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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영원한 만찬 (마 26: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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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에서 영원한 만찬으로 (마 26:17~29)
  

2000년에 개봉된 <그린 마일 The Green Mile>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폴>은 1930년대 중반에 교도소 직원이었습니다. 거기서 그가 맡은 일은 사형수들을 전기의자가 놓여있는 사형장까지 안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장까지 가려면 <그린 마일>이라고 불리는 초록색의 복도를 지나가야 합니다. 그 끝에 사형장이 있습니다. <그린 마일>은 사형수가 이 세상에서 걸어가는 마지막 길입니다. 사형수는 평생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겠습니까? 길고 긴 인생의 여행이 그린 마일을 걸음으로써 끝이 납니다.

우리도 인생이란 길을 걷는 나그네로 살고 있습니다. 그 길이 때로는 지루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언젠가는 우리도 인생의 마지막 길, <우리의 그린 마일>을 걷게 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도 마지막 길이 있었습니다. 본래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많은 여행을 하셨습니다. 이 긴 여정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여행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골고다로 올라가는 길, 그 고난의 길, <비아 돌로로사>가 예수님의 그린 마일이었습니다.

길만 마지막 길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식탁도 마지막 식탁, 최후의 만찬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열왕기상 17장을 보십시오. 거기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는 한 여인, <사르밧>의 과부가 등장합니다. 어느 날 그녀의 집에 엘리야 선지자가 찾아갔습니다. 엘리야는 그녀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그녀는 힘없이 대답합니다. 

열왕기상 17장 12절을 보면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고 말합니다.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으리라>, 그 음식은 그녀와 아들의 최후의 만찬인 것입니다. 그녀의 집에는 가루와 기름이 한끼 분량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려는 참에 엘리야가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최후의 만찬이 주는 분위기는 어떤 것입니까? 말할 수 없는 비참함입니다. 이제 끝이니까요. 다음이 없습니다. 완전한 절망입니다. 살다가 이런 상황을 만나지 않게 되길 원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런 비참한 상황에 내몰릴 때가 많습니다. <이제 다 끝장났어. 더 이상 해 볼 도리가 없어> 이런 상황에 처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끝장인 것처럼 보입니다. 가정을 유지하는 것이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꿈도 희망도 모두 날아가 버리고 최후를 맞은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많은 사람이 삶을 포기합니다. 아무 의욕을 느끼지 못합니다. 여러분 그럴 때 우리의 살길은 어디 있을까요? 끝은 정말 끝일까요? 최후의 만찬은 정말 최후의 만찬이 되고 마는 것입니까? 그것은 극복되지 않는 최후일까요?  

사르밧의 과부 이야기를 좀 더 해 봅시다. 그녀는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그녀는 바알을 섬기는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시돈 사람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7장 9절에 보면 <시돈에 속한 사르밧>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돈은 바알 숭배에 깊이 빠진 곳이었습니다. 

여러분,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내가 누구입니까? 이세벨이지요? 그 이세벨 시대에 북 왕국 이스라엘은 바알을 얼마나 많이 섬겼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이세벨이 북 왕국에 시집을 오면서부터였습니다. 그녀는 시돈의 공주였습니다. 시집올 때 바알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합은 그녀의 치마폭에 싸여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온 나라 안에 바알신전을 세웠습니다. 그녀의 친정 나라인 시돈은 바알 숭배로 꽉 찬 나라였습니다. 시돈은 이세벨의 친정나라요, 바알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르밧의 과부도 태어나면서부터 바알 숭배를 배웠을 것입니다. 바알 밖에 모르는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북 왕국 이스라엘이 바알 숭배에 빠지자,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무서운 흉년의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강과 샘 근원이 모두 말랐습니다. 먹을 게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에게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갈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은 이상한 명령이었습니다. 가난한 과부에게 찾아가라고 하신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이스라엘 안에도 가난한 과부가 많은데, 하필이면 사르밧의 과부에게 가라고 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바로 여기에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여주려는 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엘리야가 그녀의 집에 도착했을 때, 여인은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녀의 집에는 한 끼분의 식사 밖에 남은 게 없었습니다. 이제 모든 게 바닥이었습니다. 이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시돈 사람들이 그렇게 섬기던 바알도 그들을 먹일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알을 섬기던 여인이 최후의 만찬을 먹고 죽을 판인데도 바알은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알은 신이 아니었습니다. 바알은 사람들이 깎아 만든 송아지 모양의 우상에 불과했습니다. 단지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 다음 이야기가 어떻습니까? 엘리야는 과부에게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여인이 자신과 아들이 먹을 마지막 식사 외에는 없다고 합니다. 그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엘리야는 정말 막무가내로 무조건 자신에게 먼저 떡을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양심도 체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이 무례한 엘리야의 말을 들은 이 여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라고 하면서 당장 내쫓아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인은 엘리야를 내쫓기는커녕 떡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대목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여인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는 엘리야를 보는 순간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며, 바알 숭배자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인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열왕기상 17장 12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라고 한 것입니다. <당신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바알을 섬기던 자신의 집에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여호와 하나님과 접촉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바알만 섬겼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바알은 농사의 신이다. 풍요의 신이다. 바알은 우리에게 풍족함을 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루통에 가루가 바닥이 나도 바알은 아무 것도 해 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난 지금까지 풍요의 신 바알을 섬겼다. 그러나 그 바알이 내게 준 것이 무엇인가? 난 지금 아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고 죽을 상황에 있다. 그렇다면 저 사람이 내게 온 것은 새로운 기회이다. 지금 저 사람이 섬기는 여호와께서 내게 손을 내밀고 계시다. 난 기꺼이 여호와의 사람인 저 사람에게 떡을 만들어 주리라. 어차피 죽을 것인데 무엇이 두려우랴? 마지막으로 여호와께 나와 아들을 맡기리라>

이건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지금까지 여인은 자기 먼저 먹었습니다. 자기 배부터 부르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인이 떡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먼저 가져왔습니다. 자신도, 아들도 제쳐놓고 엘리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에게 먼저 가져왔습니다. 이 행동은 그녀의 위대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시여, 이제부터 당신을 바라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바알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죽는 한이 있어도 여호와 하나님 당신의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저 사람 엘리야의 하나님이여, 나에게도 하나님이 되어 주옵소서>라는 회심의 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후 여인의 집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녀의 집에 가루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흉년이 다 지나가도록 여인과 아들은 충분히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부의 집을 축복하셔서 엘리야와 함께 흉년이 끝나도록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흉년 중에도 먹이시는 분이었습니다. 바알이 먹이지 못하던 여인을 하나님께서 먹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르밧 여인의 만찬이 날마다 계속되게 하셨습니다. 그 날 여인이 준비하던 식사는 더 이상 최후의 만찬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바알과는 차원이 다른 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여인의 이야기를 통하여 당신의 위대하심을 온 세상에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절망스러운 최후의 만찬을 최후가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 결코 최후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다 끝났어>라고 말하며 절망할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이제 시작이다>라고 하십니다. 부탁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다시 시작하십시오. 최후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안에는 최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오십시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고 입히실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맡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오는 데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바알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 많은 바알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자기신뢰주의, 물질만능주의, 향락과 쾌락주의 등, 하나님 이외에 의지하는 모든 것이 바알입니다. 먼저 바알을 버리십시오. 아무리 숭배해도 우리를 먹이지 못할 바알들을 다 버려야 합니다. 

왜 바알을 버려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를 가장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2장 8절을 보면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영광을 우상에게 내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이외의 어떤 존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우상숭배를 가장 미워하십니다. 십계명 제일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우상 숭배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상 숭배는 헛수고일 뿐입니다. 이사야 42장 17절을 보세요. <조각한 우상을 의지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고 했습니다. 우상 숭배자는 수치는 당하게 됩니다.

반면에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에게는 복이 임할 것입니다. 이사야서 57장 13절을 보면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들에게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 바람에 날려 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온갖 종류의 바알들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시길 기원합니다.

<최후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새로운 시작이 되게 하시는 놀라운 은총>, 이것이야말로 복음이며,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오늘 본문이 마태복음의 본문이 바로 이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식사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락방에서 있었던 예수님과 제자들의 그 식사를 흔히 <최후의 만찬>이라고 부릅니다. 

제자들은 그 식사가 최후의 만찬인 것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분위기가 여느 때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식사에서 성만찬 예식을 제정하셨습니다. 떡을 떼어 주시면서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포도주를 나눠주시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예식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할 것을 명하셨고, 우리는 부활 주일에 성만찬 예식을 거행할 예정입니다.

자, 그렇다면 <주님과 제자들의 이 식사는 정말 최후의 만찬입니까? 주님은 다시는 제자들과 식탁에 앉지 않으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식사는 최후의 만찬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만찬은 결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잠시 그 만찬을 쉬셨을 뿐입니다. 주님은 얼마 동안만 쉬었다가 그 후에는 다시 시작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란 포도주를 말합니다. 넓게는 음식물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영원히 먹지 않는 게 아니라, 단지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만 마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만찬은 한시적으로만 쉬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에서는 다시 만찬이 시작될 것임을 말씀했습니다. 그것도 이 세상의 음식이 아니라, 하늘의 것으로, 새것으로 함께 마실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여기서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만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식사를 최후의 만찬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잠시 식탁을 얼마 동안 쉴 뿐입니다. 그 후에는 영원한 하늘 나라의 만찬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떻게 최후의 만찬을 영원한 만찬으로 바꾸십니까? 그게 바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은혜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죄인입니다. 죄는 죽음이란 형벌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그 죄로 인해 죽음 앞에 섰습니다. 영원한 지옥의 멸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린 마일을 걸어 사형장으로 들어서는 죄수와 같았습니다. 그게 우리의 최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으셨습니다. 우리 죄가 없어지자, 우리는 그린 마일을 걸어 지옥 불에 떨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최후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최후라고 생각하는 죽음마저도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은 최후의 만찬을 하늘나라의 영원한 만찬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께는 결코 끝이 없으며, 끝인 것처럼 보이나 반드시 다시 시작되어 영원히 이어질 것>임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는 끝이 없습니다. 주님께는 최후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끝이라고, 최후라고 할 그 때가 새로운 시작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최후를 극복할 힘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 언젠가 세월이 흘러서 마지막 시간이 올 것입니다. 늙으면 언젠가 우리도 마지막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또 언젠가는 마지막 식사를 해야 할 때가 다가옵니다. 그 때 슬퍼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최후의 만찬이라고 생각하는 그 식사를 영원한 만찬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것도 이 땅의 음식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난 새 음식으로 주님과 영원한 만찬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끝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새롭고 영원한 것이 있을 뿐입니다. 힘을 내십시오. 일어서십시오. 바알을 버리고 주님만 붙잡으십시오. <최후의 만찬에서 영원한 만찬으로!>, <끝이라 생각하는 그 곳에서 새로 시작하는 은총!>, <끝이라 좌절하며 주저앉는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서 나아가는 희망의 전진!>, 이런 은총이 주님 안에서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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