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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값비싼 헌신 (요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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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비싼 헌신 (요 12:1~8)

   
오늘 읽은 본문의 이야기는 유월절 축제가 열리기 엿새 전에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열린 예수님을 위한 잔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께서 유월절의 안식일이 시작하기 직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이 일은 예수님이 세상을 뜨시기 전 마지막 주간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베다니 동네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베다니는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친구 나사로와 그 누이들이 살고 있는 동네입니다.   나사로는 갑작스런 병으로 죽어 무덤에 장사 지내졌다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베다니를 찾아온 예수님의 의해 다시 살아나 온 동네와 이웃 마을까지 그 놀라운 소문이 전해졌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던 도중에 베다니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들떠 있었고 그 동네의 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청하여 잔치를 열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그 시몬이 나환자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마 시몬은 전에 나환자였다가 예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은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이렇게 베다니 동네는 예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인 듯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 감사하는 마음으로 잔치를 열고 있는 중입니다.   그 시간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집 안에 앉아 있고 언니 마르다는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동생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을 풀어 그의 발을 씻었습니다. 

이와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마태나 마가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저 한 여인이 이 일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이 일을 하였다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마리아가 그 비싼 향유를 한 순간에 예수께 부어버리는 것을 보고 가룟 유다가 분하여 마리아를 책망한 것으로 기록하는 반면에 다른 복음서에서는 여인을 책망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 누가복음은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베다니 사건을 기록하지 않지만 예수님의 초기 사역 기간 중에 이와 비슷한 일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것으로 기록합니다(눅7장).   공교롭게도 둘 다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두 사건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누가복음의 시몬은 바리새인으로서 그 지역의 지도층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베다니의 시몬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에 나병에 걸렸다 회복한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소외를 당하는 부류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볼 때에 누가복음의 일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있었던 일이고 베다니의 일은 죽으시기 직전에 일어난 일이므로 누가가 이 일을 혼동하여 기록할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청을 받아 가셨을 때 그 동네에 살고 있는 한 죄 많은 여인이 예수께 찾아와 울며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담은 옥합을 열어 그의 발에 부은 일이 있습니다.   이 일이 베다니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과는 서로 다르지만 그날 예수께 찾아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독특한 행동으로 최상의 예우를 해드린 점에서는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마리아와 또 다른 여인의 헌신적인 섬김을 통해 유대인 사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들로부터 못 마땅하다는 투의 불평을 들으셔야 했습니다.  그만큼 이런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고 또 유대 사회에서 여인이 사람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남자의 발을 씻기거나 몸에 향유를 붓는 것은 결코 정숙한 여인의 행동일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여인들의 행동을 중단시키거나 책망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여인들을 꾸짖는 사람들을 나무라시고 여인들이 행한 일을 높이 칭찬하셨습니다.  

교회의 절기 가운데 이제 부활주일을 두 주 앞두고 있으며 다음 주일은 예수께서 잡히시기 엿새 전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어린 나귀를 타고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행진하셨던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그 주간은 주님의 고난 받으심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을 묵상하는 계절을 지나고 있는 오늘 아침에 유월절 엿새 전에 일어난 한 여인의 용기 있고 값진 헌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까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베다니 동네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어떤 마음의 동기에서 이런 특이한 행동을 하였을까요?    나사로와 예수님이 어떤 친분 관계인가를 알고 있는 분들은 마리아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나사로와 예수님은 평소에도 친구처럼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으며 사랑하는 오라버니를 다시 살리신 특이한 관계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 그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에 마침 자기 동네에서 예수님을 위한 큰 잔치가 열렸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현했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잔칫집의 귀한 손님이나 주인공의 머리에 값진 향유를 부어주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최고의 예우였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노래하기를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 하였습니다.    나를 위한 잔치가 열리고 나를 초대한 주인이 나의 머리에 기름을 발랐다는 말은 나를 최고로 높여주었다는 기쁨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곧 그 잔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원수들 앞에서 다윗을 가장 존귀한 자로 높여주셨으니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격스런 일인가 하는 고백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회에서 향기로운 기름을 몸에 부어주는 행동은 그 사람에 대한 최고의 대접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날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런 행동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날 마리아가 예수께 부은 향유는 지극히 비싼 나드 한 근이었습니다.    나드 향유는 북인도에서 수입이 되는 값진 것으로 당시 로마의 귀족들이 사용하던 고급품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가정이 얼마나 부유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들리실 때마다 나사로의 남매들을 자주 찾아주셨고 친구로 지내면서 가끔 예수님의 일행을 대접한 것을 보면 그런대로 경제적 여유는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마리아의 행동을 보고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던 것은 그 가격이 자그마치 300 데나리온이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이 남자 어른의 하루 품삯이라고 했으니 일년 동안 일한 품삯을 모았다가 한 순간에 털어버렸다는 셈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최소한 2천만 원 혹은 4천만 원 정도까지의 가치가 있는 향유였습니다.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자리에서 순식간에 예수님께 부어버렸으니 유다의 말대로 허비했다고 탄식할만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300 데나리온의 향유는 기꺼이 깨뜨려 드릴만한 가치가 있는 분에게 드리는 최고의 보답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향유는 결혼을 앞둔 처녀가 결혼 지참금으로 준비해 둔 가장 소중한 재산목록 1호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께 드려진다면 그 어떤 일보다 더 값진 행동이라 여겼기에 서슴없이 옥합을 깨뜨려 드렸고 심지어 여인의 자존심이요 영광과도 같은 긴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렸습니다.   예수께 대한 최고의 감사표시를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본 다른 제자들도 이게 무슨 일인가 놀랐겠지만 유독 가룟 유다가 나서서 마리아의 행동을 무참히 꾸짖었습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것이지 어찌 이렇게 허비하느냐?’는 비난입니다.    그러나 그의 본심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돈에 대한 아쉬움이었습니다.   차라리 그 향유를 자기에게 맡기면 돈으로 바꾸어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이 어리석은 여자가 일을 그르쳤다는 속상함에서 나온 불평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동료 제자였던 요한은 이런 유다의 심보를 가리켜 도적이라고 하였습니다.   돈궤를 맡은 사람으로 공금을 관리하면서 그 동안 남모르게 횡령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유다는 300 데나리온이라는 거금이 순식간에 날아가는 것을 보고 속이 뒤틀려 그렇게 불평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후 몰래 유대인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찾아가 자신의 스승 예수를 넘겨주는 대가로 은 30냥을 챙긴 것을 보면 유다는 도적이었다는 요한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의 전 재산과도 같은 향유를 부었고 목숨과도 같은 머리털을 풀어 예수께 헌신을 하고 있는 반면에 그래도 3년씩이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라고 하는 유다는 돈 생각이 앞서 지극한 선을 행하는 사람을 못마땅히 여기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리아를 망신 주려 했던 속 좁은 남정네에 불과하였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이 너무 뜻밖이었지만 지금 감격스런 장면이 한참 진행 중인데 갑작스레 끼어들어 마리아를 난처하게 하고 잔치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드는 유다의 행동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저를 가만히 두어라 나의 장례식을 위하여 향유를 사용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지만 나는 너희와 함상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셨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이 부분에서 여러 사람들이 분하여 서로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들 보기에 마리아가 나서서 하는 짓이 해괴망측하고 꼴불견이었는데 예수께서 잠잠하시니 차마 말을 못하던 차에 유다가 마리아를 책망하자 속이 시원하였고 기다렸다는 듯이 너도나도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를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히느냐?  그가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라도 도울 수 있지만 나는 너희와 항상 있지 않을 것이다.   그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식을 미리 준비한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념할 것이다’ 하고 칭찬을 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선생님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  무슨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일까?   이상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제자들에게 상상도 못할 일이었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기는 태평스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걸 가리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라고 해야 할 지 영적으로 무딘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지는 몇 일 후에 밝혀질 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비록 예수님의 장례식 준비로 그 일을 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번에는 꼭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믿음을 고백하리라 준비된 마음으로 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 다음에 할 수도 있다는 생각보다는 이번이 아니면 다시 기회가 올 수 없을 것이라는 마음에서 온 힘을 다하여 주님께 드린 선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그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람에 감사하고 보답하려는 마리아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지금까지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대접 받고 존경 받는 일에 길들여진 제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초자연적인 기적을 자주 체험하고 겁날 것이 없었습니다.   각종 환자들이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 사람들이 회복되며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되살아나는 기적을 목격한 제자들은 이보다 더 좋은 인생 경험이 없었습니다.   비록 유대인의 지도자들에게는 자주 위협을 당하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주신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그 정도쯤은 일도 아닐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께 대한 일종의 믿음이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대하시는 믿음은 그 정도가 아니라 앞으로 닥쳐올 고난과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이제 육신으로는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고 떠나갈 시간이 다가오는데 우쭐대기 잘하고 덩치 큰 남자 제자들은 아직 어린아이들처럼 천방지축 나설 데 나서지 않을 데를 구분하지 못하고 덜렁대는 철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차라리 값진 향유를 몸에 부어 사랑과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마리아가 겉으로는 여려 보이지만 제자들의 행동과 믿음보다 훨씬 진지하고 성숙된 것이었기에 주님은 마리아를 지극히 높여 칭찬해 주셨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크고 작음은 말에 있지 않고 행함에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은 말로만 반복할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삶에서 드러나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다는 고백은 주께서 나의 주인이시고 나를 다스리시는 왕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주인과 왕이 되신 주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나의 믿음과 함께 나의 가장 소중한 그 무엇도 드려질 수 있다고 고백하며 사는지요?    큰 소리 치던 제자들은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도 직업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속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아직은 버려야 할 것들이 더 많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뭔가 더 얻을 것은 없을까, 버린 것보다 더 멋지고 화려한 것은 언제쯤 얻을 수 있을까 이런 마음이 더 많았습니다.

   마리아는 그가 소유한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으로 주님을 섬겼고 머리털을 풀어 발을 씻길 정도로 완전한 섬김의 자세를 보였다면,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 때문에 덕을 보려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더구나 가룟 유다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을 이용하여 제 뱃속을 채우던 도적이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죄 많은 여인은 예수님께 찾아와 말도 없이 하염없이 울고 그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며 자기 머리털로 발을 씻었고 그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런 여인을 보고 그 잔칫집 주인 바리새인 시몬은 기분이 상하여 왜 이 여인의 행동을 중단시키지 않느냐고 예수께 불평하였습니다.   가룟 유다 또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반응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시몬에게 물으시기를 ‘오백 데나리온 빚을 진 사람과 오십 데나리온 빚을 진 사람 둘이 있는데 둘 다 갚을 능력이 없어 주인이 두 사람을 다 탕감하여 주었다면 누가 더 주인을 사랑하겠느냐?’ 하였습니다.  시몬이 말하기를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 하자 ‘네 판단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여인을 보라 너는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다.   너는 나에게 손님을 맞이하며 입맞춤도 하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조차 붓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향유를 내 발에 부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한다.   이 여인의 많은 죄가 용서받았다.   이 여인의 사랑이 많기 때문이다.   용서함을 받은 일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하셨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까?   바리새인 시몬은 지금 유명세를 타고 있는 예수 선생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대접 한 번 했다고 생색내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교만하고 거드름 피우는 사람인 것은 예수님을 초청한 주인이 손님보다 더 높임을 받으려는 의도에서 예수님 대접을 최소한의 기본으로만 하였던 것을 보면 금방 알게 됩니다.  그는 손님을 청해놓고 자기 자랑만 늘어놓으며 손님을 얕보는 투로 대하였던 졸장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손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귀빈 대접하였다면 마땅히 발 씻을 물도 내어드리고 머리에 기름도 발라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이 유대 사회의 품위 있는 집안의 전통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 시몬은 그런 절차를 깨끗이 생략하고 다만 예수를 불러다가 자기 자랑만 늘어놓으려는 심보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와 교제하며 자기 신분도 드러내고 고상한 학자나 유명한 인물과 친구한다는 평판이나 노리는 사람에 속합니다.  

   많이 사함을 받은 사람이 더 많이 예수를 사랑합니다.    스스로 의롭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며 어리고 연약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정죄하는 사람들은 예수께 감사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저 자기 의로움으로 만족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의사는 환자들에게나 필요하지 건강한 사람에게는 필요가 없다’ 하셨고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하기 위함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영혼의 의사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나는 용서받을 만한 죄를 지은 것도 없고 혹시 가벼운 실수는 하고 살지만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망한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직 주님이 그리 급하게 필요한 의사는 아닙니다.   적어도 나는 하나님 앞에 머리 들 수 없는 불쌍한 죄인임을 깨달을 줄 아는 사람에게 예수께서 가장 좋은 의사가 되어주십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유, 그 목적이 무엇인가요?    물론 영혼 구원이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기 위한 헌신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그런 순전한 마음으로 주를 따르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죽어 지옥 가는 것이 두려워서도 아니고, 세상에 사는 동안 사고와 질병이 없이 편안하게 살기 위하여 절대자를 의지하는 목적도 아닙니다.   어떤 신앙의 대상을 정하고 진리를 따르며 착하게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세상 사는 동안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일부분일 수는 있지만 주 목적이 아닙니다.   

   정말 목표는 무엇인가요?    나 같은 사람을 위하여 세상에 오셔서 날 위하여 죄 짐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를 영원한 죽음의 자리에서 건져주심을 감사하며 살기 위함입니다.   지옥불에 떨어질까 무서워서 피하려고 어쩔 수 없이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나라를 준비하고 나를 기다리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 원하는 그 기쁨과 즐거움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여 그 사랑을 받아 감사함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더 가까이, 예수를 더 가까이 하고 그분을 위하여 살고자 함이 우리 믿음의 참 목표입니다.

    자기 희생이 없는 사랑 고백이 가능할까요?   어려움으로부터 건져준 은인에게 어떤 방식으로 보답을 합니까?    더구나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 어떤 방식으로 감사를 고백하고 있습니까?   입술로만 당신은 나의 왕 나의 구주이십니다 하지만 실상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더 좋은 것은 없을까 기대하는 마음은 아닙니까?    은혜로 얻은 영원한 생명보다 더 좋은 것이 또 어디 있을까요?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시간, 물질, 달란트, 건강, 가족… 어떤 방식으로든 나에게 가장 소중한 이런 것들을 주님께 기꺼이 드림으로 나를 고치신 주님, 나를 용서하신 그분께 보여드리는 헌신이 있습니까?   주일 아침 한 번 예배 드리러 오는 것조차 세상 일 때문에 미루고 첫째가 아닌 뒷전으로 두면서 그래도 나는 마음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그 말에 과연 진실성이 있을까요?   무엇으로 나의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지요?

   금년 부활주일과 고난주간을 준비하면서 우리 교회는 다음 주일 이후 한 주간을 금식기간으로 정하고 함께 기도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자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참여할 것인가 막연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금년에 우리 교회는 이웃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주님의 고난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동참하고자 합니다.  고난 당하는 이웃의 현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나누고자 하는 뜻에서 북한을 탈출하여 나온 ‘새터민’들의 고난에 대하여 생각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합니다.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을 비롯하여 한국과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포들이 있습니다.   물론 영국에 나와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주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리라 믿습니다.   

   그들이 겪는 고통이 그들의 운명, 자업자득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가 아닐까요?   너무나 힘 없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고난 속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입니다.   한 주간 금식을 하되 목적 없이 굶는 것이 아니고 다이어트 목적도 아니고 금식으로 우리 육신에 고통을 주면서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앞에 겸비해지는 시간을 갖고자 함입니다.   하루 한끼 혹은 일주일에 한끼도 좋고 그 이상 금식도 좋습니다.  자원하여 금식에 동참하면서 고난 중에 있는 동포들을 기억하고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금식하며 사용하지 않은 식대를 모아 부활주일 감사헌금으로 드려 그것으로 고난 중에 있는 동포들 혹은 그들을 위하여 일하는 분들을 후원하는 일에 사용되면 참 의미 있는 부활감사헌금이 되리라 믿습니다.  한 주간 기도하며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한 주간 감사한 마음으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비록 작은 일이지만 날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하나의 길이라면 기쁨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겁니다.   값진 헌신이 되길 바랍니다.    자기 희생이 없는 헌신이란 없습니다.   주의 위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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