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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싫어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 (사 53:1~9) - 고난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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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 (사 53:1~9)

 
오늘 주님의 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실개천 같은 믿음일지라도 여러분의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오늘 다시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리셔서 새로운 그림을 그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사모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 삶의 중심 축을 옮겨놓는 그런 경험을 사모하십시오.  내 삶의 중심 축의 방향을 바꾸어놓는 그런 체험들을 사모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밖에는 경험할 길이 없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내 마음을 휘감고 있는 미스터리가 벗겨지면서 "내가 이제 이런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이제는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이런 강하고 뚜렷하게 들려오는 영혼의 신호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한들 얼마나 누리겠습니까?  나의 남은 생애를 이렇게 덧없이 보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꽉 붙잡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보겠노라는 자기 결단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에, 하나님의 능력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힘에,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세에 정복당해 보십시오.
"주여, 미천한 몸 주의 것이오니 주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럴 때 평화가 옵니다.  그럴 때 기쁨이 옵니다.  그럴 때 내 속에 평화를 누리는 것이 세상이 주는 그것과 같지 아니함을 알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사람들이 돈 돈 하지만, 사람이 정말 돈으로만 삽니까?  세상에는 돈보다 귀한 것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평화가 없는 돈, 평화가 없는 땅덩어리, 평화가 없는 가정, 평화가 없는 큰집, 평안히 없는 새 집,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마음의 평안을 파멸시키는 재물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말입니다.  생명을 단축시킬 뿐입니다.  재물로 말미암아 어리석어 지지 마십시오.  재물 앞에 눈이 가리워지면 안됩니다.  재물로 내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지금 이 땅에는 현대판 탕자의 비극들이 휩쓸고 있습니다.  세계 경제의 불황으로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돈 있는 사람은 있어서 불안하고, 없는 사람은 없어서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믿음으로 살고 있는 한, 돈으로 말미암아 결코 절망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사는 한 우리는 돈으로 말미암아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간증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리고 쓰는 모든 재물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이 됩니다.  여호와 이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장하십니다.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자녀에게 먹을 것과 쓸 것을 공급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믿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하나님이 공급하십니다.  남에게 사기 치고, 남을 속이고, 남을 망가지게 해서 부정하게 재산을 모은 못된 부모도 자기 자식에게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아낌없이 줍니다.  하물며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공급하지 않겠습니까?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저 단순히 믿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경험으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재물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모든 재물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고 평화를 얻으십시오.  내 재물의 모든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날마다 인정하고 고백해야 됩니다.  삶의 우선 순위를 재물에 두지 말고 하나님께 두라.  이것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들을 향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붙들지 못하고 재물을 붙들고 사는 사람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잠시 있다가 없어질 재물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우리는 더 믿음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으로 살고 있는 한, 그는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절망의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사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도하며 매달리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증인이 되리라!  이것이 나의 간증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의 찬송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더 크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나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깊은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사십시오.  포기하지 말고 믿음으로 붙잡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하나님의 영감에 감동되십시오.  내 영혼을 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감에 감동되고, 그 손길을 느끼는 사람은 결코 불평하지 않습니다.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사랑의 물결이 출렁거리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늘로부터 주시는 평화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한, 나는 결코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한, 이제부터 내 발이 가는  곳에, 내 손이 닿는 곳에, 내 몸이 가는 곳에 평화의 물결이 크게 일어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믿음으로 살아서 여러분의 집안에 평화의 물결을 일으키십시오.  내 자녀들 속에 평화의 물결을 일으키십시오.  내 몸 속에 평화의 물결을 일으키십시오.  오늘 여러분의 심령에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일생을 슬픔과 고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한 수난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수난자는 계속해서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배척을 받고 거부를 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아주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가 받고 있는 슬픔과 고난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저지른 잘못이나 죄로 인해서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슬픔을 대신 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고난을 대신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대신에 고난을 받고 슬픔을 당하는 이 수난자를 향해서 오히려 손가락질하고 있습니다.  모욕을 하고 있습니다.  배반의 화살을 쏘아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난 당하는 자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고난을 가장 세밀하고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가리켜서 '메시아의 수난 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8세기 때의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보다도 700년 정도 앞선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고난 당하심과 죽으심은 어쩌다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계획하신 것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렸다.  그가 상했다.  그가 맞았다.  그가 징계를 받았다.  그는 멸시를 받아 버림받았다.  특별히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서 고난 당하시는 메시야의 모습을 두 가지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여기에서 "누가 믿었느냐?"라는 말은 아무도 믿는 자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라는 이 질문은 누구도 그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아예 처음부터 사람들에 의해 거절을 당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건만 예수님께서는 처절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십자가 위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거룩하신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앙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은 1장 11절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에게서조차도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종교 지도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로부터도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3년 동안이나 사랑으로 가르쳤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싫어 버렸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을 위하여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낙심과 무서움 때문에 예수님을 싫어 버렸습니다.  3년 동안이나 함께 하면서 그 엄청난 사랑을 받고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 자기들의 스승이신 예수님을 이처럼 싫어서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처참하게 싫어 버림을 받아야만 했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그 이유를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은 연한 순 같이 나약해 보이셨습니다.  마른 땅에서 겨우 나온 뿌리처럼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었고, 위풍당당한 풍채도 없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우러러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인간적인 매력도 전혀 없으셨습니다.  한 마디로 볼품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  무슨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겠느냐?"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외모가 너무 초라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배척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저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싫어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보십시오.  빌라도의 법정에서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묻습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살인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랴? 그렇지 않으면 예수를 놓아주랴?"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릅니다.
"우리에게 바라바를 놓아주소서."
예수님은 살인자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흉악한 강도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처절하게 싫어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간고를 많이 겪으셨습니다.  고통을 많이 겪으셨다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사람들에게서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뺨을 때리면서 희롱했습니다.  갈대로 예수님을 치면서 희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씌우면서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사람들의 외면과 멸시 속에서 죄인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무리 원수 같은 사람이라도 죽는 순간에는 불쌍하게 여깁니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는 측은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는 그 마지막 순간에도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서만 버림을 받으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 위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부르짖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류 역사상 어느 누가 예수님 만큼이나 처절하게 버림을 받았겠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우리도 남들에게서 멸시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배신을 당하고, 버림을 받을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배운 것이 없다고 무시를 당할 때도 있고, 가진 것이 없다고 멸시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못생겼다고 멸시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멸시와 조롱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그것 때문에 너무 절망하지도 마십시오.  세상이 그럴수록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먼저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보다 더 처절한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내가 버림받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은 처절하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이 지금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힘들고 외로울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위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버림을 받으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주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입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머릿돌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쓰시기를 작정하신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로부터 쓰임 받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외모를 봅니다.  사람은 환경을 봅니다.  사람은 그의 배경을 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택하실 때에 결코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학력을 보지도 않습니다.  재물을 보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마음 중심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싫어 버린 바 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권세를 누리고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오늘 본문에서 고난 당하는 메시아의 모습은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온갖 고난을 다 당하시고 죽으신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을 함께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매를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시절 교회학교 선생님들에게서 자주 듣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철수라는 아이는 본시 성격이 매우 명랑하고 쾌활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커갈수록 성격이 내성적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했습니다.  외톨이로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학교에 가는 것조차도 싫어했습니다.  심지어 집에서는 책가방을 싸들고 학교에 간다고 이야기하고서는 뒷동산에 올라가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올 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타일러 보고 때로는 달래보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참다못한 그의 어머니가 회초리를 들고서 사정없이 치면서 다그쳤습니다.  그제야 철수는 소리내어 울면서 왜 자신이 학교에 가는 것을 그토록 싫어하는지 이유를 밝혔습니다.
"학교에 가면 저를 보는 친구들마다 놀리잖아요.  어머니 얼굴이 귀신의 얼굴과 같다고요.  저도 귀신의 아들이래요.  그러니 제가 무슨 재미로 학교에 가겠어요?"

그제야 철수의 어머니는 왜 자기의 얼굴이 그토록 흉하게 일그러졌는지 비로소 철수에게 그 까닭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얘야, 나도 과거에는 이쁜이라고 불려질 만큼 얼굴이 고운 사람이었다.  네가 갓난 아이 때 잠시 너를 재워두고서 집밖으로 나갔다 왔더니 그 사이에 그만 집에서 큰불이 나고 말았다.  너무나도 불길이 거세어서 모두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지.  그러나 차마 나는 너를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그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갔단다.  그리고는 너를 품안에 안고 나오다가, 그만 화상을 입고서 얼굴이 이렇게 흉하게 일그러지고야 말았단다."

그 말을 들은 철수는 어머니의 품에 와락 안겼습니다.  그리고는 흐느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제가 다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집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동네 친구들을 다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어머니의 흉한 얼굴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되셨다.  나는 어머니 때문에 살았다.  이 세상에서 그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우리 어머님이 제일 이쁜 미인이다."
철수는 그 때부터 두 번 다시 어머니의 흉한 얼굴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질고를 지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슬픔을 당하신 것도 우리를 대신해서 당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 예수님이 찔리셨습니까?  왜 예수님의 이마가 가시 면류관에 찔리셔야 했습니까?  왜 예수님의 손과 발이 굵은 못에 찔리셔야 했습니까?  왜 예수님의 허리가 날카로운 창에 찔리셔야 했습니까?  오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그가 징계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그 후손인 우리 인간들의 죄악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인 자들이었습니다.  영원히 죽어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죄로 멍든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시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채찍을 맞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찔리셨고,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상하셨기 때문에 그 찔림과 상함 안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이 다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시고, 나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으셨기 때문에 그 징계와 채찍의 맞으심 안에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다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삶이 힘들고 지칠 때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주님께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 받고 힘을 얻으십시오.

계속해서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같이 읽겠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양이 목자를 떠났습니다.  그래서 그릇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그릇 행하다는 말은 제 멋대로 행동했다는 말입니다.  목자를 떠나서 제 멋대로 행동하는 양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필경 광야를 헤매다가 사나운 짐승에 찢겨서 죽고,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보건대, 선한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나서 죄에 빠져 죽음의 광야를 방황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고, 속죄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자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다시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자유함을 누리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사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를 대신하여, 내 죄를 대신하여 죽음을 당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를 누리고 평화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왜 고난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본문 8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예수님이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지셔야 했던 것은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할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허물 때문에 예수님은 그 모든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싫어 버림을 당하고, 갖은 멸시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에게 힘과 권세가 없으셔서 고난 당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당장이라도 하늘로부터 열두 영이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오실 수 있는 능력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할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싫어 버린 바 되어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강포를 행하다는 말은 폭력을 휘두르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폭력을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폭력을 휘둘렀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입에 궤사가 있으신 적이 없습니다.  말과 행동에 전혀 잘못이 없는 분이십니다.  죄와는 상관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악인처럼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아마도 강도들과 함께 묻어버리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계획을 막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하나님은 아리마대 부자 요셉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아리마대 부자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를 위해서 바위 속에 파놓은 새 무덤에 모셨습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 선지자가 700년 전에 예언했던 그 말이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정확하게 예수님에게 그대로 성취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침묵하셨습니다.  하실 말씀이 많이 있으셨고 얼마든지 말씀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침묵하신 그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땅히 침묵해야 할 그 자리에서도 침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조금 힘들다고 해서 입을 열어서 불평합니다.  조금 속이 상하다고 해서 입을 열어서 마구잡이 떠들면서 원망을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채찍을 맞으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갖은 조롱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만을 바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이 될 수 있는 비결은 입을 적게 움직이고 몸을 많이 움직이셔야 합니다.  손과 발을 많이 움직이십시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처럼 착한 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손과 발은 움직이려고 하지 않고, 말로 떠들고 입만 많이 움직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처럼 악한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게으른 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살이 찢기시며 죽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서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철저하게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당하신 고난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내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고 침묵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십시오.  이것이 고난 주간에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교훈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신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벗기고, 때리고, 조롱하고, 끌고 가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고, 침 뱉음을 당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멸시와 굴욕과 천대를 받으신 예수님을 바라 볼 때에 내가 만난 고난이 무슨 문제며, 내가 당한 시련이 무슨 대견스러운 것인가?  내가 만난 수치, 부끄러움이 무슨 큰 것이나 되는 것처럼 그렇게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천대를 받으시고 싫어 버린 바 되신 우리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 모두가 고백해야 합니다.
"주여, 여기서 지금 나를 구하소서!"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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