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려움을 당할때 (룻 2:1~10)

  • 잡초 잡초
  • 417
  • 0

첨부 1


어려움을 당할때 (룻 2:1~10)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뉘 소녀냐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의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의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여러 성도님들의 기도 덕에 한국을 잘 다녀왔다. 이번에 여러분들의 기도를 많이 느꼈다. 가는 곳 마다 도전적인 말씀을 전했는데 그 분들이 잘 받아 주셨다. 하나님께 단순히 도와달라는 주제보다는 이런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빚으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서가는지를 보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했다. 한동대 성도들과 참으로 많은 은혜를 나누었다.

오늘 말씀을 전하기 전에 전도서 3:1-8의 말씀을 보자.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모든 상황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누고 있다. 한 쪽은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고 다른 한 쪽은 거부하고 싶은 것이다. 

예를 들어, 태어나는 것은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고, 죽는 것은 거부하고 싶은 것이다. 웃을 때, 춤출 때, 거둘 때는 받아들이고 싶은 때이지만 울 때, 고통할 때, 잃을 때는 우리가 거부하고 싶은 때이다. 우리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 전도서 3:11을 보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인생 중에는 이럴 때가 있고 저럴 때가 있다. 행복한 때가 있고 불행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control 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본문의 1절을 보면 ‘But God’의 은혜가 있다. 다시말해서 ‘by chance’로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와 주관 속에서 선한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물론 사실이지만) 우리 인생의 그림은 전혀 달라진다. 

모든 일들이 그저 우연하게 일어난다면 우리는 단지 주저 앉아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그 분이 지휘하신다면, 어려움이 닥쳐오고 원하지 않는 일이 다가온다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빚으시려 하는구나’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영성과 성품을 upgrade하는 기회로 알고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여러 pattern의 반복 가운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정적 은혜와 선한 섭리를 받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기한의 때가 차매 닥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섭리로 허락된 것이라고 믿으며 go through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도로서 이 모든 것을 go through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방법을 나누어 보기를 원한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삶을 통해서 어려움과 고통을 경험한다. 그러나 본문(2장)부터는 하나님께서 나오미와 룻의 가문을 회복시키신다.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대박이 터지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뭔가를 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복시켰다는 점이다. 그들의 고통이 허락된 섭리라면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도움을 회복해가는지를 보아야 한다. 두 가지를 보고 싶은데, 그것은 바로 Humility와 kindness이다. 

(1)Humility : 이것은 낮아짐이다. 낮아짐을 통해서 go through하고 견디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룻은 어머니 룻에게 가서 이삭을 줍겠다고 말한다. 룻기에는 ‘줍다’라는 단어가 12번이나 나온다. ‘줍다’라는 단어는 영어로 ‘glean’이다. 룻기에서는 ‘glean’이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있다. 1:22을 보자.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그들은 보리 추수할 때에 돌아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 때에 줍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레19:9-10을 보자.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는 당시에 이미 welfare를 준비하신 것이다. ‘너희들은 추수 때에 모퉁이는 추수하지 말라. 그리고 떨어진 것을 줍지 말라’고 하셨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들과 심지어는 야생동물이 먹게 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다. 그들을 위해서 배려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지켰다. 그리고 나오미와 룻은 이 말씀을 믿고 나아갔다. 

과부인 그들이 땅에 있는 것을 줍겠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그들의 낮아짐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가난함을 공개하며 모퉁이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자신들을 낮추는 모습이다. 그들은 체면을 protect하지 않았다. 체면을 생각했다면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여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은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낮아지라는 것이다. Let go 할 것을 let go 하라는 것이다. Downsizing하면서 낮아지라는 것이다. 룻기는 사사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때에는 자신들의 소견으로 살았던 때였다.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믿던 시대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화되고 깨끗한 가문을 세우고 있다. 처음에 그들은 낮아지는 가문이었고 어려울 때에 let go할 줄 아는 가문이었다. 그러니 나중에는 그 가문을 통해서 다윗왕이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 

우리는 많이 교만해지고 높아진 것 같다. 한국에서 말씀을 전할 때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소개하였다. 그들은 부흥하는 교회처럼 보였고 잘 나가는 교회인 듯 했다. 그러나 주님은 문 밖에서 두드리고 계셨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가 되었다. 그저 기술만 있는 교회가 되었고 기도와 눈물 흘림이 없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우리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고 낮아지며 let go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control 할 수 없는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낮아짐을 통해서 우리가 이 사실을 알기 바라는 것이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서 엘리사를 찾아왔을 때에 엘리사는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을 하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 장군이 갑옷을 벗는다는 것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옷은 감투였고 지위의 상징이었다. 인간이 옷을 벗으면 모두 똑같아진다. 그가 옷을 벗으니 참으로 누추한 모습이었고 썪어가는 살을 보여줄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일곱 번이나 그렇게 하였다. 하나님은 수치와 겸비와 겸손을 통해서 우리를 고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다. 우리는 그동안 그렇게 살아왔다. 물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것이지만 그전에 낮아짐이 필요하다. 이민 초기를 기억해보라. 미국에 와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붙잡고 믿음의 야성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와 영성 위에 이민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대단히 어려워졌다. 우리 함께 낮아지고 let go할 것을 let go하자. Essential하지 않은 accessary들을 모두 내려놓고 겸비한 자세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될 것이다. 벧전5:5을 보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우리가 나오미와 룻과 같이 이삭을 줍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보아스’를 만나게 하실 것이다. 이 어려움을 humility의 자세로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

(2)kindness : 이것은 인자함이다. 우리는 지금의 상황을 인자함으로 맞이해야 한다. 보아스는 부자였고 매우 인자한 사람이었다. 그가 일꾼들에게 인사하는 것과 일꾼들이 보아스에게 인사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의 인격과 인품을 추측할 수 있다. 보아스는 새로온 소녀인 룻을 보게 된다. 보아스는 룻을 소개 받은 후에 ‘딸아 마음껏 줍어 가라’라고 한다. 그리고 일꾼들에게 그 소녀를 보호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대다수의 밭 주인들은 흘린 것까지 다 가지고 가려고 애쓰지만 보아스는 흘린 곡식을 마음껏 가지고 가리고 허락한 뒤에 그녀를 보호하기까지 하였다. 보아스는 loving kindness가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 중에는 낮아져야 할 사람과 베풀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은 그들 모두에게 은총을 베푸신다. 하나님은 낮아질 때에 은혜를 주시고 은혜 받은 사람을 통해서 또 다시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보아스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다시 흐른다. 이렇게 은혜가 계속 흐르는 가운데 우리의 어려움은 극복될 것이다. 우리가 은혜를 베풀어 줄 사람이 있는가?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낡고 긁힌 바이올린에 대한 일화가 있다. 허름하게 보이는 바이올린 하나가 경매시장에 나왔다. 진행자는 1불부터 시작할 것을 제의하였다. 몇몇 사람들이 2불, 3불을 외쳤다. 이 바이올린은 3불에 팔리기 직전이었다. 그 때에 뒤에서 어떤 신사가 앞으로 걸어나와서 이 바이올린의 먼지를 털어내고 연주를 시작하였다. 잠시후 연주가 끝나고 사람들은 1,000불, 2,000불, 그리고 3,000불을 외치며 아우성이 되었다. 

이 글의 제목은 ‘The Touch of Master’s Hand’였다. 그 바이올린이 높은 가격으로 인정된 것은 훌륭한 연주가의 touch 때문이었다. 우리의 가치는 그저 흙의 값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흙을 이용해서 당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드셨다. 우리의 엄청난 가치는 하나님의 touch와 입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혈의 손으로 우리를 touch하시고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touch 하시니 은혜의 사람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은혜를 전해야 한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단시간 내에 무너질 것이다. 우리는 이미 베풀어 줄 수 있는 자리에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손길을 거두지 않으시니 흙 값이 아니라 오늘 날 하나님 자녀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움 속에서 한 가문을 어떻게 빚어가시며 어떻게 깨끗하게 하시는지를 보여주신다. 그리고 어떻게 그들을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만들어 가시는지를 보여 주신다. 그것은 두 가지이다. 바로 Humility(낮아짐)와 Kindness(베푸는 인자함)이다. 요사이 나는 이런 기도를 한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베풀 수 있는 교인들이 많으니 받은 은혜를 지속적으로 드리고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한다. 지금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그들의 은혜가 끊어지지 않고 지속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힘들어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나눔 가운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미국에 소아마비가 전국적으로 발병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때에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힘들 때였다. 

당시에 소아마비를 고칠 수 있는 의료기술은 이미 개발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자원이었다. 그래서 국민 health를 책임지고 있던 장관이 몇몇 기업으로부터 막대한 돈을 요청하였고 이 donation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필요한 금액에는 많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그는 모든 국민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March of Dime’이라는 걷기 운동을 시작하였다. 누구든지 1 mile을 걷고 dime을 donation하자는 운동이었다. 수많은 아이들을 비롯한 온 국민이 이 운동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에 어려워 보였던 소아마비는 멋지게 극복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감동적이 story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많은 것을 줄 수 없고 단지 조금씩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때에 하나님의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나는 지금도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다. 힘들어도 주님께서는 ‘But God’의 주님이 되신다. 그 분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고 모든 것을 더욱 아름답게 하실 분이다. 우리가 낮아질 때에 은혜가 임한다. 하나님께서 인자를 베푸실 때에 우리의 삶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만들 수 있다. 우리 함께 이렇게 외치기 바란다. “고난이 닥칠 때에 낮아짐과 인자함으로 극복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어려움 속에서 모든 상황을 잘 go through 하여 하나님 자녀됨을 더욱 더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