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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이 되시는 주님 (수 7: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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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이 되시는 주님 (수 7:6~13)
 

지난 한달 동안 우리를 흥분하게 만들었던 WBC 야구도 끝났습니다만, 숱한 에피소드가 많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경제 여건에 시름을 앓던 국민은 야구대표팀이 WBC에서 쓴 드라마를 보고 모처럼 웃음을 찾았습니다. 특히 야구 감독으로 선임된 김 인식감독은 2004년 말 뇌경색으로 쓰러져 몸은 불편하나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승부수로 결승까지 올라왔던 그의 리더십이 이번 야구에 화제로 떠오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열광 속에 있던 팀이나 선수가 극도의 부진을 경험하는 사례가 있는데 이를 스포츠 용어로 소포모올 징크스 'Sophomore Jinx'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들어보신 분들이 계십니까? 아마 스포츠를 좋아하는 분들은 이 말을 자주 들으셨을 것입니다. 이 말을 한국말로 하면 '2년생 징크스'라고 하는데,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선수들이 그 다음 해에는 여지없이 슬럼프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현상을 '2년생 징크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이런 '2년생 징크스'가 생겨났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이유를 꼽아본다면, 
첫째로, '지나친 부담감' 때문입니다. 운동선수나 배우나 가수가 처음 데뷔하여 큰 성공을 거두면,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큰 기대와 관심을 보입니다. 그러다보면 본인은 더 나은 차기작을 만들어야 하고, 더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한다는 지나친 부담감 때문에 다음 해에는 죽을 쑤듯이 성적이 좋지 않다고 합니다. 

둘째로, '약점의 노출' 때문입니다. 처음 데뷔 때에는 상대 팀들이 장점과 단점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다른 팀들이 철저하게 분석하여 그 선수의 약점을 찾아내기 때문에, 그 다음 해에는 성적이 형편없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셋째로, '교만과 자만심' 때문입니다. 신인상을 받은 선수는 천하를 얻은 듯 교만해져서 훈련과 자기개발을 게을리 하게 됩니다. 온갖 축하행사와 광고 촬영 등으로 정신없이 바쁘다 보면 정신력이 약해지고, 천하를 모두 얻은 듯 교만해빠져서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처음에는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영광의 자리에 올랐다가, 다음 해에 패배와 실패의 자리에 떨어진 안타까운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작은 승리를 거둔 후, 그 작은 승리에 도취되어 오히려 큰 승리를 놓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정복을 위한 첫 번째 전쟁인 여리고 전투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여세를 몰아 여리고성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16Km 떨어져 있는 아이 성을 공격하였습니다. 이 성은 약 12,000명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는, 여리고 성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은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일어났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작은 아이 성 전투에서 전혀 예상하지 않은 패배를 당했습니다. 3,000명의 이스라엘 군대는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한 채, 36명의 병사를 잃고 간신히 도망쳐 왔습니다. 이 때 받은 충격이 어떤지 5절을 보면,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결과였으며 전혀 예상치 못한 패배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의 마음이 물과 같이 녹아 버렸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떱니다. 절망에 빠집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여호수아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 부르짖습니다. 다같이 6절과 7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야훼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야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패배 앞에서 여호수아는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울부짖었습니다. 

마치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후, 다음 해에 '2년생 징크스'에 빠져 괴로워하는 선수처럼 여호수아는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리고 전투에서 승리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갑자기 실패를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교만과 자만심 때문입니다. 금성철벽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의 소문이 가나안 온 땅에 퍼져나갔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있는 6장 27절에서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명성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호수아의 명성이 가나안 땅의 이곳저곳으로 퍼졌습니다. 안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적적으로 요단강을 건넜다는 소문이 이미 가나안에 있는 모든 나라에 퍼졌는데, 한 술 더 떠서 난공불락의 요새인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다는 소식까지 퍼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존재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이스라엘을 대적할 마음조차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호수아의 마음속에 교만이 싹이 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자만심에 빠졌습니다.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여러분, 여호수아가 여리고 전투에서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 명령대로 행했습니다. '6일 동안 매일 한 번씩 여리고성을 돌고, 7일째는 7번 돌되 일곱 번째 돌때에는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고 백성들은 고함을 외치라'는 하나님의 작전명령을 받고 그 명령을 잘 따랐습니다. 그런데 아이 성 전투를 앞둔 여호수아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판단해서 정탐꾼들에게 아이성을 정탐하고 오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설령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그는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나서 하나님께 물어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아이 성은 여리고성과 비교할 수 없는 작은 성이기 때문에 이삼천 명의 군인을 보내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정탐꾼들의 보고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3,000명의 병사를 파송하였지만, 보기 좋게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승리의 기쁨과 감격에 빠진 여호수아는 잠시 동안 교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지혜와 전략을 구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과 경험을 앞세웠습니다. 난공불락 요새와 같은 여리고성도 무너뜨렸는데, 아이 성 같이 작은 성은 소수의 병사만을 보내도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진 결과, 전혀 예상치 못한 패배를 맛본 것입니다. 이 사실이 깨달아질 때 얼마나 부끄럽고 아픔이 컸겠습니까? 그는 겸손하게 회개합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부흥 되었을 때, 우리가 축복을 경험했을 때, 우리가 능력을 경험할 때, 우리가 은혜를 체험했을 때, 사실 그 순간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위기일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앉아있을 때는 우리가 다시 일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서 있는 순간이 가장 어렵고 무서운 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 여호수아는 자신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기도하는 가운데 이 아이성의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을 알게 됩니다. 10-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려 있느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으로 사기하여 자기 기구가운데 두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여호수아로 정신이 바짝 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 하였다는 것으로 여호수아로 하여금 이 실패의 원인을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범죄 하였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이 말씀을 안 보았지만,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 여리고 성을 정복한 후에 전쟁에서 빼앗은 모든 물건들의 처리 방법을 명령하신 적이 있습니다. 수 6:17-19절 말씀을 보면, 여리고 전투에서 승리를 가둔 후 빼앗은 모든 물건들은 어느 누구도 취하지 말고,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만약 그 물건들 중에 어떤 것이든지 취하는 사람은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에 이 명령에 불순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같이 1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최고 명문가문인 유다지파 출신의 아간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아간(Achan)'이라는 이름의 뜻은 '괴로움' 인데, 그는 그의 이름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게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여리고성 안에 있던 아름다운 외투를 숨겨놓았습니다. 또 은 200세겔과 50세겔 되는 금덩어리 하나를 자기 장막이 처져있는 땅 속에 묻어두었습니다. 이는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예물입니다. 여호수아 7장에 "바친 물건"이라고 하는 말이 무려 8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아간이 훔친 사건은 단순한 도적 행위가 아니야. 하나님께 바친 것 - 하나님이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 것을 인간이 사용하고자 했던 하나님 모독죄요 하나님께 도전장을 낸 무서운 것 이었다" 는 것입니다. 아마 아간은 "태워 없애는 물건, 내가 가져다가 유용하게 쓰면 되는 게 아닌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가십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은 무엇을 믿고 살아오셨습니까? 여러분의 생명은 하나님께 바쳐진 생명 아니었습니까? 건강하던 사람도 젊은 사람도 아침에 문을 열고 밝게 나갔던 사람도 주님이 부르면 오늘이라도 주님 앞에 설 수 밖에 없는 것 아니었습니까? 여러분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이 가진 재능은 여러분이 만들어낸 것이었습니까? 여러분을 위해서 꾸어다 쓰는 것이었습니까? 여러분이 돈 주고 산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 아니었습니까? 하나님께 바친 것을 내 마음대로 써 보겠다고 장롱 밑에 감추어 두지 마십시오. 온전히 주께 맡기고 성별 받은 다음에야 주의 뜻을 따라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처지에 아들을 하나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만 만해졌습니다. 이 나이에 내가 자식을 가졌어. 내 건강을 보라 세상 사람들아. 그래서 내 자식인줄 알고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식만 쳐다보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들을 내게 바치라. 

내가 너에게 준 것인데 그 아들이 네 것인 줄 알았느냐. 그 아들이 너무 크게 보여서 그 아들에 가려서 내가 보이지 않는구나. 그 아들을 바쳐라" "그랬군요.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내 아들인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치라 하면 바쳐야지요." 즉시 결단하고 아들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갑니다. 장작더미 쌓아놓고 불을 준비하고 자식을 묶어 그 위에 얹어 놓습니다. 시퍼런 칼을 뽑아들고 그 아들을 향하여 내리 치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 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브라함아! 그 자식에게 손을 대지 말라.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노라. 자식까지 남김없이 내게 바쳤으니 이 자식을 통하여 하늘의 뭇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내 자손들을 축복하리라." 어린아이 하나가 굶주린 베세다 들녁에 오천 청중들을 향하여 도시락을 내어놓았습니다. 제가 먹었으면 혼자 먹기에도 모자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맡겨졌을 때에 오천 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제자들 열두 명이 광주리 하나씩 들고 거두었으니까 열두 광주리지, 한 오십 명이 저마다 한 광주리씩 아마 채우고도 남음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보리떡을 주님 앞에 바쳤을 때, 그리고 이 보잘 것 없는 물고기 한 마리, 주님 손에 들렸을 때 이것을 찹쌀로 만들지 않으시고, 커다란 연어나 커다란 상어로 바꾸어서 청중들에게 먹여주지 아니하시고 물고기 그대로 쓰임받기를 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바쳐진 생애의 행복이 있습니다. 이 땅은 언제나 갈증이 있고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은 언제나 풍성하십니다.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쳐진 생애는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고백처럼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주님을 높이며 찬양합니다. 일찍이 일본의 훌륭한 신앙인 '우찌무라 간조'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저주하실 때에는 질병과 실패와 고통으로 저주하지 아니하신다. 이 세상에서 악의 도구로 쓰임 받는데도 불구하고 그대로 내버려 둔다. 죄를 짓고 죄를 쌓아감에 도 불구하고 그대로 죄짓도록 내버려 둔다. 지옥을 향하여 줄달음쳐 달려감에 도 불구하고 그 발을 붙들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인생들이 저주받은 인생이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바쳐진 생애는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은혜 받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죄 짓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무의미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땅에 속물들처럼 썩을 것을 위해서만은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는 길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바쳐진 생애의 행복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실패의 자리에서 마냥 두시지 않으십니다. 13절을 보면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하여 이르기를 내일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결케 하라고 또 하나는 내일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여기 "성결케하라"는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성결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보혈이 내 삶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거룩하심을 입고 우리 역시 순결한 삶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이 얼마나 대단한지. 필립 얀시가 말한 것처럼 십자가에는 강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해짐으로 죽음의 고통을 스스로 흡수 해 버린 신비한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사랑의 보혈에 우리가 잠기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전부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 사랑 때문에 텅텅 비었던 가슴에 놀라운 기쁨과 평안이 차오르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이 세상을 두려워하던 사람이 담대함을 갖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불만족에 휩쓸렸던 사람들이 날마다 찬송하고 기뻐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성결한 삶은 성결의 삶은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악을 불사름으로 가능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흘린 십자가를 우리 마음 가운데 뿌리 내림으로 성결한 은혜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결한 체험이 없는 성도들은 주님과 함께 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보면 '너희들이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은 주님과 함께 할 때 가능한데 그러면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한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성결입니다. 주님과 함께 거할 때 우리는 새로운 힘을 공급받습니다. 주님과 함께 거할 때 우리는 내일을 약속받을 수 있습니다. 그 내일은 그러기에 성결함으로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내일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언제인가부터 우리 한국인들은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에서도 뛰어야 하는 민족,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가 자동으로 닫히는 그 시간을 인내하지 못하고 단추를 눌러 닫아야 하는 대표적인 민족이 되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 빨리"가 되었습니다. 이 내일을 기다리라는 이 메시지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가 아닙니까? 지금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은 이 내일을 기다리는 과정 속에서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탐욕에 관한 부분을 영적으로 정리 해두지 않으면 탐욕 때문에 신앙생활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탐욕이 담쟁이 넝쿨과 같아서 탐욕이 신앙의 어떤 부분이든지 감싸버리면 신앙의 아름다운 모습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담쟁이 넝쿨 같은 탐욕만 남게 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패전에서 배웁니다. 승리 이후의 자만심의 죄악을 배웁니다. 공동체 의식을 갖지 못하는 비극이 초래한 삶의 어두움을 발견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 앞에 어떤 결심을 하십니까? 안 될 때는 기도해 달라고 소리치다가 일이 되어놓고 나면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삶을 살아가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이성과 지식을 가지고 그 만큼 삶을 버티고 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 업적, 내 것으로 착각하는 이 무서운 오만심,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의 행동이 나 한사람의 행동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시간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귀를 열어주셔서, 오늘 말씀을 단순히 어떤 한 사람의 설교로 듣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게 되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아직까지 우리의 인생 여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고 3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인생의 승부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뼈를 깎는 고통을 참고 밤잠 설치며 공부해서 법대, 의대를 졸업했다고 인생이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불경기인 요즘 어렵게 취직을 했다고 해서, 다른 경쟁업체와 달리 사업이 잘 된다고 해서, 인생에 성공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작은 승리, 작은 성공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작은 승리 때문에 큰 승리를 놓치는 어리석음 범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작은 성공 때문에 큰 성공이 막히는 실수를 범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승리 뒤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끝까지 겸손하십시오. 그리고 세상 것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과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사십시오. 주님 앞에서 낮출 때 주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할 때, 주님께서 더 큰 승리의 기쁨과 감격을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일할 태신자들을 세워 함께 세우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이제 이들과 함께 이루어질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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