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순간, 순간 선택의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때 자기 생각보다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자기 자신에게 노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예수님 더 사랑하다 보니 따르는 모든 불이익이 바로 자기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면서 주님 사랑하는 마음 없이, 자기 것 하나도 손해 보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 주님 섬기듯이 교회를 섬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바른 자세인 십자가를 진다는 것      
나의 신앙생활에 적용한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바로 헌신입니다.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신앙고백을 하는 우리에게 처음부터 목숨을 걸어라 고 합니다.

왜?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 따라가야 합니까?
4. 왜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25-26절)
이 말은 왜? 이렇게 처음부터 목숨을 걸으라고 하느냐? 는 말입니다.
25절에 [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자기 중심, 이기적인 신앙은 결코 남는 것 없이 다 잃어버리지만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질 각오 즉 목숨을 걸면  잃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막10:29절 이하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잃어버린 자는 ]
[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 그 진가는 내세에 즉 영원한 세상에서 확실한 보상을 받지만       
현세에서도 십자가 지고 가다가 잃어버린 것은 100배나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진정한 행복이 어떤 것인가? 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13장에 예수님의 비유 - 밭에 감추인 보화를 잘 압니다.
어쩜 오늘 우리에게도 보화가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우리교회라는 밭에 감추어져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양식만 심고 거두지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양식 그 이상의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보화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골2:3절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

그리고 또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십자가를 지느냐? 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십자가를 지고 살아갑니다. 즉 목숨을 걸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느냐? 는 것입니다. 나의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6절 보세요
[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 많은 사람들이 돈과, 명예와 지식과 쾌락에 목숨을 걸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진정한 행복이 없습니다. 천하에는 목숨걸 만한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 부와 명예와 지식과 쾌락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저도 더 좋은 환경과 문화시설에서 살다가  명예도 얻고 편안한 여생을 마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기에 생명을 걸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다 얻었다 해도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은 하나님의 일을 놓쳐 버렸다면 
그는 후회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미 에쿠아도르 강가에 28세의 자기의 젊은 피를 뿌리고 순교했던 선교사 <짐 엘리옷>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진짜 붙들고 있을 수가 없는 것, 어차피 놓아 버릴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을 붙들려고 애쓰는 것보다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절대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 그 영원한 것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는 것, 이것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의 삶이 아니다.’ 라고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겠습니까?
        윤동주의 <십자가>란 시입니다.<후반>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행복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부러워했습니다.
행복된 삶이란 어떤 삶이라 생각하십니까?
행복된 삶이란?
바로 자기의 생명을 걸 수 있는 일에 헌신된 삶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와 주님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무엇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하며 
진정한 복된 삶을 누릴 줄 아는 가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다고 해서 결코 멸시와 천대 그리고 파멸이나 죽음으로 끝나는 삶이 아닙니다. 어느 위인이 나를 따르며 나를 위해 목숨 바치라 하는 위인이 있습니까?
혹 독제자 가운데는 무력으로 목숨을 강요하는 경우는 있었지마는
어떻게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려고 하는 자들에게 목숨까지 바치라고 할까요?
여기에는 그 만한 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5. 십자가의 길은 어디로 통하고 있습니까?(27-28절)
바로 십자가의 죽음의 길은 부활의 영광의 길과 통하기 때문입니다.
27절 [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 
십자가의 길은 선고난 후영광의 길입니다. 오늘 종려주일입니다. 고난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나도 지고 따라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도 함께 맛볼 줄 믿습니다. 

이 영광 현실에서도 맛볼 수 있음을 말합니다.
28절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 
바로 17:에 나오는 변화산상의 신비체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 영광의 맛을 볼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눈앞에 영광 보다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고난 뒤에 영광을 바라보는 고난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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