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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양식 (마 6: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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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양식 (마 6:11~12) 


봄철 다니엘 세이레 새벽기도회가 은혜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세이레 특별새벽기도회를 ‘산소호흡기’라고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합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제일 쉬운 것이 호흡입니다. 
누워서 떡 먹기보다 더 쉽습니다. 
자신이 호흡하고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아주 자연스럽고 규칙적이고 지속적입니다. 
그러나 천식이나 임종 직전의 사람에겐 제일 어려운 것이 호흡입니다. 
그래서 ‘숨을 몰아쉰다.’고 표현합니다. 
온 힘을 다해 들이마시고, 온 힘을 다해 내뱉습니다. 

따라서 기도생활은 영적 건강을 체크할 수 있는 척도가 됩니다. 
기도가 자연스럽고 규칙적이고 지속적이면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고, 기도가 힘들고 불규칙적이고 지속적이지 않으면 영적인 건강에 빨간 불이 켜진 삶입니다. 
호흡이 가물가물 잦아들어가는 사람을 살리려면 급히 산소 호흡기를 들이대야 합니다. 
세이레 새벽기도회는 여러분을 살리는 영적인 산소호흡기입니다. 
살아나기 위해서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참석해주시길 바랍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기도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사건이 나옵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산 아래의 이스라엘백성들은 모세가 나타나지 않자 하나님 대신에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금송아지 앞에서 춤을 추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을 진멸하고자 뜻을 정하셨습니다. 
그때 모세가 그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들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시려고 인도하여 내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하나님께서 그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14절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기도의 힘이 이렇게 놀랍다는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처럼 바보스러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주기도문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기도는 주님이 가르쳐준 인간 자신을 위한 세 가지 기도 중에 첫 번째 것입니다. 
인간 자신을 위한 세 가지 기도는 ‘1)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2)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3)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우리 자신을 위한 첫 번째 기도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위한 첫 번째 기도치고 좀 시시하지 않습니까?(질문) 
예를 들어, 바울사도의 기도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뭐 이 정도로 고상하고 차원 있게 나가야지........ 

기껏 기도한다는 내용이 ‘밥 달라.’는 것이라면 좀 유치한 것이 아닌가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주관하시고 운행하시는 분이지만, 또한 그 분은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이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서 빵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실제로 사람이란 일용할 양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영적인 문제-죄의 문제, 시험에 드는 문제를 해결하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특히 저가 사역했던 아프리카 주에는 3천만 명이 일용할 양식이 없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북한도 올해 식량이 모자란다고 하잖아요? 
우리나라가 보릿고개 넘을 걱정을 하지 않고, 끼니 때울 걱정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 줄 모릅니다. 
“어디 가면 하루 세 끼 밥 못 먹겠느냐?”라고 말하지만 밥 세 끼 먹는 것 그리 쉽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우리가 끼니 걱정하지 않고 산다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끼니 때우는 것이 쉽지 않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기도내용을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처음부터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하신 내용이 서로 모순을 일으키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분이냐 하면, 마태복음6장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이 말씀에서 주님은 분명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인 마6:11에서는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 이 모순되는 듯한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질문) 
해결의 열쇠는 ‘염려’라는 단어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염려’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기도’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지요. 
염려는 공동번역에서는 ‘걱정’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염려는 ‘마음을 나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괜스레 걱정하고, 막연히 불안해하고, 마음이 혼란스러워져서 평안을 잃고, 기쁨이 사라지고, 얼굴에 수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기도한다는 것은 내 걱정,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염려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제 이 기도가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오늘날’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에서 ‘오늘날’이란 ‘내일’에 반대되는 말입니다. 
‘내일’의 빵을 위해서 미리 조급해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오늘’의 빵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의 모든 걱정, 근심, 불안, 염려는 무엇 때문에 옵니까? 
‘내일’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까? 
내일 내가 어떻게 될지, 내일 나의 건강은 어떨지, 내일 내 자식들은 잘 살아갈 수 있을지, 내일 내 직장은 흔들림이 없을지, 내일 내가 빵을 먹을 수 있을지....... 
다 내일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6장 34절 “그러므로.......내일 일은 내일 염려 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이 말씀은 하루에 있는 것을 몽땅 다 쓰는 하루살이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일을 계획하지 말고 무계획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일을 잊어버리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계획, 인간의 염려, 인간의 준비보다 더 확실한 보장이 되시는 하나님께 내일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저축을 하고, 보험을 들면 어느 정도 내일을 보장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요즘 보니까 은행도 부도가 날 수 있고, 보험회사도 부도가 날 수 있고, 연금도 고갈 될 수 있더라고요. 

혼란스럽습니다. 
한 순간에 반 토막이 나는 주식도, 펀드도 궁극적인 대책이 안 됩니다! 
어디에다 여러분의 내일을 맡기겠어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내일을 확실히 보장하십니다! 
시편 37편 25~26절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미래를 보장하실 것입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우리에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Give us our daily bread).’ 
주님은 내 양식, 내 가족의 양식만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살면 되고, 남이야 굶든 말든 나만 배부르면 된다는 이기적인 사고가 팽배한 사회에서 이 가르침은 어떤 면에서 충격적이고 도전적인 내용입니다. 
루이 16세의 부인 아시지요?  
이 여인은 왕비이면서도 백성의 굶주림에 대하여 단 한 번도 걱정을 해보지 않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불란서혁명이 일어나 내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지도 모르고, 백성이 빵을 달라고 외치니까, 이 바보 같은 여자가 이렇게 얘기했답니다.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될 것이 아니냐!” 
남의 굶주림을 외면하고 빵을 독차지하는 것은 죄입니다. 
부자이면 부자일수록 굶주린 이웃을 돌아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시인 김지하는 이렇게 읊었습니다. 
“하늘이 모두의 하늘이듯이 밥은 모두의 밥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고 ‘우리의 양식’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지난 수요예배 때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칭송받았던 성산 장기려 박사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그를 통하여 변화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하여 도전을 받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변화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한마디로 ‘그가 성자가 아니면 세상에 성자는 없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존경받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의사가 된 날부터 지금까지 치료비가 없는 환자에 대한 책임감을 떨쳐본 적이 없다. 이 결심을 끝까지 잊지 않고 살면 나의 생애는 성공이요, 이 생각을 잊고 살면 실패이다.”라는 고백처럼 인술을 펼쳤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환자의 치료비를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내주기도 했으며, 입원비를 낼 여력이 없는 환자를 몰래 도망치게 해준 일도 있었습니다. 
평양의 ‘김일성대학병원’ 외과과장으로 재직할 때에도 주일에는 근무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오직 ‘생명사랑’에 충실했습니다. 
돈이나 명예에 연연하지 않았고, 정치적인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김일성을 수술하고 나서 그 공로를 치하하자 “저는 특별히 신경 쓴 게 없습니다. 저는 그저 제 환자에게 최선을 다한 것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김일성이가 그 말을 듣고 섭섭해서 “만약 지금 여기 누워있는 사람이 내가 아닌 이승만이라 해도 그렇게 말할 거냐?”고 묻자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나’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에 관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3. “일용할 양식”(daily bread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교부 닛사의 그레고리는 일용할 양식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이 기도는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사치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 그가 기도하는 것은 생명에 필요한 단순한 빵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아뢴다. 우리에게 빵을 달라고. 맛있게 차려놓은 진수성찬이 아니라 휘황찬란한 자주색 예복이 아니라 빛을 더 해주는 장식품과 은쟁반이 아니라........” 
여러분, 일용할 양식의 의미를 아시겠지요? 
일용할 양식이란 생명에 필요한 단순한 빵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치를 위한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저의 기도제목을 아시지요? 지금까지 1500cc를 타고 다녔는데 2000cc 넘는 거 타고 싶어요. 아시지요?” 

이런 기도내용에는 하나님께서 그저 웃으실 뿐입니다. 
빌립보서4장 19절에 봐도,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신다.’고 하셨지, 더 호화로운 것 더 사치스러운 것을 갖도록 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어제(2009년 3월28일) ‘국민일보’ 미션기획란에 탤런트 김혜자씨의 봉사활동에 대한 내용이 나왔습니다. 
김혜자씨는 독실한 크리스쳔입니다. 
탤런트 김혜자씨는 1991년부터 ‘월드비전’이란 선교단체의 봉사활동에 참여해왔습니다. 
그러니까 거의 20년이 돼가지요. 
그녀는 처음 아프리카에 갔을 때에는 거의 울고만 다녔답니다. 
영양실조로 죽음의 문턱에서 자꾸 눈을 위로 홉뜨던 아이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 번째쯤 됐을까, 어느 순간  ‘우는 건 누구는 못하나, 우는 게 능사가 아니라 애들을 위하여 뭔가 해줄 생각을 하자.' 그랬다는 거지요. 
올해는 수단 남부의 톤즈 지역을 방문하여 망고 묘목나무를 심는 활동을 했답니다. 
하루 한 끼 옥수수 죽으로 연명하는 이들에게 망고는 훌륭한 먹거리입니다. 
그것도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든 건기에 망고는 일 년에 두 차례 열매를 맺습니다. 

그뿐입니까? 
나무그늘 밑에 등걸 몇 개를 놓고 학교로 쓰는 이 땅에서 망고 나무의 그늘은 아이들의 배움터요, 어른들의 쉼터가 되기에 넉넉합니다. 
그래서 망고나무 100그루를 심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은 김혜자씨에게 묻는 답니다. 
“왜 봉사활동을 하느냐? 혹시 인기관리 차원에서 하는 것은 아니냐?” 
그녀는 대답합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열심히 봉사를 하느냐고 묻는데, 난 봉사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그냥 애들이 보고 싶어서, 걔들을 보면 서울에서 내가 고민하던 것이 하찮게 느껴지면서 마음이 정화되고, 아주 작은 것에도 아이들이 즐거워하고 행복해 하는 걸 보면서 나까지 즐거워지고 행복해지니까 가는 거예요.” 
7,8만 원짜리 나이키 신발을 사줘도 시큰둥하는 젊은이들만 보다가 슬리퍼만 받아도 좋아서 팔짝팔짝 뛰는 아이들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느끼는 점이 있지 않겠어요? 
행복이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겠어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많은 소유가 큰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과도한 욕심은 불행의 씨앗일 뿐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더 진정한 것이 되기 위하여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제 그 뜻을 조금이라도 아시겠지요? 
‘오늘날’- 우리가 기도하는 빵은 ‘오늘을’ 위한 빵이지 내일 그리고 먼 훗날을 미리 걱정하면서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우리가 기도하는 빵은 ‘우리’ 모두를 위한 빵이지 결코 나만 배부르기 위한 빵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 우리가 기도하는 빵은 ‘생명을 위한 단순한 빵’이지 더 호화롭고 더 사치스럽고 더 멋진 것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잠자리에 들어가 보지 않은 사람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하여 수도꼭지를 빨아보지 않은 사람이,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직업을 잃어 내일 또 다시 해가 뜬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이 기도의 의미를 알겠어요? 
우리 주변에 경기침체를 겪으면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이웃들이 적지 않기에 이 기도의 소중함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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