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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마 1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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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마 11:7~9) 
 
  
어느 아파치족의 족장이 연로해서 족장직을 더 이상 수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후계자를 뽑아야 했습니다. 족장은 아파치족의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체력, 지혜, 리더십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젊은 족장을 원했습니다. 마침내 어려운 관문을 거쳐 3명의 젊은이가 뽑혔습니다. 노 족장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아파치의 자랑스러운 용사들이여! 저기 눈 덮인 로키산맥의 최고봉이 보이는가? 이제 아무런 장비 없이 저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그곳의 증표를 가지고 이 자리에 일찍 도착하는 사람에게 나의 추장 직을 물려주겠노라."

세 젊은이는 악전고투 끝에, 정상에 올라가 저마다 꼭대기에 올라갔다는 증거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산꼭대기에서만 피는 꽃 한 송이를 가져온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한 용사는 산꼭대기 맨 윗부분에 있는 붉은빛의 돌 조각을 증거물로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용사는 빈 손이었습니다. 추장은 노여운 얼굴로 세 번째 용사를 바라보며, 왜 빈손으로 돌아왔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족장님, 저도 분명 저 산꼭대기에 올라갔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 산 너머에 있는 비옥한 땅과 넓은 강물과 수많은 버팔로 떼를 보았습니다. 저는 누가 우리 족장이 되든지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아파치족은 저 산을 넘어가야 합니다."
  
결말이 어떻게 났을 것 같습니까? 어떤 청년이 족장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 산너머 산을 보고 꿈너머 꿈을 보았던 청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하신 예수님의 질문은 세례요한을 보고 돌아온 사람들에게 하신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라는 물음을 세 번씩이나 던지고 있습니다. 7절에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8절에서도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그리고 9절에서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결국 본다는 것은 무엇을 보려고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는 곧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하는 실천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보고자 하는 것을 보게 되고 본 것을 실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어떤 일을 할 때 분명한 목적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무엇을 보려고 그곳에 갔더냐?하신 질문에서 그 "무엇"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작 볼 것은 보지 못하고 보지 않아도 될 것만 보게 되고 맙니다. 쓸데없는 것만 보게 됩니다. 

방향이나 목적 없이 떠도는 배를 우리는 표류한다고 합니다.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갖고 움직이는 배를 우리는 항해한다고 합니다.표류하는 배는 침몰당할 위험성이 커집니다. 힘 차게 향해하는 배는 목적지인 항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성도 여러분들은 표류하고 있는 중입니까? 아니면 항해를 하고 있는 중입니까?

너희들이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요한을 보고 왔는데 진정 무엇을 보고왔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왜 이런 질문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까? 그것은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나가서 그 외치는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았고 회개의 세례를 받기도 했지만,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호기심에서 나왔다가 다른 것들만 보고 돌아간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핵심과는 거리가 먼 것에 치중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세례요한이 가리키는 그 손가락 끝을 보아야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나는 그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려고 왔다"는 "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옷이나 보고, 광야의 갈대나 보고 왔다면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사람은 다 보고 삽니다. 사람은 눈으로 보고(시각), 들어보고(청각), 냄새를 맡아보고(후각), 먹어 보고(미각), 만져(촉각) 봅니다. 그러나 무엇을 보고,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례들을 말씀하시고 스스로 답을 하셨습니다.  

  1.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 서 있는 그곳 광야엔 흔들리는 갈대가 있었습니다. 요단강 하류 요단만에는 갈대축제라도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갈대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갈대는 길이로 치면 3~4미터씩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가늘고 속이 비어 있어서 작은 바람결에도 흔들거리며 소리를 내게 됩니다. 그리고 잘 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사 42:3)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갈대는 잘 흔들리고 잘 상하고 잘 부러집니다.
  
광야에는 갈대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들을 보았다면 아마도 실망했을 것입니다. 
갈대와 같은 신앙인들은 어떻습니까? 나약해서 잘 흔들립니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립니다. 태풍이라도 불라치면 갈대밭 전체가 풍지박산이 나버리고 맙니다. 견디는 힘이 없습니다. 외부적인 영향을 너무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어쩔때는 믿음 충만한 사람같다가도 어떤 때는 악마와 같이 변하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흔들리는 갈대입니까? 나약합니까? 사 26:3에 보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지가 견고한 사람,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도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아야지 흔들리는 갈대를 보시면 안됩니다. 

세례요한을 보려고 광야갔다면 세례요한을 보고 와야 합니다. 
세례요한을 보러갔다가 갈대나 보고왔다면 핵심이 빗나간 것입니다. 

  2. 부드러운 옷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부귀영화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의 극치가 바로 부드러운 옷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부드럽다'에 사용된 헬라어 '말라코스'는 부드럽다는 뜻 외에 '사치스러운, 방탕한, 나약한'이란 의미도 들어 있다는 것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분명 풍자적인 의미에서 였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부드러운 옷입은 자는 왕궁에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부드러운 옷입은 자가 상징하고 있는 그런 것을 들이 입문에 입문하는 이유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자라고 성숙해지면 그런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보야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이 가리키고 있는 "그 분" 예수님도 부드러운 옷입은 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버리고 보좌에서 일어나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분'입니다.  

  3. 선지자냐?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에 직접 자신이 답을 하셨습니다. "옳다. 선지자보다 더 큰 자니라"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광야로 나갔던 이유는 흔들리는 갈대도 아니었고, 부귀영화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를 나온 우리들에게 무엇을 보고가야 하는 가를 분명하게 명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 와서 보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흔들리는 갈대나 보고 가시렵니까? 부드러운 옷입은 사람들이나 보고 가시렵니까?
선지자입니까? 그보다 더 큰 이를 보고 가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서 보혈의 피를 쏟아주신 분, 부활하셔야 오늘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면서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을 보고 가셔야 합니다. 

세례요한을 보려 광야에 가서는 세례요한이 입고 있는 짐승의 털옷이나 보고 허리에 띤 가죽띠나 보고 그가 먹고 있는 석청이나 메뚜기나 보고 강가에 흔들리는 갈대나 보고 부드러운 옷입은 자들이나 구경하고 마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허무한 것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가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처럼 겉 치장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우리가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사람처럼 몹쓸 인생 살고 있다면 정말 안될 일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돌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고정시켜야 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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