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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종류의 인생 (막 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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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종류의 인생 (막 4:1~20)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멸망의 자녀요 또 하나는 영생의 복된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를 택하여 자녀로 불러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보배로운 족속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 가운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자랑할 아무 것도 없으며 우리는 다 여전히 흉악한 죄인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주시고 모든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여겨주시니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믿음 안에 있다고 해서 다 같지는 않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비유를 통해서 배울 수가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네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될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씨를 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는 씨는 곧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 각각의 사람들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말씀을 뿌리지 않고는 각각 다른 밭의 상태를 구분할 방법이 없습니다. 아니 어차피 그들에게는 씨 다시 말해서 말씀이 없으니 그들 모두는 멸망의 자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 아주 엄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와 여러분 모두가 모든 주어진 기회를 통해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먼저 밑바닥에 깔아놓고 오늘의 말씀을 상고해야 할 것입니다.

똑같은 씨를 뿌렸습니다. 하지만 밭의 상태에 따라 그 결과는 달랐습니다. 뿌리는 자가 와서 뿌리는 것은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의 상태가 다 달랐다는 것입니다. 먼저 길가와 같은 마음의 사람은 말씀이 뿌려지기는 하지만 그 즉시로 말씀을 빼앗겨 버리고 만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싹을 내지도 못하고 그냥 빼앗겨 버렸으니 그에게는 생명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나아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를 통해서 말씀을 받지만 그 말씀을 전혀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뿌릴 때 사탄이 와서 즉시 그 말씀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사탄의 세력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 길가와 같이 아주 굳어진 마음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씨가 들어갈 틈도 없지를 않습니까? 그것은 그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아니 말씀을 뿌리는 즉시 그 말씀을 빼앗아 가는 사탄을 먼저 주님의 권능으로 묶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밭은 밭갈이하는 것입니다. 갈아엎는 것입니다. 워낭소리에 나오는 것처럼 소를 이용해서 밭을 갈거나 아니면 요즘이라면 경운기를 넘어 이제는 트랙터로 밭갈이를 하지 않습니까? 먼저 쟁기를 대서 딱딱한 밭을 뒤집어놓은 다음 다시 로타리를 쳐서 흙을 잘게 부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물을 대서 흠뻑 적십니다. 그리고는 씨를 뿌리되 씨가 싹이 터서 잘 자라도록 비료도 주고 잡초가 자라지 못하도록 제초제도 뿌려줍니다. 이는 곧 딱딱한 밭 길가와 같은 마음의 사람이 변화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많는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고 그들의 필요를 따라 돕고 함께 하고 나누어주기를 힘쓸 때 그들의 마음이 열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그들의 마음에 뿌린 그 씨가 마음에 뿌리를 박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이미 말씀을 받아들여 싹이 난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앞의 길가와 같은 사람은 생명이 없는 사람이니까 앞에서 분류한 멸망의 자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지만 이제 생명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의 길로 발을 디딘 사람들의 상태를 다시 구분한다면 돌밭과 같은 마음의 사람, 가시떨기로 가득한 밭과 같은 사람 그리고 옥토와 같은 사람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쉬운 말로는 있어서는 안 될 사람, 있으나마나 한 사람 꼭 있어야 할 사람으로 구분할 수도 있겠고 다른 사람에게 해만 끼치는 사람, 누구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움도 주지 않는 사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나 다른 사람과와 관계에서 볼 때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중의 이야기이고 먼저 자기 자신의 문제, 말씀을 대하는 스스로의 상태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먼저 돌밭과 같은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처음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그래서 신이 나서 믿음의 생활에 열심을 보이는데 문제는 그 속에 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돌밭이다 보니 뿌리가 제대로 뻗지를 못했습니다. 뿌리가 깊지를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물면 금방 말라비틀어지고 맙니다. 이 가뭄이 곧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으로 인해 어떤 어려움이 생기게 되면 언제 믿었느냐 싶게 뒤돌아서고 맙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떤 어려움이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몫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말씀으로 인한 어려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고 난 다음 처음으로 부딪치게 되는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사람들은 곧장 실망하고 주저앉아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큰 오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줄로만 믿습니다. 어떤 어려움도 없이 그저 순풍에 돛 단 듯이 그렇게 모든 것이 될 것으로만 믿더라는 것이죠. 하지만 사탄이 맥 없이 손 놓고 있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사탄이 방해 공작을 합니다. 그걸 이기기 위해서는 뿌리가 말씀에 깊이 박혀야 되는데 뿌리가 깊지 못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그 마음의 상태가 돌밭과 같기 때문입니다. 

돌밭과 같다는 것은 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만의 아픔입니다. 어떤 상처입니다. 뭐 한이라고도 하고 하여간 그 사람만의 어떤 고정된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것과 부딪치는 어떤 문제가 생기게 되면 그것 때문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꼭 상대방에게서 찾더라는 것이죠. 누구 때문에 그렇다 누가 어때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말처럼 누구에게 문제가 있고 그것이 내게 거북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속상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내가 안 보고 말지 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하지만 그래서 내가 돌아서서 안 보고 말면 더 이상 그런 문제는 없습니까? 아니요. 인생살이가 어찌 어딘들 그런 문제가 없겠습니까? 하지만 다시 되돌아서서 생각해 보면 사실은 그건 자기 안의 문제입니다. 만약에 낚시 바늘이 갈고리처럼 되어 있지 않고 바느질하는 바늘처럼 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건 찔리기는 할지라도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고리처럼 낚시 바늘이 되어 있으니 거기에 무엇이든 닿으면 걸리게 마련입니다. 그건 마치 낚시 바늘을 고기를 잡기 위해 준비하는 것처럼 내 안에 어떤 그런 아픔이나 편견들이 있다는 것은 꼭 시험에 들기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런 상처들이나 편견들을 주님의 은혜의 말씀으로 바로 잡아야 됩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상처를 받는 것처럼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만 상처 안 받으면 된다고요? 그럼 그런 나 때문에 상처 받는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또한 박해가 있다고 했습니다. 다른 것은 그냥 한 두 마디로 지나가면서도 꼭 교회에 다니는 것은 걸고 넘어집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어쩌고 저쩌고 합니다. 거기다가 이제 새롭게 믿은 사람일 경우는 그 주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도 좀 무시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을 합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합니다. 지금은 이런 저런 어려운 상황이 있으니 그것이나 해결되고 난 다음에 교회에 다니라고 합니다. 

또는 집 안에 우환이 있는 것은 네가 교회에 다녀서 그런 거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만 정말 그런가 해서 주저앉고 맙니다. 다른 거를 하지 말라고 하면 아니라고 그래도 하겠다고 하면서도 교회에 다니는 문제는 금방 그래 내가 안 다니면 되는 거지 이것 때문에 마음 쓸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열매는커녕 스스로 말라 죽고 맙니다.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어려움과 박해가 있다고 해도 이를 견딜 수 있어야 하고 견뎌내도록 옆에서 우리가 함께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이를 극복하고자 하면 또한 농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돕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계속해서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생활을 꾸준히 잘 합니다. 환난이나 핍박에도 잘 견뎠습니다. 그래서 이만하면 그래도 스스로 견딜 수 있겠다 싶은 상태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세상의 염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염려하지 말라. 한데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왜 염려합니까? 그건 무언가 부족하기에 염려를 합니다. 잘못될까봐 두려워서 또한 염려합니다. 그런데 부족하다는 것도 정말 부족한 건지 아니면 내 씀씀이가 커서 그런 건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잘못될까봐 염려하는 것도 그건 지금 당장의 현실이 아닙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 스스로 가정을 세워놓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내일은 어떻게 하느냐고 합니다. 그건 내일의 문제입니다. 지금은 오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염려가 되거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평안도 주시고 우리의 삶도 지켜주시고 보장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염려할 시간이 있거든 그 시간에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또 재물의 유혹이 있습니다. 사실 제일 어려운 문제가 바로 이 재물의 유혹일 것입니다. 재물이 싫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구는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황금이 돌 같이 보입니까? 세상에 돈 싫다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다익선이라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도 합니다. 문제는 내 능력 밖의 것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돈을 잘 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해야 하는데 저 사람은 나보다 못한데 어떻게 나보다 더 돈을 잘 버느냐고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체격은 아주 작은데 먹기는 몇 사람 분을 먹는 사람도 있고요 그 반대도 있잖습니까? 그거 어떤 잣대를 가지고 따지지 마시고 내게 있는 것으로 먼저 감사하고 족한 줄 알면 그거 문제될 거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은 얻고자 한다면 우선은 지금의 내가 하고 있는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도록 차분하게 하나씩 하나씩 준비를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고 하지를 않습니까? 하지만 나름대로 준비도 없이 갖춘 것도 없이 욕심으로 많은 것을 가지려고만 한다면 그건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기회가 주어져도 그것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한 선지자 학교를 다니던 학생이 그만 죽고 말았을 때 그 아내가 엘리사에게 와서 하소연합니다. 우리가 빚에 쪼들려 자녀들이 다 종으로 팔려나가게 되었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그때 너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니 있는 것은 한 병 기름뿐입니다. 그때 엘리사가 그 여인에게 빈 그릇을 많이 준비하라고 합니다. 동네방네 다니면서 있는 대로 빈 그릇을 다 빌려오라고 합니다. 그릇이 준비되었다고 하니 그러면 그 그릇에 기름을 부으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 그릇마다 가득 담긴 기름을 팔아 빚도 갚고 생활비로 쓰라고 합니다. 이처럼 그릇이 준비되어야 거기에 무언가를 담을 수 있지 준비된 것이 없으면 아무리 하나님이 베풀어주셔도 아무 것도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음의 그릇을 준비하고 받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했습니다. 받기를 원하면 먼저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받을 준비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주지 않고서는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많이 받기를 원하면 더욱 주기를 힘쓰십시오. 그것이 바로 사르밧 과부가 받은 비결입니다. 

거기다가 기타 욕심이 있다고 합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가 가지고자 하는 마음 내 능력 이상의 것을 가지려고 하는 것 그것이 곧 욕심입니다. 내 능력껏 바라는 것과 내 능력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은 다릅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자 한다면 먼저 내 능력을 키워야 되는 것이죠. 같은 논이라도 벼를 심을 때는 물을 댑니다. 하지만 가을이 되어 마늘을 심을 때는 물을 다 뺍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능력 다른 말로는 실력을 길러야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 그 능력과 실력에 맞게 바라는 것은 욕심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 능력 밖의 것을 바라게 되면 그것을 얻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 때문에 망하거나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내 것이 아닌 것을 갖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어야 합니다. 물론 부럽겠죠. 나에게는 없는 것을 다른 사람은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참으로 좋아 보입니다. 나도 저런 것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바라는 것이야 당연하겠죠. 그렇다면 그런 것을 가질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야지 그렇지 않고 그저 남의 것을 내가 가지려고 한다면 그것은 도적이요 강도일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옥토와 같은 마음입니다. 그것은 곧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있는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대로만 반응하는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은혜 가운데서 사는 것입니다. 이는 곧 성령의 사람입니다. 사랑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며 모두를 볼 때 그 사람의 조건과 상태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사람 자체를 사랑의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추하고 더럽기에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를 향해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친절입니다. 아이가 무섭거나 아니면 온통 더러워졌을 때 울음을 터뜨리며 가서 안길 수 있는 어머니와 같은 마음 그래서 달래주며 씻겨주고 새 옷으로 갈아입혀주는 것처럼 그렇게 포근하게 감싸안아주는 그러한 친절 그것이 바로 옥토와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30배 60배 100배로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사람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도 또한 탕감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친절입니다. 이런 사람은 먼저 받으려고 하기 보다는 주려고 합니다. 거기에 무슨 보답이 있기를 바라서가 아닙니다. 그저 주는 것이 즐겁습니다. 베푸는 것이 즐겁습니다. 나누는 것이 그냥 좋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주고 돌아서면 또 줄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르밧 과부처럼 주고 나서 이제는 아무 것도 없는데 다시 보니까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기를 즐겨하는 사람의 마음은 항상 즐겁습니다. 평안합니다. 그러니 언제보아도 싱글벙글 입니다. 다른 사람을 부담스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하게 만들어줍니다. 함께 웃게 만들어줍니다. 새 힘을 얻게 만들어줍니다. 이게 옥토와 같은 마음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복된 인생을 살아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어떤 환경의 문제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외적인 문제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외적인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무엇보다 내 마음의 상태가 올바르면 능히 모든 것을 견디고 이길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베풀어주는 친절을 다하는 사랑으로 영원한 생명과 더불어 복된 열매를 거두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존재입니까? 상처를 주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친절을 다하는 사람입니까? 꼭 필요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있으나 마나한 존재 아니면 있어서는 안 될 존재로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설사 어떤 사람이 도무지 있어서는 안 될 그런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까지 꼭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주는 친절한 사람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 곧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때 나는 꼭 필요한 존재로서 자리 매김을 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부터 옥토와 같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옥토로 만들기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런 친절을 다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더불어 준비도 필요합니다. 

베풀 수 있는 마음과 더불어 베풀 것도 갖추어야 합니다. 무언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어야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친절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 베풀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하다고 해도 부족하기에 더욱 가진 것이 보잘 것 없기에 오히려 더 베풀어나가는 귀한 삶을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가심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백배로 거두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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