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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욕구와 기대를 내려놓고 (히 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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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와 기대를 내려놓고 (히 5:1~10)


• 두 형제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익숙한 이들은 이것을 마뜩찮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위협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위험을 모르지 않지만 ‘대제사장’ 직분이 갖는 상징성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제1성서(구약성서)에서 대제사장은 사람들의 죄과를 없애기 위해 백성들을 대신해 제사를 바치는 존재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런 대제사장직을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한 가지 독특한 점이 있다면 대제사장들은 짐승이나 곡식을 제물로 바치는 데 비해, 예수님은 자신을 제물로 삼아 제사를 바친다는 사실입니다.

제사 제도는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기에 성서가 그 이미지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제사는 신들의 진노를 풀거나, 환심을 사기 위한 인간들의 몸짓이거나, 살아가는 동안 내면에 쌓이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기억들을 배설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고, 그 죄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저지른 것에 죄책감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자책감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잊혀지는 일도 있지만, 시간이 가도 좀처럼 스러지지 않는 기억도 있습니다. 그 기억은 가끔씩 떠올라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런 부정적인 기억들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병이 됩니다. 제사는 우리 삶의 기억들을 의례를 통해 정화하는 장치입니다. 물론 제1성서에서의 제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총에 감사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제사장의 존재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출애굽의 영웅은 누가 뭐래도 모세이지만, 공동체를 하나의 끈으로 묶은 사람은 대제사장 아론이었습니다. 아론은 모세의 빛 뒤에 가리워 있지만, 어쩌면 그를 빼놓고는 출애굽을 말할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아론은 모세의 소명 이야기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그 동안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모세가 어눌함을 핑계로 소명으로부터 달아나려 하자 하나님은 ‘말 잘하는 네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하시며 그를 독려합니다. 아론은 때맞춘 듯 광야로 나와 모세의 조력자가 됩니다. 나중에 아론은 대세사장이 되어 출애굽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합니다만, 그도 역시 흠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금송아지 사건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는 ‘우리를 이끌 신을 만들어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를 끝내 물리치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참으로 부적절한 처신이었고, 처벌받아 마땅한 잘못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대제사장으로 세우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성품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세가 불이라면 아론은 물입니다. 모세는 화를 내고 책망하기도 하면서 백성들과 싸우고 심지어는 하나님께도 거침없이 대듭니다. 하지만 아론은 다투거나 꾸짖기보다는 물처럼 사람들을 받아들입니다. 모세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감정에 종속되어 있다면 

아론은 좀 더 안정적입니다. 모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고, 아론에게 중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모세가 진리의 수호자라면 아론은 공동체의 수호자입니다. 그래서인가요? 모세는 늘 하나님과 가까이 서있는 반면, 아론은 백성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모세는 늘 음성을 높여 명령하고 지시하지만, 아론은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을 위로합니다. 모세는 출애굽 공동체의 교감신경이라면, 아론은 부교감신경입니다. 그는 깨진 관계를 복원하고, 조화를 회복시키는 데 헌신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창조적 균형을 유지하면서 출애굽 공동체를 지탱해낸 두 기둥이었습니다.

• 대제사장의 역할

히브리서 기자는 대제사장의 권위를 선택에서 찾습니다. “각 대제사장은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서 하나님과 관계되는 일에 임명받습니다.”(1) 그들은 뽑힌 사람들입니다. 성과 속을 가르고, 금기가 많은 원시 종교에서는 거룩한 일에 헌신할 사람들을 뽑는 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권위는 그들이 뽑힌 존재라는 데서 확보됩니다. 그들은 의례를 거쳐 제사장으로 임명받고, 복잡한 제사법에 따라 제사를 집전합니다. 그들이 입는 의복, 의례에 사용되는 기구들도 다 구별된 것들입니다. 출애굽기에는 제사에 사용되는 기름이나 향을 만드는 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아무나 그것을 만들거나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 명령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이것은 너희가 대대로 성별하는 데만 써야 하는 기름이다. 너희는 이것을 아무의 몸에나 부어서는 안 되며, 또 그것을 만드는 방법으로 그와 똑같은 것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 이것은 거룩한 것이니, 너희가 거룩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렇게 섞어 그와 똑같은 것을 만들거나, 그것을 다른 아무에게나 발라 주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백성에게서 끊어질 것이다.”(출30:31-33)

이런 제사법을 지키지 않을 때는 비극적인 일도 일어납니다. 아론의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는 주님께서 명하신 것과는 다른 금지된 불을 가지고 향을 피우다가, 그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레10:1-2). 금지된 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더 깊은 탐색이 필요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종교적인 것은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거룩한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다가 나는 아론의 고통에 마음이 쏠렸습니다. 성경은 이 참극 앞에서 아론이 ‘아무 말도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거룩한 직분을 수행하다가 죽임 당한 아들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아버지, 더군다나 아론과 그의 다른 아들들은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어 애도를 해서도 안 된다는 엄중한 명령을 듣습니다. 그는 지극한 고통조차 안으로만 삭혀야 했습니다. 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개인적인 고통조차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이고, 그로써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사장들은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예물과 속죄의 희생 제사를 드리고, 주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그들에게 복을 빌어주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사장의 존재 이유였습니다. 그들이 그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흠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도 연약한 사람이고, 아픔을 아는 사람이고,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이기에 그들의 연약함에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정죄하고 처벌하는 사람이 아니라, 백성들을 부축하여 일으키고 그들을 회복시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 순종을 배우심

히브리서의 기자가 예수님을 가리켜 대제사장이라 한 것은 이런 뜻에서 일 것입니다. 저는 히브리서를 읽을 때마다 이 대목에 감탄하고 감격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히4:15)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5:7-8)

주님도 세상에서 많이 우셨습니다. 인간의 고통을 안고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날갯죽지를 잘린 새들처럼 타락한 종교에 짓눌린 채 하늘을 잃어버린 땅의 사람들 때문에 우셨고, 경제적 가난과 정신적 가난 그리고 각박한 세태에 짓눌려 일그러진 존재로 위축된 사람들 때문에 우셨고, 평화의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셨습니다. 주님은 그들 속에 하늘의 빛을 끌어들이셨습니다. 인간 존중을 끌어들이셨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를 일깨우기 위해, 인간이 죽음보다 큰 존재임을 가르치기 위해 기꺼이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70년대 대학 시절 비교적 냉소적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던 내게도 부를 때마다 가슴 시린 감동을 주던 노래가 있습니다. 

1. 이 세상 어딘가엔 남이야 알든말든 
착한 일 하는 사람 있는 걸 생각하라
마음이 밝아진다. 

2. 이 세상 어딘가엔 청빈을 감수하고 
덕행에 힘쓰는 이 있는 걸 생각하라 
마음이 맑아진다. 

3. 이 세상 어딘가엔 탐욕과 분심 눌러 
얼굴이 빛나는 이 있는 걸 생각하라 
마음이 씻기운다. 

4. 이 세상 어딘가엔 하늘을 예경하고 
이웃을 돕는 사람 있는 걸 생각하라 
기뻐서 눈물난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예수님이고, 성도들이고, 바로 우리들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았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하나님께 이르는 길임을 주님은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길은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

을 바친 주님을 하나님은 대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임명받은 영원한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길을 찾으시던 주님은 스스로 구원의 길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이 구원은 아무에게나 싸구려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를 우리 인생의 길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남이 뭐라 하든 그 길은 내게 있어서 유일한 길(the way)입니다. 그 길은 내가 만든 길이 아니라, 주님께서 몸을 바쳐 열어놓으신 길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 길을 걸으면 됩니다. 길은 가라고 있는 것이지, 바라보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의 뜻에 자신을 봉헌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모든 생명이 이지러짐 없이 자기 몫의 생을 다 누릴 수 있는 세상, 모든 사람이 비인간적인 수모나 굴욕을 강요받지 않으며 살 수 있는 세상을 이루는 일에 주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얼마 전에 자살한 고 장자연 씨가 남기고 간 문건이 한바탕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그 문건에 언급되고 있는 인물들이 누구냐에 쏠려 있습니다. 일종의 관음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높은 지위와 권력의 자리에 있는 이들이 보이는 비인간적인 행태입니다. 그들은 성공과 출세를 미끼로 한 인간을 마음껏 유린하는 ‘포식자’들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사회적 약자들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귀에는 약자들의 신음소리나 아우성은 싹 쓸어버려야 할 소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들 가운데에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야고보서는 진정한 경건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약1:27)

사순절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그간 얼마나 가벼워지셨습니까? 삶의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본질적인 가치를 굳게 붙드는 일이야말로 이 기간이 우리에게 내준 숙제입니다. 저는 의도적으로 사순절 순례 여정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것은 순례자의 심정으로 살아보자는 의미입니다. 순례자들은 자기의 욕구를 내려놓는 일을 배워야 합니다. 스페인의 순례길인 산티아고를 걸은 어느 순례자는 자기의 변화에 대해 스스로 놀라더군요. 처음에는 단체 침실이 아닌 개인 공간을 원했습니다. 조금 지나자 이층침대에 베개라도 있으면 그만이었고, 나중에는 매트리스나 베개 상태에 마음을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기 욕구를 내려놓으면서 그에게 찾아온 것은 자유와 기쁨이었습니다. 그는 순례길이 가르쳐준 삶의 지혜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내 욕구와 기대를 버리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하루하루가 훨씬 좋았음을 더욱 실감하게 된 것이다…무엇이든 귀한 것일수록 움켜쥐지 말고 그것을 든 손을 감사함으로 펴라. 그럴 때 삶은 훨씬 순탄해진다.”(조이스 럽, <<느긋하게 걸어라>>, 복 있는 사람, 78쪽)

나의 욕구와 기대는 가급적이면 내려놓고, 이웃의 짐을 함께 지기 위해 몸을 낮출 때 우리는 비로소 십자가가 왜 구원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남은 순례의 여정 동안 우리 모두 이 진실에 눈을 뜰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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