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막 8:27~9:1)

  • 잡초 잡초
  • 268
  • 0

첨부 1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막 8:27~9:1)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간혹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그의 죽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같은 생각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으셨다면 부활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죽으심이 여느 사람들의 죽음과 같은 것이 아니라 대속의 죽음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 보다 위대하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라, 둘 다가 똑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있어서 부활이 있으므로 이 둘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사복음서를 읽어 보면, 고난에 관한 내용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해 줍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보니,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대신해서 죽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대속의 죽으심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첫째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구원 얻는 믿음이란, 이처럼 예수님께서 만민을 대속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삼 일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이 필요하고 소중한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인류의 구세주이신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시고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그 분을 인류의 구세주로 인정할 근거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장사되신 지 삼 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밝히 나타내셨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공생애가 거의 끝마쳐 갈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여행하셨습니다. 그것은 모여드는 사람들을 피해서 조용한 분위기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기 위함이었습니다. 길을 가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6장을 보면, 헤롯 안디바와 백성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말해 줍니다.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때 매우 놀라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고 했습니다. 어떤이는 예수님을 보고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이는 이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였지만, 헤롯은 말하기를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 또는 엘리야, 또는 선지자 중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고 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평판이 얼마나 좋았는가를 말해 줍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님께서 얼마나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으며, 귀신들린 자들을 온전케 만들어 주셨습니까? 그뿐입니까? 때로 허기진 무리에게 떡을 나누어 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사실이지, 엘리야가 행한 이적보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이 더 크고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백성들의 평판이 좋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같은 백성들의 평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 대한 백성들의 평가는 그 기본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뭄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같이 물으신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올바로 아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비방하거나 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학생들이 배우는 윤리교과서에는 예수님을 비롯해서 석가, 소크라테스, 공자를 인류의 사대 성인이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을 석가나 소크라테스나 공자와 같은 성인 중 한 분으로 아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선지자 중의 한 분으로 여긴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그런 차원에 속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성인(聖人)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인류의 구세주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예수님께서 물으셨을 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셔야 하므로 두 기록은 같은 내용입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는 메시아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으로 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해서 정치적인 메시아 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들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이 인정하는 메시아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요 왕으로 오시는 것이 분명하지만, 지상 나라의 왕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구속받은 자기 백성들의 왕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믿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아로 믿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께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할 때, 그것은 “주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의미여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정치적인 그리스도를 고대했듯이, 오늘날도 예수님을 정치적인 그리스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960년대 말에 남미에서 생겨난 해방신학은 예수님을 억압 받는 가난한 자들의 해방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사회에서 억압 받는 계층을 위해 정권에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해방신학이 우리나라에 도입되어서 민중신학이 생겨났습니다. 교회가 억압 받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억압 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 빌라도가 묻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하니, 대답하시기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말하기를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묻기를 “진리가 무엇이냐?”고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셨다면, 순순히 대제사장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부패한 유대 종교가들을 몰아냈을 것입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의 재판을 받지 않고 스스로 왕이 되셔서 백성들을 규합해서 로마를 대항해서 전쟁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왕으로 오셨으나 세상에 속한 나라의 왕이 아니라 진리에 속한 나라 곧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창과 검으로 무장한 군대의 힘이나 정치적인 모략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세워진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그의 피로써 죄 씻음을 받은 사람들이라야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골로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다’(13-14)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메시아 왕국의 백성이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어야 합니다. 죄 사함 받지 못한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천국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죄인은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죄인은 하나님과 원수이므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불화를 청산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죄 사함을 받고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전서 2장 10절에 이르기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을 죄인들의 구세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죄 사함을 받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신 주님의 물음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지 않아도 수많은 백성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선지자 중 하나로 알고서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데, 만약에 예수님께서 친히 자기가 메시아라고 선포하셨다는 말이 백성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소문을 들은 백성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예수님에게로 모여와서 예수님에게 유대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만민의 구세주로서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에 차질이 생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던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것도 은연중에 암시하신 것이 아니라, 드러내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언행은 그를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무나 뜻밖이었습니다. 앞에서도 살펴본 것과 같이, 제자들 역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의 메시아 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인정하셨을 때, 이제야 말로 유대 나라를 로마의 손에서 해방시키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유대의 왕이 되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들은 주님의 대신들이 되어 영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황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게 되리라고 하시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만류했습니다. 조용히 말씀 드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붙들고 강한 어조로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3)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자기의 기대와 너무나 상반된 주님의 말씀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으므로 그처럼 강력한 거부의 표현을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시다니요.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안되고말고요.” 

그 때, 예수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사단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유대인들처럼 정치적인 메시아 관을 갖고 예수님을 만류하는 것은 사단이 원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 언젠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줄로 알았으나,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하심은 자기의 욕망과 뜻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면 자기들은 대신들이 될 줄로 알았으나, 그 같은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십자가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면 고난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극악한 사형 틀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살려면 여러 가지 극심한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성도들을 싫어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그들에게 무슨 해를 끼치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을 진실하게 섬기는 성도들이 고의적으로 남에게 해를 끼칠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성도들을 미워하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15장에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18)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저들이 예수님께 속한 자들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은 그 성격상 서로 화합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6장 14절 이하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4)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보다는 주님을 이용해서 번영을 누리는 데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미국에서 생겨난 번영신학이 인기가 있습니다. 번영신학은 예수님을 믿으면 건강과 부와 번영을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얼마든지 건강을 주시고, 부와 번영을 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항상 예수 믿으면 건강하고 부자가 되고 번영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예수 믿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번영신학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그 대신 “당신이 예수님을 믿은 지 삼년이 되었는데도 셋방에 살면 예수 잘못 믿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같은 사이비한 말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번영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기적 기사에 나오는, 떡을 얻어먹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오래지 않아 예수님 곁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할 충분한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3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재물과 쾌락을 얻기 위해 제 목숨을 잃는 것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영혼을 마귀에게 팔아넘기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감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들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생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했을 때,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마음에 거리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란 말 자체를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천하를 호령하는 그리스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임을 알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끄럽기는커녕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8)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구원 받은 성도가 예수님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인류의 철천지원수인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습니다. 머리가 상한 것은 마귀가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미움이 아니라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

오늘날 십자가가 박애와 안전과 생명의 상징물로 쓰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우리 각 사람은 예수님의 이 같은 물으심에 개별적으로 답변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여러분의 신앙을 분명하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 때 우리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처럼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죄인의 구세주로서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벧전 1:2)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심령에 뿌려졌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 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의 자격으로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핍박을 각오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의 보혈의 능력을 힘입어 끝까지 믿음을 지켜 영생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