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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경건한 성도 (딤후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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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성도 (딤후 3:1~5)


B.C. 6세기경 그리스의 노예라고 전해지는 이솝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의 주인이 “목욕탕에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알아보고 오너라.” 고 하며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얼마 후 이솝은 돌아와서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라고 보고했습니다.
목욕할 준비를 하여 목욕탕으로 갔으나 사람이 가득한 목욕탕에서 고생을 많이 하고 돌아온 주인은 이솝에게 속은 것이 분해서 화를 내면서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이솝은 태연하게 “주인님. 제가 확실히 보았습니다. 목욕탕에는 한 사람만 들어갔습니다.” 화가 난 주인은 “네 이놈, 그러면 목욕탕 안에 가득한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고 뭐냐?” 하고 야단을 쳤습니다. 이솝은 말하기를 “제가 목욕탕에 가 보았더니 길 가운데 돌이 하나 있었습니다. 목욕탕에 가는 사람들이 이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래도 누구 한 사람 돌을 치우지는 않고 불평과 원망만 하고 지나갔습니다. 얼마 후 한 손님이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손님은 팔을 걷어 부치고 땀을 흘리며 돌을 치워버리고 목욕탕에 들어갔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은 단 한 사람만 목욕탕에 들어간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이야기를 들은 주인은 이솝을 칭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단기간에 세계기독교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큰 부흥을 이룩했습니다. 그래서 세계교회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기도원마다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세계의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한국교회를 탐방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를 탐방한 어느 외국교회 목사는 말하기를“한국은 교회와 기도원에는 그리스도인들로 가득한데, 사회 속에는 그리스도인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교인은 많은데 성도는 희귀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B. C. 6세기경에 살았던 이솝이 오늘 날 한국교회를 탐방했다고 한다면 그의 눈에 비춰진 경건한 참 성도가 몇 명쯤으로 보였겠습니까? 

세상 종말기가 되면 경건한 삶을 살아가기 어려운 타락한 시대가 올 것을 예언 한 것이 본문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분석하면, 1절은 말세가 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라고 했습니다.“고통 하는 때”라는 것은, 원어의 의미로“위협하는 때”라는 뜻입니다. 말세가 되면 악한 영의 미혹으로 사람의 심성이 사나워 질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본문 2절~4절까지는 말세에 나타날 악한 영에게 미혹된 특징 즉 타락상을 예언하고 있습니다.“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5절은 이러한 세대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취해야할 삶의 방향을 제시한 것입니다.“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하셨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에게서 돌아선 참된 성도는 어떠한 것이겠습니까?

1. 경건한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사랑합니다.

사도행전 10:1~2에“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점령군 장교였던 고넬료는 점령군들이 일반 백성들에게 흔히 행하는 횡포를 본받지 않았습니다. 경건한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어려움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제했습니다. 구제하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구제했습니다. 즉 힘써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이것이 곧 경건한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예언하기를 말세가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지므로 교만하고 참소하며, 은혜를 망각하므로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은 식어지고 대신 돈을 사랑하며, 자기를 사랑하며, 무정하며, 사나워진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러한 현상들이 없을까요? 너무 흔한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경건한 신앙으로 여호와를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며 이러한 사람에게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34:9~10에“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확실한 약속입니까? 백수(百獸)의 왕자인 사자 특히 젊은 사자는 굶주릴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산천의 짐승은 모두가 사자의 먹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혹“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약속에 약속을 더한 분명한 말씀이며 맹세에 맹세를 더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신앙으로 여호와를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성도를 사랑하시며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2. 경건한 성도는 말을 조심합니다. 

개구리가 뱀에게 발각되어 잡아먹히는 것은 시끄러운 입술의 울음소리 때문입니다. 꿩이 사냥꾼의 표적이 되는 것도 입술의 울음소리 때문입니다. 물고기가 잡히는 것은 언제나 입으로 낚시 바늘을 물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생명과도 같은 경건을 해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입술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1:26에 말씀하시기를“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입술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1) 입술에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로마서 3장 13절~18절 말씀에“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2) 입술에 쉬지 아니하는 악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 8절에“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입술에 가증함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 9절~12절에“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눈에 비췬 인간의 입술입니다. 이렇게 타락한 입술에서 나타나는 활동상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 입술이 타락한 사람은 환경에 대해 항상 부정적이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과 불평을 일삼습니다.
하나님은 범사에 감사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과 불평을 일삼았던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까마득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거울입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곧 광야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받은바 은혜는 쉬 잊었습니다. 눈으로 목격했던 하나님이 나타내신 기적도 곧 잊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을 보았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전무후무한 기적도 보았습니다. 날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양식인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반석에서 샘물이 솟아나는 기적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능력은 곧 잊고 현재의 어려움만 바라보며 원망과 불평을 일삼았습니다. 이러한 원망과 불평은 낙심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노예로 살았던 애굽을 그리워하며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자고 야단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상까지 만들어 섬겼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끝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입으로 말한 입술의 열매였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34:12~13에 말씀하시기를“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고 하셨습니다. 

B.C 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4만의 군사를 이끌고 페루사와의 전쟁에 나갔습니다. 알렉산더와 그의 군사들은 물이 없는 사막에서 모두 지쳐있었습니다. 그때 용맹스러운 신하 한 사람이 죽음을 무릎 쓰고 적진에 들어가 한통의 물을 길러와 대왕께 바쳤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 물을 마시려다 말고 전 군대를 집결시켰습니다. 이때 알렉산더는“우리 다 같이 이 물을 먹고 힘을 얻어 싸움에서 이깁시다.”라고 하면서 물을 그릇에 담아 온 군대에게 뿌렸습니다. 이에 감동된 군사들은 힘을 얻었습니다. 이로 인해 파사의 100만 대군과 싸워 이겼습니다. 이토록 사기란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목이 말라 지친 4만 군대의 사기가 충천했을 때 100만 대군을 이겼습니다. 
이것은 군사력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온 소망의 말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항상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소망의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말을 다 들으시고 말대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4:28에 기록하시기를“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입술이 타락한 사람은 비판과 험담을 일삼습니다.
마태복음7장 1절~5절 말씀에“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치기 힘든 습관은 불평과 불만을 토하며 남을 헐뜯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세 딸을 둔 부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딸들은 다 한 가지씩 약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게으름뱅이였고, 둘째는 도벽이 있었으며, 셋째는 남의 험담을 즐겼습니다. 그런데 아들 삼 형제를 둔 한 부자가 세 딸을 모두 며느리로 삼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딸의 아버지가 솔직하게 고백을 했습니다.“제 딸은 각각 한 가지씩 결점이 있답니다. 며느리로는 부족한 점이 많아요.”그러나 부자는 자신이 책임을 지고 고쳐놓겠다면서 그들을 며느리로 맞았습니다. 부자는 게으른 큰며느리를 위해 많은 하녀를 고용했고, 도벽이 있는 둘째 며느리를 위해 창고의 열쇠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남의 험담을 잘하는 셋째를 위해서는 항상 맞장구를 쳐주었습니다. 그런데 두 며느리는 곧 결점을 깨닫고 그것을 고쳤으나 셋째의 험담은 점점 더 심해질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혀의 해악에 대해 야고보서 3:6~10에 말씀하시기를“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나태주 시인이 쓴 시 가운데, 말의 영향력이 너무 크기에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어 말을 참는다는 내용의 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사랑한다는 말 차마 건네지 못하고 삽니다.
사랑하다는 그 말 끝까지 감당할 수 없기 때문
모진 마음 내게 있어도 
모진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나도 모진 말 남들한테 들으면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기 때문

외롭고 슬픈 마음 내게 있어도
외롭고 슬프다는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외롭고 슬픈 말 남들한테 들으면 
나도 덩달아 외롭고 슬퍼지기 때문
사랑하는 마음을 아끼며 삽니다.
모진 마음을 달래며 삽니다.
될 수록 외롭고 슬픈 마음을 숨기며 삽니다.

그렇습니다. 경건한 성도는 입술의 말을 조심합니다. 경건한 성도는 입술의 말을 참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이웃에 대해 험담하며 흉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덮어줍니다. 우리의 억만 죄악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덮어주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3. 경건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12절에 말씀하시기를“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종말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편리함은 날로 더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어느 날 갑자기 종말을 고하는 날이 옵니다. 

몇 해 전 휴거(携擧)라는 책과 영화가 세상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늘을 날아가던 비행기의 조종사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경건한 삶을 살아가던 이 조종사가 휴거된 것입니다. 비행기는 곤두박질을 하며 추락했고 현장은 참혹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달리던 열차관사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경건한 기관사가 휴거했기 때문입니다. 열차는 마주 달려오는 열차와 충돌하여 레일을 탈선합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아우성입니다. 버스의 운전사가 갑자가 사라졌습니다. 비록 가난하긴 했지만 그래도 경건하게 살았던 이 기사는 휴거를 당했습니다. 자동차는 충돌하고 뒤집히며 거리는 온통 아우성과 비명소리로 가득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 예언입니다. 

사도행전 1장 9절~11절 말씀에 예수께서“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즉 세상의 종말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은 경건하게 살아갑니다. 대홍수의 심판의 예언을 믿고 기다렸던 노아는 가족들과 더불어 경건한 삶을 살아가며 배를 만들어 대홍수의 심판을 이겼습니다.

우리들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이란 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준비의 연속입니다. 아직은 날씨가 쌀쌀합니다만 그래도 곧 봄이 올 것을 알기에 농부들은 씨앗을 심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아직 날씨가 따듯한데도 겨울이 올 것을 알고 월동준비를 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자신이 아직은 젊지만 필연적으로 노후가 올 것을 알기에 노후준비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은 참으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때가되면 이 세상의 종말이 옵니다. 이것은 성경 예언의 핵심입니다. 도적같이 갑자기 주님이 재림하십니다. 그러므로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베드로후서 3:10~12)라고 하셨습니다. 예비해야 합니다. 무엇으로 예비해야 합니까?“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베드로후서 3:11~12)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세상 종말의 심판에서 우리들을 건지시고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날의 특징은“도적같이”“덫과 같이”“임산부의 산기와 같이”갑자기 임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날을 예비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람답게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종말을 예언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야 합니다. 종말을 앞둔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한 것입니까? 베드로후서 3:9에“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바라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당부가 무엇입니까? 

디모데후서 4:1~2에 말씀하시기를“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4:23에는“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처럼 다급하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을까요? 세상 종말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재림의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편리하고 아름답긴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풍조로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인 디모데후서 3:1~5에 말씀하시기를“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하셨습니다.“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을 본받지 아니하고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선”사람의 삶은 어떠한 것입니까?

첫째, 온 마음 온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사랑합니다.
둘째, 언제나 혀를 조심하여 입술에 재갈을 먹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의 재림을 기다리며 경건하게 살아갑니다. 영혼구원을 위해 힘써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깨끗합니다. 많은 사람의 본이 되므로 빛의 사명을 다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성도를 사랑하셔서 한없는 은혜와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참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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