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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정적 순간에 가져야 할 신앙인의 태도 (막 14:4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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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순간에 가져야 할 신앙인의 태도 (막 14:43~52)


미국은 매년 3만 명이 넘게 총기 사고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하루 평균 81명이 총으로 희생되고 있는 것입니다. 1999년 4월 20일 미국 콜로라도 덴버의 고등학교에서 두 학생이 총기를 난사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때 무고한 13명의 학생과 교사가 사망하였습니다. 사건을 저지른 이들은 히틀러의 생일을 맞아, 이런 광기 어린 학살을 감행했다고 합니다.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학생들을 캠퍼스의 한군데에 모아놓고, 한 사람씩 총구를 갖다 대며 이렇게 물었답니다.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믿는다고 고백하면 죽이고 안 믿는다고 하면 살려 주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가 서 있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살기 위해서 “믿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답니다. 믿음이 좋은 캐시 버낼이란 학생 차례가 되었답니다. 그는 죽음의 총구 앞에서도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그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 그리고 너희도 역시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만 한다.” 이 말을 들은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네가 믿는 하나님의 곁으로 가라” 하며 총을 쏘았고, 결국 캐시 버낼은 그 자리에서 죽었답니다. 그 후 살아 난 학생들은 캐시 버낼의 순교 앞에서 자신들의 비겁함을 한없이 부끄러워했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자신들도 캐시 버낼과 같은 담대한 증인으로 서야 되겠다는 신앙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급기야 미국 전역의 각 학교에서는 ‘우리도 캐시 버낼의 길을 따르자’라는 운동이 벌어지게 되었고, 캐시 버낼의 순교적 결단을 기념하는 국기 게양대 앞 기도회는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다고 합니다.

 생명을 내어 노아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믿음으로 결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결단이 아닐지라도 인생이란 매일 매 순간이 결단에 의해 좌우됩니다. 잘못된 선택 앞엔 실패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지만 잘 된 선택 앞엔 성공과 생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비장의 결단을 해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만났습니다. 소설로 말하면 이제부터 클라이맥스에 이른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의의 지시를 받고 배신자 유다의 안내를 받으며 로마 군인들과 성전 군관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해야 할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이 때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는 때입니다. 만약 이런 현장에 우리가 있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는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결단을 해야 하겠습니다. 

유다는 결정적인 순간에 어떻게 결단합니까? 하나님을 떠나는 결단을 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먹는 결단을 합니다. 전체 지도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보기 때문입니다. 잠시 고난을 통과하면 다가올 축복을 보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만 보기 때문입니다.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작은 점과 선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 열 둘 중 하나였습니다.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제자라는 호칭과는 어울리지 않는 결단을 합니다. 목사, 장로, 집사, 권사, 성도라는 호칭을 더럽히는 결단을 합니다.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찬양'이라는 이름입니다. 부모의 소원인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결단을 합니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돈 궤를 맡아 제정을 담당했던(요12:6) 핵심 측근입니다. 

신뢰를 저버리는 결단을 합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돈 중심의 결단을 합니다. 돈이 중심이 된 인생은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을 떡 먹듯합니다. 어려울 때 도움 받은 사람을 헌신짝 버리듯 버립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순간 짓밟아 버립니다. 신의를 나타내야하며 충성을 드러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가면을 쓰고 광대놀음을 합니다. 30냥에 예수를 팔아먹습니다. 권력과 결탁합니다. 가룟 유다가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로마 군인과 성전을 지키는 성전의 군관(눅22:52)들을 이끌고 왔습니다. 이 체포는 유대인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이 주축이 되었습니다. 산헤드린은 백성들의 대표인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로 구성되는 국가 최고 의결 결정 기관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은 예수님을 체포하라는 영장을 발부하였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 무장한 군사들을 파송했습니다. 이 때 동원된 군인 가운데는 천부장도(요18:12) 있는 것으로 보아 수백 명의 군인이 동원되었을 것입니다(마26:47). 

로마 군인들은 칼을 가지고 왔고 그 외의 군인들은 폭동 진압용 몽둥이를 가지고 들이 닥쳤습니다. 체포조 치고는 무장한 많은 군인들입니다. 예수님의 무력적인 저항을 염두해 두고 실수 없이 체포하기 위해서 엿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능력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연하게 배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체포를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가룟 유다는 체포조와 미리 군호를 짜 놓았습니다. 체포조 중에는 예수님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설령 안다하더라도 어두워서 예수님의 얼굴을 식별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입 맞추는 자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고 말합니다. 신뢰와 사랑의 표시인 입맞춤을 통해 배신의 키스를 한 것입니다. 보통 존경의 표시를 나타내는 "입맞춤"은 헬라어로 "펠레인"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45절에 나타난 "입맞춤"이란 말은 정렬적인 키스를 의미하는 단어인 "카테필레센"입니다. 유다가 얼마나 철저히 위장을 했는가를 짐작하는 단어입니다. 유다는 실수 없이 예수님을 잡으로고 군인들에게 닦달합니다. '단단히 끌어가라'는 악한 말을 퍼붓습니다. 결정적 순간에 지난 정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치사한 행동을 합니다. 유다가 이렇게 체포 조에게 닦달한 것은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도망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다는 배신의 키스로 간교하게 속마음을 감추고 예수님께 접근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마26:49,50)라고 인사하며 존경과 사랑의 표시인 입맞춤을 합니다. 배신을 위해 가증한 술책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위장, 편법, 술수, 사기 등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떠나는 결단을 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살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어떻게 결단합니까? 하나님과 함께하는 결단을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결단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결단을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군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48, 49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당당하게 칼과 폭동 진압용 몽둥이를 들고 온 군인들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강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쳤는데 잡지 않더니 왜 이 밤에 은밀하게 잡으러 왔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런 죄나 저항 의사가 없는 사람을, 그것도 한 밤중에 몰래 무기를 들고 강제 연행하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그러대도 순순히 잡히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라는 말씀합니까? 성경을 이루려 함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말씀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래 전에 이미 메시아께서 인류의 죄를 지시고 "범죄자 중 하나"로 취급받게 될 것을 예고했습니다(사 53:12). 스가랴 선지자 역시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칼로 치실 것이며, 그때에 제자들이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슥 13;7). 주님의 체포는 바로 이러한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이미 아버지의 뜻대로 하겠다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결단의 순간 얼마든지 예수님을 피할 수도 있고, 기적을 통하여 그들을 다 제압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결박되지 않을 만큼 충분한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들에게 잡혀가면 수많은 수모를 당하시고, 침 뱉음을 당하는 수치를 당하실 것을 아시고 있었습니다. 채찍을 맞으며 고문당하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허리에 창을 받으시고 십자에게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처절하게 돌아가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 이런 죽음을 피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옮겨 달라고 3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는 것임을 예수님은 아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길로 결단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결단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내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결단하는 것입니다.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죽어야 한다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순교의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미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멀리 보는 자가 바르게 갈 수 있습니다. 방향이 잘못되면 속도는 무의미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결단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큰일은 할 수 없습니다. 죽음 후에 부활할 것을 예수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결정적 순간에 신앙적 결단을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죽음 후에 영생이 있고 이 땅이 이 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결단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마가복음을 처음 읽은 성도들은 로마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이고 이 때 로마의 황제로부터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할 때입니다. 

마가복음이 기록된 때는 대체적으로 주후 66-70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때가 바로 네로에 의해 심각한 박해를 받을 때입니다. 주후 64-69년 사이에 있었던 네로의 박해로 심각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로마시의 2/3가 잿더미로 변하자 네로는 그리스도인을 방화범으로 몰라 철저하게 핍박하였습니다. 이 때 상황을 E. 로제는 타키투스(Takitus)의 말을 인용하여 "기독교인들에게 동물 가죽을 씌워서 사나운 사자로 하여금 살을 물어뜯게 하면서 기독교인들을 조롱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게도 하였으며, 콜타르를 발라 불을 피워 로마의 밤거리를 대낮 같이 밝게 하였으며, 끓는 가마솥에 집어 던지기도 하고, 어두움 속에서 갑자기 침입하여 횃불로 태워죽이기도 하였다"고 그때의 참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때 신앙인들은 결정적 순간에 천국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하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 어떤 유혹과 핍박이 다가온다하여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우리는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인간편이나 하나님 편이냐 갈릴 길에서 하나님 편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말씀을 이루는 결단을 하여야 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성공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십자가를 회피하는 결단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결단을 했을 때 우리에게 항상 좋은 일만 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어야 할 것인가 회피해야 할 것인가 선택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이 때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결정적인 결단의 순간에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예수님 편에서 좇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막상 십자가를 져야 하는 순간 십자가를 피해 버립니다. 50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버리고 도망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버립니까? 예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왜 도망합니까? 살기 위해 도망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기 싫어 도망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피해 도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불이익을 받을 것 같아 도망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손해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도망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거짓으로 입 맞추는 제자 가룟 유다가 위장형 배신자라면 무조건 도망가는 대부분의 제자들은 기회주의형 배신자들입니다. 별로 앞장서는 일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서면 뒤따라갑니다. 베드로가 결단코 예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이 들도 덩달아 맹세를 합니다.(막14:31) 베드로처럼 꼭 예수를 따라야 하겠다는 결단이나 가룟 유다처럼 철저히 예수를 배신하려는 결심을 한 것은 아니지만 위기의 순간이 오자 아무 생각 없이 달아나 버립니다. 이익이 있을 때, 좋을 때, 영광의 자라에 있을 때,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할 때만 따라다니고 정작 고난이 다가오니까 도망가 버립니다. 회사가 잘 나갈 때는 죽도록 충성할 것 같다가 어려워지면 쉽게 등지고 도망갑니다. 교회가 잘 될 것 같을 때는 자신 혼자 모든 일을 할 것 같다가도 어려워지면 쉽게 핑계를 대고 떠나 버립니다. 아무 말 없이 떠나버리고 명분을 만들어 비난하고 떠나 버립니다. 

51절을 보십시오. 또 한 사람의 도망자를 소개합니다. 알몸으로 달아난 사람입니다. 어떤 이유로 알몸에 베옷만 걸쳐 입었는지 모르지만 붙들리게 되자 겉옷(베 홑이불)을 벗어 버리고 알몸으로 도망을 갑니다. 이 겉옷은 털로 된 것으로 부유층이 입는 옷이었습니다. 얼마나 군인들이 웃었겠습니까? 체통도 위엄도 없습니다. 철부지 같이 보였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였겠습니까? 교부들은 마가였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유월절 만찬을 마치고 주님과 제자들이 마가의 집을 떠났을 때 마가는 홑이불(겉옷)을 덮고 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가는 측근을 통해서 유다가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을 체포하려고 군사를 부르러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답니다. 

주님이 위험에 처한 것을 알게 된 마가는 유다의 배반 소식을 주님께 전하기 위해 겉옷만 두르고 급히 겟세마네 동산으로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가 겟세마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님이 체포되신 후였답니다. 그러자 마가는 일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려고 겉옷만 입은 채로 주님의 뒤를 따라 갔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대제사장이 보낸 군사들이 그를 잡으려고 했답니다. 그러자 그는 놀라서 급히 벗은 몸으로 달아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캄캄한 한 밤중이니 벗은 몸으로 도망쳐도 누구인지 몰랐을 테니까 아마도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 자신의 경험담을 기록해 놓았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어떻든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수치도 체면도 불구하고 도망가는 인간의 모습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은 이 결정적인 순간에 십자가를 지기로 결단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고난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며 모든 고통을 감내하십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7)”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4)”

꽃은 보이지 않는 거름이 있기에 화려합니다. 좋은 가정이나 건강한 국가나 복음적인 교회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은 곳에서 고난을 감수하고 십자가를 지고 희생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루어진 업적들입니다. 결정적인 결단의 순간에 목숨까지라도 바치는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결단을 할 때 때로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아야 하는 결단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영광은 좋은데 십자가는 피하고 싶습니다. 부자가 되고는 싶은데 부자되기 위한 고난을 피하고 싶습니다. 천국은 가고 싶은데 천국 가는 통로인 죽음은 피하고 싶습니다. 건강하게 살고 싶은데 운동의 고통은 피하고 싶어 합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싶은데 공부의 고통은 피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제거하는 결단이 아니라 고통이 있다하여도 사명이면 결단하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행복은 고통을 없앤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고통을 없앰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찾아지는 것입니다. 

고통은 통해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겸손해지고 주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고통도 말없이 품으면 보석이 됩니다. 천연 보석의 여왕이라는 진주는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조개가 이물질을 품고 고통을 감당한 고통의 산물입니다. 고통을 감내하기 싫어 뱉어 버리면 진주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철광석이 뜨거운 불속에서 제련되어 좋은 제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한 인간이 태어나기 위해 얼마나 어머니가 고통을 감수했습니까? 우리는 교회 건축을 놓고 십자가를 지는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싫다고 떠나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외면하지 말고 지시고 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금처럼 사용하기 위해, 칭찬과 영광과 존귀의 자리에 오르게 하기 위해 고통의 용광로를 통과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밀턴은 시력을 잃고, 아내와 자식을 사별하고 직장을 잃고 친구를 잃은 고통의 과정을 통과하여 걸작품 ‘실락원’, ‘복락원’, ‘투사 삼손’라는 명작을 남겼습니다. 

미생물학의 창시자인 파스퇴르는 46세가 되던 해에 뇌출혈로 몸의 절반이 마비되는 고통의 과정을 통과하며 광견병 치료와 전염병 예방법 발견 같은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헬렌켈러는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삼중고의 고통을 통과했고, 헤르만 헤세는 언어 장애라는 고통을, 서머셋 몸은 8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0살 때는 아버지마저 떠나보낸 사별의 고통을 통과하며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십자가도 아무나 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결정적인 순간 십자가를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둑을 잘 두는 사람들은 대마를 잡기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할 줄 압니다. 큰 병에 걸리면 수술 받는 고통이 참는 것입니다. 결단이 순간에 한발 물러서서 전체 그림을 보아야 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지말고 꼭 보아야 할 것을 보아야 합니다. 닭의 시야를 가지고 30cm 앞만 보지 말고 독수리의 시야를 가지고 3km 앞을 보아야 합니다. 과거를 향한 창문만 열어 놓고 보지 말고 미래를 향한 창문을 열어 놓고 마지막에 만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질 때 부활의 영광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이만큼 성장하고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살게 된 것도 십자가를 지신 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다 처음으로 순교하신 분은 토마스 선교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런던대학의 뉴칼리지를 졸업하고 23살 때 아내와 함께 선교사로 중국 상해에 왔지만 아내 캐롤라인이 병으로 먼저 천국에 갔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토마스 선교사는 한 때 낙심하여 선교회를 떠나 청나라 세관에서 통역 연수관으로 근무하였습니다. 그 때 그는 한국인 두 명을 만나 한국말을 배우며 한국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865년 9월 5일에 중국을 떠나 10월 9일에 황해도 자라도에 도착하여 전도지, 성경 16권과 달력을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일이 있은 후 2달 반 동안 백령도를 비롯한 섬에서 전도를 하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대원군에게 전도를 시도하려다 2번이나 폭풍을 만나서 중국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답니다. 수많은 고통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토마스 목사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제너럴셔먼 호는 평양감사 박규수에 의해 불에 타버렸고 토마스 선교사는 포박되어 1866년 9월 2일 27세 젊은 나이로 모래사장에서 박춘권에게 참수형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지 2년 6개월 만에 자신도 한국 땅의 최초의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피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 는 터툴리안의 말대로 그의 순교의 피는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성경을 받은 토마스를 죽인 박춘권은 나중에 변화되어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구경나왔던 12세 소년 하나는 토마스 목사가 던져 준 성경 세 권을 주워 갖고 있었는데, 몰래 숨겨 갖고 있다가 그 중 한 권을 박영식이라는 지방 관리에게 주었답니다. 박영식은 성경을 다 뜯어서 방에 벽지로 발랐고 그의 조카가 집에 놀러왔다가 벽에 바른 성경을 읽고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었답니다. 후에 평양 숭실전문을 졸업하고 미국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한국인 성서 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성경번역에 큰 공헌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박영식이란 사람의 집은 후에 널다리 교회가 되어 평양 대 부흥 운동의 장소가 되었답니다. 

그가 순교한 이후 16년이 지나면서 한국의 쇄국정책은 끝나게 되었으며 19년이 지나면서 언더우드 아펜셀러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피가 뿌려진 대동강 주변 평양은 1907년 대 부흥 운동이 일어나 한국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명칭까지 얻게 됩니다. 꽃은 보이지 않은 거름이 있기에 아름답고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결정적인 결단의 순간 힘들고 어렵지만 십자가를 지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가족을 위해,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기업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3. 우리는 폭력적 결단이 아니라 사랑의 결단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결단을 하고 십자가를 지는 결단을 한다고 해고 십자가를 지는 방법이 또 중요합니다. 어떻게 십자가를 집니까? 힘의 원리에 의한 십자가입니까? 사랑의 원리에 의한 십자가입니까?

이 결정적인 순간에 베드로는 어떤 결단의 태도를 취합니까? 십자가를 지겠다고 따라갔던 베드로입니다. 나름대로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집니다. 그런데 방법이 다릅니다. 

47절을 보십시오. 검으로 대제사장 종 말고의 귀를 베어 버립니다. 폭력으로 문제를 풀려고 결단합니다. 무력적인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곁에 서 있는 자 중에 한 사람은 바로 베드로입니다. 아마 마가복음이 기록될 당시 베드로가 살아 계셨기 때문에 마가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무엇을 합니까? 예수님을 체포하는 군인들을 보고 검을 통해 무력으로 진압하려고 합니다. 흥분하고 혈기를 부리며 폭력을 사용합니다. 결정적인 순간 힘의 원리, 적자생존, 양육강식의 원리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한 대단한 용기입니다. 그 많은 군인들 앞에서 홀로 대항하는 용기가 대단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대단한 충성심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주님은 폭력을 사용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억울하고 고통스러워도 폭력으로 보복할 것을 원치 않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라고 말씀합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6:27-28)”라고 말씀합니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마 5:39)”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가르쳤던 사랑으로 행동을 합니다. 사랑의 십자가를 지시길 원하십니다. 분노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눅22:51)’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22)라고 말씀합니다.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무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피는 또다시 피를 불러 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순간 어떻게 하십니까? 끝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 만들어 주십니다.(눅22:51)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저주하고 침뱉는 사람들, 폭력을 가하며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서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용서를 빌어 줍니다. 

원수도 용서해주시고 배신자도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가 자신의 배신을, 아버지처럼 섬겼던 베드로의 배신을, 제자들의 배신을 고발자가 아니라 고백자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할 당시 이미 회개하고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신 분이십니다. 모든 신앙인들로부터 존경받으며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며 하루에 3천명을 회개시킨 분이십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이 게셋마네에서 기도하는 데 기도도 하지 않고 잠만 자다 실수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혈기 부리다 시험 들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이것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베드로가 고백했을 것입니다. 자신도 바로 이렇게 연약한 사람이었다고 자신의 잘못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백했을 것입니다. 마가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홑이불을 벗어 던지고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한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하였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신한 그들을 찾아가 용서해 주시고 다시 사명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고발자로 살지 않습니다. 남의 허물을 보며 정죄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들보를 보고 고백자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서로 위로하며 갈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정글의 법칙이 성공할 것 같지만 결국 사랑이 이기는 것입니다. 로마는 폭력으로 세계를 정복할 것 같았지만 결국 예수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일생을 인간과 사건에 관해 연구한 월 듀란트는 "이천년 동안의 역사가 지니는 교훈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를 서로 사랑하십시오. 

역사에 관한 나의 최종적인 교훈은 예수의 교훈과 같습니다. 당신네들은 이 말을 막대에 달린 사탕 정도로 여기시겠지만 한 번 시도해 보십시오.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실제적인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관심, 앎, 존경, 책임감"을 사랑의 기본 4요소라고 했습니다. 돌봄 또는 관심은 사랑의 씨앗이며, 사랑하면 자신을 개방하여 알리고 상대방의 인격을 알고 싶어 하고,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알아가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것입니다.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결정적 순간에 결단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힘의 원리가 아니라 사랑의 원리로 결단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폭력으로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로 결단하며 살아야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신앙인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는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결단을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면 우리에게 십자가가 다가옵니다. 그 때 우리는 십자가를 회피하는 결단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되 우리는 힘의 원리에 의한 폭력적 방법이 아니라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는 결단을 하여야 합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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