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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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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 6:9~13)


우리 교회당 입구에는 큰 돌이 하나 서 있고, 거기에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성구가 쓰여 있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틀림없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별명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곧 ‘기도하는 사람’ 이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일생 동안 기도하면서 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생 동안 수없이 많은 기도를 하면서 살 사람들이라면, 올바른 기도의 정신을 배워서 바른 기도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기 전에, 잘못된 두 종류의 기도를 지적하셨습니다. 한 가지는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일정한 기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장소도 중요시하여 회당이나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기도하는 사람, 경건한 사람임을 과시하였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연극하는 배우와 같은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기도의 기술에 있어서는 노련하였으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그들은 어떻게 기도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기술이 아니고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반복 기도를 금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 자신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세 번씩이나 동일한 기도를 반복하셨고, 사도 바울도 그 자신이 사단의 사자로 말한 질병을 고쳐주시라고 세 번 간절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중언부언하는 기도란, 반복해서 하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이 실려 있지 아니하는 믿음 없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실로 무의미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중언부언 하며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는 자들의 잘못된 기도를 지적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올바른 기도의 정신과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물론 기도를 꼭 이렇게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의 한 모범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성도들의 기도의 영원한 모범이요 표준입니다. 더구나 주기도는 앞으로도 우리가 수 백 번 혹은 수 천 번 하게 될 터인데, 그 의미를 분명히 알고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주기도문에 대한 예찬들이 있습니다. 터툴리안은 “이 기도는 복음 전체의 개요이고, 주님 설화의 모두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 법칙의 모든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고, 루터는 “주기도는 기도들 중 기도이며, 모든 기도의 알파벳이다.”고 했습니다.  딘 스텐리는 “주기도는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그리고 가장 유일한 보편적 기도이다.”고 했고, 웰링톤은 “주기도에는 종교와 도덕의 총체가 들어 있다.”고 했으며, 쉘리는 “이 주기도는 기독교의 극치다.”고 했습니다. 

물론 ‘주기도’란 말 자체는 신약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 기도를 하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히 4:15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이란 주님께서 하신 기도가 아니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라고 해야 옳은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말씀은 이러한 정신, 이러한 의미, 이러한 자세로 기도하라는 모범적 기도인 것입니다. 

신자가 교회에 가서 맨 먼저 배우게 되는 성경 구절은 요 3:16 곧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은 어머니 무릎에서 배운 친숙한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기도는 우리와 너무 친숙하다는 데에 위험이 따릅니다. 1)너무 자주 사용함으로 위험합니다. 주기도를 무슨 회의나 순서를 마치는 형식으로 사용을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2)주기도를 간절한 기도로 드리지 않고, 무슨 주문을 외우듯 말로만, 입술로만 외워 대는 위험입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너무도 잘 외우는 주기도입니다만, 그러나 이 주기도에는 우리가 아직 올라가 보지 못한 높이와, 측정해 보지 못한 깊이가 있는 것입니다. ‘마커스 다드’는 말하기를 “주기도문을 사용할 때, 비록 우리가 어머니 무릎에서 배운 것이지만, 그 말의 뜻을 충분히 알려면 한 평생이 걸리고, 그 기도가 다 응답이 되려면 영원까지 걸림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는 짧은 시간에 빨리 암기할 수 있는 기도이지만, 짤막한 이 기도에는 정말 우리가 측정하지 못할 깊이가 있는 것입니다. 

먼저 주기도문의 배경을 살펴보면, 눅 11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라고 요청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하고 요청함에 대해서 죤스 박사는 말하기를 이는 ‘필요한 것의 고백’ 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은 왜 기도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두견새는 어째서 밤에만 우는가? 독수리는 왜 끝없는 창공을 치솟아 오르는가? 그 이유는 “두견새는 밤에만 울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며, 독수리는 날개가 높이 날 수 있게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높이 날아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기도하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하고 요청한 것은, 인간의 본능적 필요에 의해서 부르짖게 된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의 다른 선생들도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우리 예수님께서만이 사람들을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실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랍비들의 가르침에는 어조, 태도, 어귀, 의복, 시간, 장소에 대해 상세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기도에서 18 가지의 형식을 매일 반복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기도의 한 부분에서 이러한 자세로 하고, 다른 부분에서는 또 다른 자세로 기도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벌써 그러한 기도를 많이 했지만, 그러한 기도만으로는 전혀 만족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더 핑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피조물이 얼마나 무지하고 죄 많은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님께 열납 되며,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을 수 있을지는,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자기의 뜻을 우리에게 기쁨으로 제시하실 때에야 알 수 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는데 1)죄인의 우두머리에게도 하나님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열어 주심으로써, 2)기도를 하나님 자신과 그 백성간의 교통과 축복의 주요 수단으로 세우심으로써 3)그 백성 중 기도하는 자가 따라야 할 완벽한 본보기를 은혜로이 주심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의 현명한 교훈에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기도에 있어서 우리를 지도하기에 유익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형식, 즉 이른바 주기도문은 특별한 지도 규칙이다.”라고도 말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의 기도학교에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가르치지 않으셨다. 오직 기도하는 법만을 가르쳐 주셨다. 설교를 잘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 관해서는 별로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기도를 잘 하는 것에 관해서는 많은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과 대화를 할 줄 아는 것은, 사람과 대화할 줄 아는 것 이상의 것이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기도는 초기에 있어 가장 연약한 어린이조차도 할 수 있을 만큼 쉽지만, 동시에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신성한 일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으나 가장 거룩하신 자와의 교제이다. 영원한 세계의 권세도 그것에 의해 좌우된다. 그것은 바로 참 종교의 정수요, 모든 축복의 통로요, 능력과 생의 비결이다. 우리들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과 교회와 세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의 능력을 차지할 권한을 기도에 부여하셨다. 기도를 통해 약속은 성취되며, 하늘나라가 임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이 고귀한 일을 하기에 우리는 얼마나 부적절한가? 하늘의 능력을 가지고 많은 역사를 일으키며, 그것에 대해 하늘 문이 참으로 활짝 열려 있는 진정한 기도, 그런 기도를 가르치실 분을 누가 찾아 부르짖지 않겠는가? 예수님께서는 한 학교를 여시고 기도의 능력을 갖기를 특별히 원하는 그의 구속받은 자들을 그곳에서 훈련시키신다.”고 하면서, 우리가 그 주님의 기도학교에 입학해야 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라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기도학교에 입학하여 주기도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은 모든 기도들의 모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양식의 모범이다 

1)간결성-주기도는 간결하기는 하지만, 형식적으로 중언부언하는 수만 마디 말보다 훨씬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기도 길게 하기로 이름난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장로님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들먹이면서 끝도 없이 기도를 이어 갔습니다. 그렇게 1시간 가까이 기도를 끝내고 눈을 떠보니, 목사님만 남고 교인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깜짝 놀란 장로님이  “목사님, 어찌된 일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아 예! 노아 홍수 때 다 떠내려갔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기도의 가치 척도는 기도를 얼마나 오래 하느냐는 길이에 있지 않고, 기도의 진실성과 간결성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설교의 길이와 설교의 힘과의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의 생명력은 그 길이에 있지 않고, 진실하고 간절한데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단순성-주기도문은 단순한 문장이지만, 얼마나 깊은 뜻을 포함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단순한 말속에 포함된 진리가 무한하듯이, 주기도문은 단순하지만, 참으로 심오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2. 순서의 모범이다. 

우리는 그저 늘 무엇을 달라는 기도부터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개인의 요구에 대해 한 마디도 말씀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먼저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개인적 요구보다 먼저 두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모든 학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S. L. 로버츠(라부열 선교사)는 말하기를 “이 기도에 따라 기도하기를 배운 사람들에게는, 응답되지 않은 기도가 없다. 응답 받지 못한 기도에 대하여 불평하는 사람은, 기도의 참 순서를 망각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자기 부르짖음에 귀를 막고 있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의 욕망을 더 생각한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3. 정신의 모범이다. 

기도의 생명력은 말에 있지 아니하고, 기도를 드리는 그 정신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의 기도는 표현이 아름다우며, 신학적으로 바르며, 단순하며, 직접적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기도가 행해지고 있는 그 방의 천정보다 더 높이 올라가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신뢰의 정신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언제든지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하나님께서 기꺼이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려 한다는 믿음, 곧 하나님의 사랑을 어린아이가 부모를 신뢰하는 것 같은 믿음으로 신뢰하면서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렇듯 주기도는 그 양식에 있어서 모든 기도의 모범이 되고, 순서에 있어서 모범이 되며, 그 정신에 있어서 모든 기도의 모범이 되는, 완전한 기도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주기도문의 배열을 보면, 마치 십계명과 유사한 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에는 두 돌 판이 있어,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계명들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에 관한 계명들입니다. 이처럼 주기도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십계명에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주 잘 가르쳐 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말하듯 기도해야 할 것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예배자가 예배의 대상자이신 하나님께, 나라이 임하옵시며-시민이 왕에게, 뜻이 이루어지이다-종이 주인에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걸인이 은혜를 베푸는 자에게,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죄인이 구주에 대하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순례자가 안내자에게,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포로가 구조자에게 기도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챨스 험멜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입술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 없는 그리스도인은 능력 없는 그리스도인이다.”고 하였습니다. 딸만 여섯 낳았다가 그 다음 아들을 얻은 월남 피난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금지옥엽으로 키우던 그 아들이 세 살 나던 해 그만 소아마비에 걸려 기어 다녀야 했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아이의 어머니는, 동네에서 마치 짐승 취급을 받던 아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하나님께 기도했고, 7개월 만에 기적적으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30년 후인 1993년 4월 20일 이 아이는 장애인들을 돌본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영예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임마누엘 교회 김경식 목사라는 분입니다. 

나폴레옹이 전쟁에 나가려고 하는데 부하가 “각하, 목사님을 모셔다가 기도를 하고 나가시지요!” 하고 말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대답했습니다. “그런 건 필요 없어. 전쟁은 내가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야. 전쟁과 하나님은 아무 상관이 없어.” 그러나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수많은 부하들이 죽었고, 나라도 망하고,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영국의 해군 제독 넬슨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라는 성경 말씀을 외우며 믿었고, 전투에 나가기 전에 군목과 함께 갑판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전쟁을 이기게 하셨고, 그 결과로 영국이 살고, 자기도 살고, 부하들도 살았습니다. 같은 장군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장군과, 자기를 의지하는 장군의 종말은 하늘과 땅처럼 달랐습니다. 

어떤 성도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사는 길이 얼마나 어둡든지/매일의 구름이 얼마나 두껍든지 문제가 아니라네./우리가 기도하며 문제를 헤쳐 나갈 때/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일속에서 인도하신다네. 그렇습니다. 사는 길이 얼마나 어둡든지, 매일의 구름이 얼마나 두껍든지 문제가 아닌 것은,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기도의 응답을 받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우리는 올바로 기도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루과이의 한 작은 교회의 벽에 이러한 글귀가 적혀있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 마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나 혼자만 생각하고 살아가면서/‘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아들딸로 살지 않으면서/‘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라고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고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하지 마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을 양식을 쌓아두려 하면서/‘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하지 마라. 누구에겐가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에 찔린 데가 없습니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그리스도의 기도학교에 입학하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에 담겨진 깊은 뜻을 잘 깨달아서, 주기도의 정신, 주기도의 자세로 기도하여, 여러분들의 기도 생활에 놀라운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기도를 가르쳐주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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