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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너진 제단을 다시 세우는 사람 (왕상 18: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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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제단을 다시 세우는 사람 (왕상 18:30~40)


사람 중에는 똑같이 성경을 읽어도 성경에서 납득할 수 없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끄집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장 인기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가인이 누구와 결혼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아담의 가족밖에 없었을 텐데 가인이 결혼을 했다면 자기 누이와 결혼을 한 것이 아니냐,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본인들은 마치 큰 발견을 한 것처럼 이런 질문을 하지만 저는 옛날부터 성경을 읽었어도 이런 것에 대해서는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와 했겠지요. 여자와 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많은 것을 말하지만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지 않는 부분 속에 그런 자질구레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 있을 것입니다. 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귀담아 듣지 않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려고 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가 성경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모아서 학설을 만들어서는 그것을 남들에게 열심히 가르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컨대 어떤 신학자는 창세기 12장에 ‘그 땅에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더라’라는 구절을 따다가 그것을 근거로 ‘이 구절을 보니까 모세가 창세기를 썼을 수가 없다. 창세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기록되었을 것이다’라는 학설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무엇을 하자는 것입니까? 모세가 창세기를 쓴 것이 아니라면 창세기를 믿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까? 모세가 썼으면 믿고 모세가 안 썼으면 믿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누가 썼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고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과 삶에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고 이것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저는 캐나다에서 예수님을 처음 믿고 성경을 열심히 배우기 시작할 때 어느 젊은 선생님이 저희 학교에 점심시간에 오셔서 우리가 성경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가르친 것을 기억합니다. 그분의 강의를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한 가지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갈 때 나귀에 나무를 실어서 갔다는 성경구절이 있는데 오랫동안 어떤 신학자들은 그 당시 팔레스타인에 나귀가 없었다고 주장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에 대한 성경 구절은 역사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최근에 그 당시 팔레스타인에 나귀가 있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함을 자랑하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충분히 알면 성경은 얼마든지 믿을만한 증거가 되는데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을 불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인은 남들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성경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훑으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만한 이유를 찾으려고 합니다.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을 허락했겠느냐. 이런 참혹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다.’ 

그런데 이것은 멀리서 남에게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면서 참견하는 사람들의 얘기이고 정작 911 테러를 당하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는 오히려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 다큐멘터리까지 만들었습니다. ‘911 테러의 기적’ 그러니까 직접 당한 사람은 말이 없는데 왜 멀리서 남의 일에 참견하면서 그래서 이렇다느니 저렇다느니 세상이 불공평하다느니 하나님이 어떻다느니…. 자기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하세요. 왜 남의 일에 대해서 남은 말하지 않는데 왜 남의 일을 지켜보고 참견하면서 거기에 해하여 하나님은 이렇다느니 저렇다느니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컵에 물이 반이 차 있을 때 ‘물이 반 밖에 없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물이 반이나 있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똑같이 성경을 읽으면서도 충분히 믿을만한 증거를 보는 사람이 있고 믿기 어려운 것들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지켜보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고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본인들의 자유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본인이 그렇게 느낀다는데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을 느끼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고 못 느끼는 사람은 못 느끼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인데 그러나 그것이 남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자녀를 둔 부모가 집에서 애가 듣는 앞에서 선생님에 대해서 ‘아무개 선생이, 아무개가…’ 이런 식으로 선생을 업신여기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자녀가 듣게 되면 그 자녀는 자기 선생님을 무시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만일 부모가 자녀가 듣는 앞에서 교회학교 선생님에 대해서라든가 전도사님에 대해서라든가 목회자에 대해서 함부로 말을 하게 되면 자녀가 그것을 듣고 무엇을 배우느냐,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을 배우고 기독교 신앙을 업신여기는 것을 배우고 결국은 그 아이의 신앙과 인격에 해를 끼칠 것입니다. 

사람이 본인 마음속에 차가움이 있든 냉소주의가 있든 미움이 있든 불신이 있든 이것을 갖는 것은 본인의 자유지만 본인만이 그것을 간수하는 것이 아니고 남들에게도 그것을 전해준다면 그것은 자칫하면 남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남을 영적으로 실족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심각한 것입니다. 내 어두움 때문에 남들의 영혼도 어두워지고 남들이 믿음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누가 책임을 진다는 얘기입니까. ‘만일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너희가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예수님은 무서운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한번은 큰마음을 먹고 성경을 읽어봐야겠다 해서 새번역 신약성경을 집어 들었는데 하필이면 처음 읽은 구절이 ‘너희 오른손이 너희를 범죄케 하면 찍어버리라 온 몸이 성하여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손 하나 없이 생명이 이르는 것이 낫다’ 그 말씀을 읽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성경을 덮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무서운 책이구나! 어떻게 보면 애석한 일이지요. 차라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런 성경구절을 읽었으면 아, 성경은 참 좋다 이러면서 계속 읽었을 텐데.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경험하기 전에 하나님을 어려워하는 법도 배워야 됩니다. 하나님을 어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은 거룩하신 것을 알고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알아야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이고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알지, 하나님을 한 번도 어려워해 본 적이 없고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것을 모르고 그냥 좋은 면만 듣게 되면 당연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떻게 행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깊이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밤이 있고 그 다음에 아침이 오는 것이고, 구약이 있고 그 다음에 신약이 있는 것이고, 율법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은혜와 진리가 온 것입니다. 이 순서가 중요한 것입니다. 율법이 먼저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왔기 때문에 그것이 복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고난을 경험하시고 그리고 영광에 이르신 것과 마찬가지에요. 

우리 옛 말에도 고진감래-쓴 것이 떠나가고 단 것이 온다, 쓴 것이 먼저에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길,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지만 그 과정에는 마라의 쓴 물이 있고 또 광야의 고단함이 있고 아말렉의 대적함이 있고 이것을 이기고 극복하고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결국에 대하여 확신해야 됩니다. 잘 될 것이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잘 될 것이다, 승리할 것이다, 내 안에 시작한 하나님의선한 일을 이루실 것이다, We shall overcome, 우리는 극복하게 될 것이다, 천성에 들어갈 것이다,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 그러나 면류관을 쓰기 전에 가시면류관도 써 봐야 되고 욕도 먹어봐야 되고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되고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눈물로 씨를 뿌려봐야 됩니다. 젊었을 때 고생은 돈 주고도 하라고 했는데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려는 사람은 고생을 해봐야 됩니다. 그래서 사자 굴속에 던져진 것과 같은 위태함, 또 형들에게 배반당하는 것과 같은 요셉의 아픔, 또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내 자아관이 위축되고 내가 지극히 무력함을 느끼고, 내 인생에 대하여 의문을 갖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고 정말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나, 정말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시고 정말 하나님이 역사하실까 하는 것을 고민을 해보고 그리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해서 그래야 남들을 도와줄 수 있고 낙심한 사람을 위로할 수 있고 건질 수 있고 구원할 수 있고 물론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만 남들을 섬길 수 있고 남의 믿음을 도와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그 사람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람을 실족시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그 사람의 영혼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요즘 TV 개그 프로 중에 이런 개그가 있지요. ‘우리는 거침없이 독설을 내뿜는 독한 놈들이다. 나는 TV보는 애들 동심을 다 깨놓을 거야.’

여러분도 보셨습니까. 그건 물론 개그니까 그런가보다 하지만 인간의 순수함을 의도적으로 깨뜨리는 것은 죄입니다. 사람의 영혼의 순수함을 이미 순수함을 잃어버린 어른이 일부러 깨뜨리는 것은 그건 죄를 가르치는 것이고 또 인간을 불신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순수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동심을 깨뜨리는 것이든 순수함을 깨뜨리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의도적으로 깨뜨리는 것은 그것은 그 사람의 믿음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실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되는 부분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에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하는 자는 차라리 목에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하나님이 반드시 거기에 대해서는 벌하신다는 얘기입니다. 남의 영혼을 실족케 하는 것처럼 큰 죄가 없습니다. 아마도 사람이 사람의 영혼을 실족하게 하는 가장 못된 방법은 심리적인 폭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심리적인 폭력의 피해자는 자기의 자아관이 너무 위축돼서 사람과도 원만한 관계를 갖지 못하고 하나님도 신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용서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 심리적인 폭력을 가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에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이 사람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그의 믿음을 돕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선사업을 하러 오신 것도 아니고 의료 활동을 하려고 오신 것도 아니고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말씀에 ‘내가 온 것은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함이다’고 하셨습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신 것이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귀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시고 당신의 생명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것, 죄에서 사람을 건지는 것, 사람이 믿음을 세우는 것이 가장 귀중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믿음을 돕는 과정에는 우리가 선하다고 부르는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사람의 믿음을 돕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되고 섬겨야 되고 베풀어야 되고 이 모든 일을 해야 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결국은 그 사람의 믿음을 일으키고 그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무엇을 세우는 것은 어렵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만 무너뜨리는 것은 삽시간에 가능합니다. 집을 지을 때, 건물을 지을 때 얼마나 오래 걸리고 돈이 많이 듭니까. 그러나 무너뜨리는 것은 금방입니다. 사람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세월이 걸렸어요. 하나님이 이 오랜 기간 동안 우리의 믿음을 세워주신 것입니다. 아직 불완전한데 그럼에도 여기까지 오는데 그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무너진 제단을 수축했다고 했습니다. 30절을 보면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이 말씀 속에 친절함과 애정을 볼 수 있지요. 이스라엘의 제단이 무너졌다는 말은 한때는 제단이 서있었다는 얘기입니다. 한때는 제단이 서있었는데 어느 순간에 무너졌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방치했어요. 지금까지 무너진 상태로 있었어요. 그걸 엘리야가 수축한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제단이 무너진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믿음이 있었는데 옛날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겼어요. 그런데 어느 시점에 제단이 무너졌어요. 그리고 그것을 방치했습니다. 지금까지 무너져 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스스로 수축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대신 수축해 주어야 됩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무너진 단을 수축한 것처럼.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엘리야가 그들에게 말 한대로 내게 가까이 오라 해서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제단이 수축되려면 하나님이 쓰시는 종에게 가까이 와야 됩니다. 교회에 가까이 와야 됩니다. 자고로 교회를 멀리 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했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사람은 스스로 혼자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만약에 혼자 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까이 와야 됩니다. 교회를 가까이 하고 하나님이 쓰시는 종들을 가까이하고 그리고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내가 수축하는 게 아니고 결국은 하나님이 수축해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 서로를 통해서 무너진 제단을 하나님이 다시 세우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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