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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신의 건축재료 (고전 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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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건축재료 (고전 3:10~15)


하나님 은혜 중, 지난 주간 일본오사카신학대학 강의 잘 다녀왔습니다. 기도해 주신 성도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일본의 선교역사는 우리나라보다 조금 앞섭니다(1859년도 미북장로교회가 선교; 천주교회는 1549년도에 가고시마에 Fransis Xavier). 그러나 일본은 아직도 기독교 복음화율이 국민의 1%도 되지 않습니다. 

일본은 자전거도 중요한 교통수단입니다. 어디를 가나 가득한 자전거를 보면서 40여 년 전, 불현듯 고향에서 쓰던 자전거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집에 여러 대의 자전거가 있었는데, 그 중 두 대가 일본제자전거였습니다. 일본제 자전거는 오래 타도 녹도 쓸지 않고, 부딪혀도 페달이 휘거나 부러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에 비해서 국산자전거는 녹도 잘 쓸고, 넘어지기라도 하면 페달이 쉽게 휘거나 부러져버리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40년이 지난 오늘, 저는 그 많은 일본의 자전거들을 보면서 더 이상 일본자전거 욕심낼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오래 전에 일본의 한 대학교수가 대한민국이 일본을 능가하는 길은 두 가지밖에 없다고 한 말이 기억납니다. (1) 분단된 남북이 통일국가를 이룰 때이고, (2) 한국교회가 지금보다 더 교회다워질 때라고 했습니다. 

남북통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는 우리나라가 일본과 어깨를 견주는 국가가 된 데에는, 한국교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복잡한 혼합주의적인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섬기는 신이 800만 개나 된다고 합니다(별별 것이 다 神입니다. 개도 神이고, 죽은 아이도 神이 됩니다). 일본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신사神社에 데리고 가고, 결혼할 때면 교회 목사에게 주례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장례는 절에서 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예수 믿으면서도, 장례는 절에서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혼합주의적인 신앙은 문제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이 초기 유럽 선교 당시, 세 주간 복음을 전하여 세운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칭찬을 기억하시지요?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담 말씀 중요)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사순절을 지키면서 우리는 예수님 공생애 말씀의 줄거리를 꿰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 중,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말씀은 우리가 다 ‘집을 짓는 건축자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산상수훈 마태복음 7, 24-27을 보면, 두 건축자의 비유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건축자와 같은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또)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하셨습니다. 

이 비유말씀의 핵심은, 집을 지을 때 그 基礎를 어디에다 두느냐에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기초를 어디에다 두느냐 하는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런데 집을 지을 때 기초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 10-15절 말씀에 주목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집을 지을 때, 터가 중요하듯이 ‘터 이외’에 중요한 또 다른 한 가지를 말씀합니다. 그것은, 건축 자재의 문제입니다.

[먼저, 터가 중요합니다. 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0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수석건축자(master builder)'라는 말입니다. 요즘 말로하면, 건축할 때 총 공사를 맡은 건설회사가 있고, 그 총 책임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회사로부터 하청 받아서 일하는 시공회사도 있습니다. 그런 모든 공사의 총책임자가 있습니다.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수석건축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교회에 대하여 수석건축자라고 소개합니다. 그가 온 신경을 쓰면서 이루어 놓은 일은, 토목공사입니다. 터파기와 기초공사를 했다는 말입니다.

무슨 건축을 하든지 터파기 공사와 기초공사가 시간도 많이 걸리고, 어렵고, 또 중요합니다. 터 닦기 공사를 하다보면 암반 때문에 힘들 때도 있습니다. 물이 쏟아져 나오기도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마치 터 닦기 공사를 한 사람과 같다고 소개합니다. 그가 닦아 놓은 터가 무엇입니까?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11). 그러면서 자신이 닦아둔 이 터 外에 能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번에 일본에 가서 합동측 선교사님 한 분을 뵈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이 일본에 처음 가신 때가 1995년 1월 16일이었다고 합니다. 혹 1995년 1월 17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고베지진’이 난 날입니다(神戶 ‘항구도시’; 귀신의 문[문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도시). 

강의가 없는 목요일 오후에 시간을 내어서, 오사카에서 자동차로 4, 50분 거리에 있는 고베시를 다녀왔습니다. 14년 전, 고베지진을 기념하면서 세운 防災未來館이 있는데, 그 건물 한쪽 벽에 큰 글씨로 1995년도 1월 17일 새벽 5시 46분을 가리키는 큰 시계가 형상화되어 있었습니다(우리는 1995년 1월 17일을 잊지 않는다는 글귀도 보았습니다). 새벽 5시 46분이면, 시민들이 막 잠에서 깨어날 때입니다. 깜깜했던 도시에 불이 하나 둘씩 밝혀지는 그 때, 진도 7의 강진이 27초간 고배시를 강타한 것입니다(백여 차례 더 되는 여진). 만일 진도 7의 강진이 27초만이 아니라 1분 정도 계속되었더라도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단 27초간의 짧은 강진에도, 온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어버렸습니다. 지진 당시, CCTV에 남아 있던 동영상들을 모아서 만든 영화를 보았는데, 정말 끔찍하고 무서웠습니다.

선교사님이 고베지진이 나기 하루 전날, 오사카에 단기선교 차 처음 일본에 가셨다고 합니다. 일본 땅에 첫 발을 디딘 바로 그 다음 날 새벽(1995년 1월 17일 오전 5시 46분)에 이웃도시였던 오사카에도 강도 6의 지진이 뒤흔들었다고 합니다(강도 1의 차이는 숫자 1의 차이가 아니라고 합니다). 너무 너무 두려웠다고 합니다(백 여 차례가 넘는 여진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런 두려운 경험이 있던 일본 땅에, 결혼하던 2001년도에 곧바로 일본선교사로 파송 받고 지금까지 사역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필이면 왜, 그 무서운 지진경험이 있는 일본 땅에 선교사로 갔을까?(생각) 이유가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과 같이 영적인 터가 혼탁한 그 땅(우상이 800만개가 넘는 범신론이 팽배한 그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터’를 닦으라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 때문 아니겠습니까? 우리 인생이 다 그렇습니다. 내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의 터가 견고하게 닦여 있지 아니하면, 내 인생의 집이 아무리 화려하고 훌륭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종국에는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리스도인들 보면, 인생의 터가 되는 하나님 말씀에는 큰 관심 없습니다. 읽지도 않습니다. 배우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습관적인 종교생활정도로 만족합니다. 지난주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평화신문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영세를 받은 천주교인들 중에도 사주, 궁합, 토정비결 등의 무속에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경험이 있는 사람이 51%가 넘는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까? 이 세상 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복음말씀 위에 그 기초와 터를 든든하게 두고 계십니까? 하나님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겸손하게 끊임없이 말씀 공부하는 기회를 가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말씀을 듣고 지키는 복 있는 자가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무리 중 한 여인이 음성을 높여서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했습니다(놀라운 말씀을 가르치고, 능력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마리아를 칭송한 것이지요). 그 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 11, 27-28).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터요, 반석입니다. 

[터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건축 재료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집을 지을 때, 터가 참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터가 중요하지만,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각각 어떻게 예수님의 터 위에 세울까를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 예수님의 터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지만, 사용하는 건축자재가 내가 짓는 집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12-13절 말씀 보십시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집의 가치를 평가)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 12-13).

여기 보면, 여섯 가지 건축자재가 나옵니다.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입니다. 이것들은 사도 바울 당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건축 재료들입니다. 요즘 같으면, 유리재품, 철강재품, 석고보드, 더 다양한 건축 재료들을 언급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파트 입주할 때 보면 잘 지어진 집이지만 인테리어 공사 다시하고 들어갑니다. 더 좋은 건축자재로 집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건축자재를 무엇으로 쓰느냐에 따라 집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신앙생활에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다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다고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질은 千差萬別입니다. 같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것은 만고의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집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 받을 수 없나니, 天下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 12). 아멘.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고 해서 그 구원의 질이 다 같다고 생각하면 誤算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급이 있는 구원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겨우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다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을 짓는 건축자들이지만, 사용하는 건축자재가 각각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건축 재료에 따라 집의 가치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좌우편에 달렸던 두 강도 중, 한 편 강도를 기억합니다. 그는, 평생 강도짓만 하며 산 사람입니다. 살인범입니다. 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죽어가는 마당에 ‘구원의 하나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때, 예수님께서 즉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 42-43). 그는 즉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구원이, 우리의 구원의 모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분은 그러십니다. 예수를 믿기는 믿되, 즐길 것 마음껏 다 즐기고, 하고 싶은 것 다 해보고, 누릴 것 다 누려보고, 죽기 直前에 예수 믿고 천국가면, 그것이 똑똑한 인생 아니냐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단히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어리석은 삶의 방식입니다. 저는, 임종을 앞둔 분들 중에 ‘목사님, 부끄러워서 못 죽겠다’고 하시는 분들, ‘좀 잘 살아보고 싶은데···’(기회가 없다, 몸이 아프다)는 분 많이 봤습니다. 

우리가 다 예수님의 터 위에 집을 짓는 건축자이지만, 불에 쉽게 타버리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짓는다면 부끄러운 구원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15). 여기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값비싸고 좋은 건축자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에 타는 건축 재료냐, 불에 타지 않는 건축 재료냐를 말하는 것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주님의 날 심판의 날에, 불로 우리의 공적을 심판하셔서, 그 공적을 가릴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김석균 씨의 노래,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복음송 아시지요? 1절 가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겸손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믿음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충성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주님이 기억하시면 足하리/ 예수님 사랑으로 가득 찬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부러운 찬송입니다. 우리가 다 노래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터 위에 어떻게 집을 지을까 하는 지혜는, 오늘에서 오지 않습니다. 오늘을 사는 지혜는, 오늘에 있지 않고 내일에 있습니다(지진 7이상을 대비하여 건축). 죽음과 종말과 심판을 생각할 때 지혜가 주어집니다. 주님의 그 날을 기억하고, 금이나 은이나 보석 같은 건축자재로 건축하는 지혜로운 건축자가 다 되셔야겠습니다. 

또 지혜자 솔로몬은 “너는 청년의 때,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했습니다.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인생이 끝날 때면, 모든 것이 다 어두워집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라” 했습니다. 내가 무슨 건축자재로 믿음의 집을 짓고 있는가? 유해물질이 많은 건축자재는 아닌지? 친환경 건축자재인지? 내가 쓰는 자재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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