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님을 감동시켜라 (마 15:21~28)

  • 잡초 잡초
  • 426
  • 0

첨부 1


주님을 감동시켜라 (마 15:21~28)

1. 감동적인 이야기

얼마 전, 미국 전역을 눈물바다로 만든 “한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딕 호잇’과 아들 ‘릭 호잇’의 이야기입니다. 아들은 목에 탯줄이 감겨 뇌에 산소 공급이 중단된 채로 태어나 뇌성마비와 경련성 전신마비라는 장애로 움직일 수도 없는 장애아로 태어났습니다. 의사는 부모에게 아이를 포기하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수년의 시간이 흘러 아들은 컴퓨터를 이용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게 되었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아버지에게 “달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달리기 위해 직장을 그만 두고 아들과 함께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달리기는 아버지가 아들이 탄 휄체어를 밀면서 달린 것이었지요. 

아들이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부자는 처음으로 8km 달리기 대회에 나갔습니다. 그들은 2등을 했습니다. 꼴찌에서요! 경기가 끝난 후, 아들은 아버지에게 “오늘 처음으로 내 몸의 장애가 사라진 것 같았어요”라고 말했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981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도전했습니다. 물론 첫 출전에서 10km만 뛰고 포기했지만, 그 다음 해에는 완주를 했습니다. 그렇게 마라톤을 시작한지 4년이 지나자 아들은 “철인3종경기에 나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미친 짓”이라며 이들 부자를 말렸지만, 아버지는 허리에 아들이 탄 고무배를 묶고 3.9km의 바다를 수영하고, 아들을 태운 자전거로 180.2km를 달린 후, 다시 아들이 탄 휠체어를 밀고 49.195km를 달려 3종경기를 완주했습니다. 
아들은 이 경기로 “철인” 칭호를 부여받고 아버지와 함께 뜨거운 눈물을 나눴습니다. “혼자서 달리면 세계 최고 기록을 깰 것”이라는 주위의 말에 아버지는 “나는 아들 없이는 달리지 않는다”는 한마디 말로 일축했습니다. 그 후로도 이들 부자의 도전은 계속 되었습니다. 마라톤 64번 완주, 단축된 3종경기 206번, 보스턴 마라톤 대회 24회 연속 완주라는 정상인도 달성하기 어려운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또한 달리기와 자전거로 6천km에 이르는 미국대륙을 횡단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놀라운 기록을 세운 아들은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이 말은 들은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네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하지 않았다.” 부자는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길을 달려온 것입니다.

지난 2008년 6월, 중국 쓰촨 성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있었던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그해 6월 13일 오후, 베이촨 현(縣) 폐허 속에서 구조대는 두 팔을 땅에 짚고 무릎을 꿇은 웅크린 자세로 숨을 거둔 20대 여성을 발견했습니다. 구조대가 이 여성의 시신을 들어 올리자 그 밑에는 태어난 지 서너 달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기가 잠들어 있었습니다. 아기 엄마는 떨어지는 건물더미 속에서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땅에 버틴 채 건물의 잔해가 자신의 몸으로 떨어지는 데도 팔로 버티면서 아기를 지키다가 죽어간 것입니다. 구조대가 아기를 발견했을 때, 아기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고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 아기 옆에는 엄마의 휴대전화가 놓여있었는데요. 전화기의 액정 화면에는 “사랑하는 아가, 만일 네가 살아남게 된다면 엄마가 너를 사랑했다는 것을 꼭 기억하렴”이라는 문자가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소개해 드린 이 부정(父情)과 모정(母情) 이야기는 정말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도 이러한 감동적인 모정(母情)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2. 주님을 감동시킨 믿음

1) 오직 예수님만이 해결자라는 믿음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서 가버나움에서 북서쪽으로 약 20리쯤 떨어진 이방인의 땅, 즉 두로와 시돈으로 가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계속된 가르침과 표적에도 불구하고 마음 문을 열지 않고, 도리어 주님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음을 닫고 자신을 거부하는 그들을 잠시 떠나, 유대인들이 저주받은 백성이라고 여겼던 이방인의 촌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신 또 다른 이유는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렇게 가신 베니게의 항구 도시인 두로에서 공개적인 사역을 자제하신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저 어느 한 집에 들어가셨습니다(막7:24). 그러나 주님에 대한 소식은 이미 그곳에도 전파되어 있었고, 주님께서 그곳에 오셨다는 소식이 금방 그 지역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찾았고, 그 중에는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이 여인도 있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자신의 귀신들린 딸 때문이었습니다. 그 딸의 상태는 아주 심각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 이유는 여인이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귀신들려 그 귀신으로 인하여 불속으로도 뛰어들고 물로도 뛰어들어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었던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 아이(막9:14~28)와 비슷했거나, 아니면 벌거벗은 채로 온 마을이나 들이나 산으로 쏘다녀서 그렇게 커가는 딸을 보는 어미의 마음이 “흉악한 귀신들에 들렸다”고 표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가나안 여자”였습니다. 가나안 족속은 노아 때에 저주받은 함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여인은 저주받은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이 여인과는 접촉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이 여인이 “헬라인”으로서 “수로보니게(수리아에 있는 베니게)” 족속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막7:26). 즉 이 여인은 이스라엘 북부 시리아 지역에 있는 페니키아 민족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페니키아인인 여인을 “헬라인”이라고 했을까요? 헤로도토스, 아이스킬로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그리스의 역사가, 작가, 철학자들은 “그리스 인은 이집트와 페니키아 인으로부터 문자, 철학, 수학, 종교 등 고급문화를 전해 받았다”했으며, 나아가 “그리스 인들이 동방 지역 사람들과 혈연관계에 있었다”고 말한 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마 마가가 그녀를 “헬라인”이라고 한 것은 그녀가 바울처럼 가나안 지역의 수로보니게 족속이면서 헬라 교육을 받고 헬라 문화와 지식에 익숙한 상류층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통상적으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있지 않은 이방인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그녀는 가나안 지역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지역 사람들의 신인 아세라(아스다롯)을 섬겼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딸이 귀신에 들린 것을 고치기 위하여 아스다롯의 힘을 빌려 그 딸을 고쳐 보려고 무진 애를 썼을 것이고 최선의 노력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스다롯은 그녀의 딸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운 문제를 만났을 때 자기가 믿던 신이 더 이상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과 낙심 가운데 있던 그녀에게 ‘유대인 중에 모든 병을 고쳐주는 사람이 갈릴리에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그녀는 그 즉시로 딸을 데리고 갈릴리로 가서 그 분을 만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러던 중에 그 예수가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으로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곧” 예수님께서 계신 집으로 가서 그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신을 찾은 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23절에 보면,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말씀 한 마디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흉악한 귀신에 들려 죽어가는 딸을 위해 필사적으로 다가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절규하는 이 여인을 아예 무시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 혹시 무시당해 보셨습니까? 요즘 아이들은 핸드폰 문자나 메일을 보냈는데도 상대방이 답이 없으면 “왜 씹냐?”고 합니다. 무시하는 것이 굉장히 기분 나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무시당해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무시하고 그냥 가는 예수님을 뒤따르면서 계속해서 도와달라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따르면서 소리를 질렀든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23).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24). 왠 일인지 예수님은 그녀가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녀를 만나거나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거절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25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끈질긴 간청에 예수님의 세 번째 반응은 더더욱 놀랍습니다. 26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러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지금 이 여인을 “개”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냥 있는 사람도 개 어쩌고 하면 상당히 기분 나쁩니다. 게다가 이 여인은 죽어가는 딸을 위해 절규하듯이 간청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개” 어쩌고 하니 어찌 견딜 수 있었겠습니까? “뭐 개라고요? 이제 봤더니 당신은 정말 무정하신 분이군요!”라든지, “뭐 개,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나 참 치사하고 더러워서 원~” 하고는 떠났을 것입니다. 딸이 귀신들린 것 때문에 개 취급을 당하고 있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모습은 죽음보다도 더한 치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같은 치욕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다가갔고, 결국 딸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어떤 믿음을 가졌기에 귀신들린 딸을 고칠 수 있었을까요? 

인터넷 필명으로 “한난희”라는 분이 수로보니게 여인 이야기를 단편소설로 재구성했습니다. 

내게는 딸이 하나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얼마나 예쁘고 영특한지 온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아이였습니다. 우리는 헬라인이며 수리아 지방의 페니키아인으로 로마 치하의 여러 나라들 중에서도 으뜸가는 시민으로 특권을 누리던 족속입니다. 그 무엇도 부족하다 여기지 않고 우리 가족의 울을 행복으로 두른 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아이가 병이 들다니요. 잦은 발작과 혼절로 인해 사람들은 아이에게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수근 댔고, 아무리 용한 의사나 민간치료, 심지어 무당이나 점성술사 등을 동원하여 귀신을 쫓아내려고 별 방법을 동원해도 낫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밝고 단단하기만 하던 우리 가정의 행복한 울타리는 무너지는가 싶었습니다. 

남편과 나는 처음에는 서로 보듬고 위로하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지쳐 차츰 서로에게 짜증을 내는 일이 많아져 갔고 온 집안은 웃음을 잃고 어둠의 그림자 속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우리가 식민지라 업신여겨 보던 유대 지방에 예수라는 사람이 나병환자나 중풍병자, 열두 해 묵은 혈루병 환자 등 난치병자들을 고쳤을 뿐 아니라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냈으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했을 뿐 아니라 물 위를 걷고 바람까지 다스린다는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려온 것입니다. 그 분은 유대인들이 말하는 구원자 메시야라고 하네요. 아, 저의 가슴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기회다, 지금 아니면 내 딸이 나을 수가 없겠구나.’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제가 사는 동네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작정 예수가 들어가셨다는 집으로 뛰어 들어가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그 발을 붙잡고 울부짖었습니다. “예수시여, 내 딸을 살려주소서!” 

소문으로 예수님을 알고 있다가 직접 그를 만나자 그 예수님 앞에서 이 여인이 취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7장 25절에 보면,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 엎드리니”라고 합니다. “곧 와서”라는 표현과 “그 발아래 엎드리어 … 간구한다”는 표현은 귀신 들린 어린 딸의 상태의 심각함과 그 딸을 고치려는 어머니의 간절한 열망과 행동을 잘 묘사해 줍니다. 여인은 가능한 빨리 예수님께 달려왔고, 예수님을 만나자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간절하게 부탁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23).” 그리고 25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러한 그녀의 열망과 간절함이 귀신들린 어린 딸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도 자녀들에 대해서나 혹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간절한 열망과 열정이 되살아나시길 바랍니다. “오직 예수만”하는 간절하고도 단순한 믿음, ‘예수 아니면 안 된다’, ‘예수님이 고쳐주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이 변화시켜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믿음이 주님을 감동시키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믿음 

그러나 안타깝게도 겸손하고 간절한 이 여인의 간구에 대한 예수님의 일차적인 반응은 모욕적인 거절이었습니다. 26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러분, 이것이 허락입니까? 거절입니까? 거절이죠. 거절도 그냥 거절이 아니라 거의 모욕에 가까운 거절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27절에 보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여자가 예수님을 뭐라고 불렀습니까? “주여!” 여러분, 이 고백이 중요합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마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예수님에게 처음 나와서 “주여”라고 부른 사람은 이 여인 밖에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여인은 예수님 앞에 나오기 전에 “예수가 주님”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여인의 “주여”라는 이 표현은 단순하게 예수님을 그저 질병만 고치는 분 정도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메시아, 자기 삶의 주인, 자기 인생을 구원하실 ‘나의 구원자, 나의 주님’이라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27절 만이 아닙니다. 이미 22절에서 그녀는 예수님 앞에 오자마자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은 구약성경인데, 이방인인 이 여인이 구약성경과 그 가운데 있는 메시아 약속을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메시아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메시야도 된다는 것, 그런데 구약성경과 메시아 약속의 주체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작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거절하고 반대하는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바로 그 메시아라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의 믿음이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또한 25절에 보면,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고 했습니다. “절하다”라는 말은 ‘연속해서 머리를 조아리다’라는 뜻이고, “도우소서”라는 말은 ‘위험에 빠진 사람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말 때문에 시험에 들고, 말 때문에 낙심하고, 말 때문에 좌절하고, 말 때문에 분노하기를 얼마나 자주 합니까? 그러나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을 “개”라고 하는 말을 듣고도 그것 때문에 실망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기는커녕 더욱 더 주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무시하고 외면하고 개라고 하는 그 주님께요. 개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 되어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더욱 간절하게 다가가는 여인의 모습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한난희의 소설은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더욱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간청하기를 거듭했고 가만히 지켜보던 예수는 “자녀가 먼저 배불리 먹어야 하는데 어떻게 자녀가 먹을 떡을 개에게 주겠느냐”라며 차갑게 말했습니다. 순간 머리가 멍하면서 무언가에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나는 헬라인으로 지배자 계급에 속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잠시의 찰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고통에 매인 아이를 둔 어미로서의 막다른 상황에서 자존심이나 모멸감은 한낱 사치에 불과할 뿐이었으니까요. 저의 모든 특권의식, 지적 우월감, 풍요로운 재산 등, 내가 가진 것은 그 무엇도 내 아이를 고치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한 쓰레기 무용지물에 불과한 것임을 절감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로 말씀드렸습니다. 

“예, 맞습니다. 저는 개입니다. 그렇지만 개들도 주인의 밥상에서 나온 부스러기를 먹고 살지 않습니까? 당신은 구원을 해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임을 믿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여력이 남으시면 이방인인 저희도 구원해 주실 수 있잖아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엎드려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의 머리 위로 아까와는 달리 온화하고 부드러운 그분의 음성이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이런 믿음을 갖다니 참 기특하구나. 너의 아이가 귀신에게서 놓여났다.” 
이 말을 들은 저는 그분에게 감사를 제대로 표했는지 어땠는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말을 믿고 딸 아이가 고쳐졌는지 아닌지를 보려고 정신없이 집으로 뛰어갔습니다. 집에 가보니 아이는 발작을 멈추고 아주 평온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털썩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그 눈물은 절망의 눈물이 아니라 감격의 눈물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믿음이 주님을 감동케 합니까? 처음 기도에 응답이 없으면, 두 번, 세 번, 아니 그 이상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사람의 믿음에 응답합니다. 자존심을 포함하여 자신의 전부를 내려놓고 주님께 다가가는 그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기도로 주님을 감동케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을 감동시켜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는 주님을 감동시킨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버림을 받았을 때나, 노예일 때나,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나, 세계적인 제국의 2인자가 되었을 때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한결같이 하나님과 동행 했습니다. 다니엘은 어떻습니까? 10대 소년일 때 우상에게 바쳐졌던 기름진 음식과 잘 빚은 포도주를 거절하고 채식만 먹으면서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했으며,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도 늘 하든대로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기도했습니다. 

죽음보다 더 지독한 고통으로 여겨지던 문둥병을 앓고 있던 사람이 예수님에게 와서는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불치병을 고치실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확신하면서도 ‘고치고 말고 하는 것도 제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셔야 만 된다는 것을 압니다. 원하시면 고쳐주시고 설사 원치 않으셔서 고쳐주지 않아도 좋습니다.’라고 했는데요.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어떻게 주님께서 감동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로마의 한 백부장은 자신이 지배하는 민족 중 한 사람이자, 자기보다 한참 어린 예수님에게 와서는 로마인이라는 우월감, 지배자로서의 권위, 그리고 나이 많은 사람으로서의 자존심까지 다 버리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단지 하인이 아프다는 것 외에는 어떤 요구도 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만 따르려는 마음, 게다가 주님께서 자기 집으로 가신다는 말을 듣자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라고 하는데 어찌 감동받지 않으셨겠습니까?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도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함으로서 예수님을 놀라게 하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는 격찬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주님을 감동시킨 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여인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입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을 얼마나 감동시켰는지 ….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여러분 차례입니다. 지금까지는 주님으로부터 감동받기를 바라고 살아왔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제부터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여러분이 주님을 감동시키기 바랍니다. 

주님을 감동케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여러분, 28절을 다같이 읽읍시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주님께서 여인의 믿음에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크다고 칭찬해 주시면서 “네 소원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건강이나 물질이 아니라,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믿음입니다. “네 소원대로 되라!” 여러분의 믿음이 주님을 감동케만 한다면 여러분의 모든 소원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 입니까? 할렐루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28)!” 믿음과 복은 정비례합니다. 믿는 만큼 응답받고 믿는 만큼 복을 받습니다. 크게 믿으면 큰 복을 받습니다. 

작게 믿으면 작은 복을 받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수도 파이프와 같다.” 하나님의 수원지에는 복과 은혜의 생수가 무진장으로 저장되어 있는데, 성도가 ‘어떤 믿음의 파이프를 연결하느냐’에 따라서 어느 정도의 복과 은혜가 오는지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아주 가느다란 파이프를 하나님의 축복의 수원지에 연결했으면 그 파이프를 통해 겨우 졸졸 흘러내려오는 복만 받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기쁨도 감사도 만족도 찬송도 승리도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대형 수도관을 연결했기 때문에 놀라운 복과 은혜의 생수가 콸콸 쏟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믿음 가지고, 그것으로 주님을 감동케하여 “네 소원대로 되라”는 복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