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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손들이 물어볼 일을 하라 (수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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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손들이 물어볼 일을 하라 (수 4:4~9)


버락 오바마가 미국 44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건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선거기간 중에 가장 위기와 어려웠던 시간과 문제는 바로 흑백의 갈등 문제였습니다. 민주당 내의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 선거 본부에서 은연중에 만들어가는 흑백간의 갈등 전략은 미국 사회를 새로운 분열과 나누어짐 그리고 적대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로 조성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바마의 신앙의 아버지 같은 라이트 목사의 발언은 오바마로 하여금 미국사회 저변에 흐르는 흑백 갈등의 늪 속에 결국 빠지고 마는 구나 하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 오바마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미국 역사상 가장 감동적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명 연설 중에 하나로 기록된 그런 연설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필라델피아 내셔널 헌법 센터에서 2008년 3월 19일 행해진 것으로 이 연설을 기점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오바마 쪽으로 기울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이제 겨우 27세 된 존 파브르라는 젊은 연설문 작성자는 이 깊이 골이 패인 흑백의 인종문제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루면서 왜 오바마라는 흑인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하는 국민들의 의문과 질문을 오바마로 하여금 대답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오바마는 미국이 가진 가장 근본적이고 지향하는 핵심을 그는 바라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독립선언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념에 의해서, 이 관념에 의해서 노예제도의 폐지라는 것을 재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인들의 이상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으로 희생으로 이 아름다운 미국 건국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수없이 희생을 치루웠던 사람들의 사건을 나열하면서 오늘 자신에 이르기까지 이 미국이 걸어가야 될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명쾌하게 밝히게 된 것입니다. 

이 헌법 정신은 과거의 정신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 속에 우리가 다시 되 살려야 될, 그러한 것이고 헌법 정신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우리가 어떻게 극복해 가느냐? 그것이 오늘 이 자리에 자기가 선 이유라는 것을 이 연설을 통해서 밝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러한 오바마의 연설은 미국인 들이 자신들이 누구며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며 어떻게 살아야 될지에 대한 부분을 다시 일깨워 주었고 그것은 흑백의 갈등을 넘어서서 진정 이 시대 속에 지정한 미국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세계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리더십이 어떻게 세워져야 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미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이 사건 속에서 단순히 하나님이 요단강에서 가져온 돌멩이, 그것을 가지고 기념비를 세운 그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이 돌에 대한 것은, 자세히 여러분에게 오늘은 다 말씀 드리지 못하지만, 이 후로부터 스가랴서를 거쳐서 사도행전과 복음서와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이 돌에 대한 부분은 계속해서, 계속해서 성경 전체에 나타나면서 이 돌멩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계속해서 질문하고 있는 것을 바라봅니다. 

단순히 돌멩이가 아니라 결국은 나중에 이 돌멩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분명히 증거되고 표현 되어지지만, 아무튼 이 돌멩이를 통해서 우리가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묻는 그 질문의 도구로 이 돌멩이는 쓰여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일 먼저 우리가 살펴 봐야 될 것이 이 기념비에 쌓은 돌을 어디에서 가져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4장 2절부터 3절까지 보면 백성이 매 지파의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곳에서 돌 열둘을 취하고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 밤 너희의 유숙할 그곳에 두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널 때에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강 그 바닥 한 가운데, 백성이 지나갈 때까지 그대로 그들은 서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각 지파의 한 명씩을 뽑아서 그 제사장들이 서있던 그 땅, 거기에 있는 돌멩이를 가져오도록 명령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 사람들이 어깨에 메고 왔다는 것으로 보아서 그냥 작은 돌멩이가 아니라 지기에 벅찬 큰 돌멩이를 긴 시간, 좌우에는 물이 막아 서있고 언제 다시 흐를지 모르는 그 상황 속에서 이 돌멩이를 가져오게 만들고 그것을 그들이 첫 번 유숙하는 바로 그 길갈에 이 기념비를 세우도록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냥 우리가 기념이 될만한 것, 그것은 구하기 쉬운 강가에서 돌멩이를 가지고 그냥 예쁘게 다듬어서 기념비라고 이야기 하면 될 것인데, 하나님께서 굳이 열두 지파의 한 사람씩 뽑아서 제사장들이 서있던 요단강 그 바닥에 돌멩이를 갖고 오게 만들고, 또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들려지는 제단은 절대 깎거나 돌로 찍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세계 모든 종교는 제단을 만드는데 그 제단을 전부다 기둥으로 만들고 세우기도하고 깎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그 제단은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주님은 원하셨습니다. 자연스럽게 그 돌을 포개어서 기념비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단강 바닥에서 이 돌멩이를 가져다가 기념비를 세우게 한 이유가 뭘까, 할 때 한 두 가지 우리는 여기에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엇보다도 불가능한 일들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이 백성들로 잊지 말라는 의미가 그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있을 수 없었던 일 그리고 패배로 두려워서 도망쳤던 그런, 그래서 40년간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었던 바로 그 요단강, 그 강바닥 가장 밑 바닥 그 속에서 가져온 그 돌의 의미는 그 강 앞에 무기력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함과 죄악과 무지를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만들면서 동시에 그러한 그들을 사랑해 주셔서 지금 여기까지 고난과 고초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어서 그 강 바닥에서 가져온 그 돌멩이를 통해서 그 발바닥으로 그 강을 건너서 여기까지 오게 하신,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이 가나안 땅에 첫 입성하게 하신 그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지 말라는 의미가 이 속에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그들에게 바라봐야 될 일들이 있다면 그들이 이제 가나안 땅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다 완성된 정복된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가면서 하나님이 이미 약속해 준 그 땅을 정복해 나가야 되는 귀중한 그들이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미래의 시간과 공간,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이 미래의 시간과 공간을 한 걸음 한 걸음 믿음으로 걸어가서 믿음의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어가야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때 그들이 겪어야 될 수 많은 좌절과 절망 그들의 연약함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그 상황 속에서 강바닥에서 가져온 그 돌멩이를 통해서 그런 연약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인도해 주셔서 반드시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성취하시는 그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그 의미가 그 속에 담겨져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 속에, 여러분의 강바닥에서 가져온 돌멩이가 여러분 삶 속에 있습니까? 그 돌멩이를 바라보면 나의 연약함과 무지와 부족함 그리고 내가 이룰 수 없었던 내가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연약한 부분들을 들어내 주면서, 그런 나를 그 상황에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오늘 지금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그 하나님, 이룰 수 없었던 일들을 이루게 하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드는 그런 돌멩이가 여러분 삶 속에는 없습니까? 다시 찾으셔야 됩니다. 

여러분 삶의 주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그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기억 속에, 여러분의 과거의 사건 속에 다시 들어가셔서 나에게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그 시간을 찾으시고 그 사건을 찾으셔서 다시 한번 우리가 거하는 길갈과 같은 이곳에 기념비를 다시 쌓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날마다 보지 않으면 교만해집니다. 우리가 이룬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동시에 우리는 크고 놀라운 문제 앞에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현실적인 어려움 앞에서 주저 앉을 때가 많지만 그 일들을 통해서 과거에 도우셨던 하나님, 이룰 수 없는 일들을 이루셨던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낙담하지 아니하며, 절망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었던 그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개인적으로 참 여립니다. 예, 관계가 상하면 견디지 못합니다. 곧바로 질병으로 이어지고 낙심합니다. 쉽게 포기하게 됩니다. 갈등 구조에 들어가는 것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그 갈등 구조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제가 제 자신을 스스로 학대하는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갈등이나 오해가 빚어질 때 제 속에 일어나는 분노는 다른 사람보다는 조금 더 많을 것입니다. 거의 완벽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그렇다고 저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일련의 여러가지 어려움들을 십여 년 이상 겪어 오면서 제가 가졌던 경험은 인생은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구나! 

저는 제 아내를 바라보고 제 딸을 바라보면 두 개의 기적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그런 마음을 자주 갖습니다. 불가능했던, 회복될 수 없었던, 있을 수 없었던, 그래서 뚜렷하게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고 기도의 약속을 통해서 이루어 주신 그 하나님, 그리고 이번에 학위과정을 마치게 되면서 공부하러 미국에 갖다가 다 이루지 못하고 돌아와서 좌절감에 있던 저를 하나님께서 끝까지 세워주셔서 정말 어려운 이 나이에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바라보면서 정말 제 자신 속에, 하나는 제 힘으로 가정 하나 구며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여리고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과 동시에 그런 나를 사용하셔서 한국교회를 정말 이끌어가는 우리 교회를 섬기는 목사로 세워주신 그 하나님을 바라볼 때 마다, 좌절하고 절망할 때 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가는 믿음을 다시 세우게 됩니다. 

저만 그렇겠습니까? 여러분 삶 속에도 그러한 삶이 있었기에 오늘까지 걸어오지 않았습니까? 낙심될 만한 일들, 주저 앉을 만한 일들 그리고 죽어버리고 싶은 우리들 속에 많고 우리를 절망하게 했던 많은 일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여기까지 인도하신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을 생각하며 요단강 강바닥에 깊게 묻혀져 있던 그 돌멩이를 주님 말씀 따라 다시 찾아내셔서 메고 나오시는 수고를 하시고 우리가 거하는 삶의 자리에 그것을 세워 두셔서 하나님께서 오늘도 내 삶을 인도해 가시고 그 약속하신 것은 인생이 아니니 식언치 아니하시고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그 약속 붙들고 고난의 시간을 이겨 나가도록 하시는 그 하나님의 섭리와 배려 앞에 다시 한번 우리는 서야 될 것입니다.  

누구나 인생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믿음의 길을 걸어 가기를 주님은 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환경과 여건과 모든 상황가운데서도 불구하고 우리가 걸어가야 될 믿음의 길이 있기에, 그 길은 나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나를 도우신 그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믿음을 가지지 않고는 걸어 갈 수 없기에 주님은 우리 삶 속에 바로 이 길갈에 세웠던 이 돌멩이를 주어와서 세우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요단강 그 강바닥 그 돌멩이를 다시 찾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를 바라보면 여호수아는 일평생 그가 살아오면서 한 그 사역을 보면서 이 돌에 대한 것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자기 삶을 마감하는 여호수아 24장 1절부터 15절은 우리가 신약시대에 사도들의 신경, 사도신경을 통해서 우리가 신앙고백을 한다면 구약의 신앙고백은 바로 모세가 신명이 26장 5절부터 9절까지 고백했던 것과 바로 이 여호수아가 24장 1절부터 15절까지 고백했던 이 고백이 구약의 신앙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통해서 여호수아는, 특별히 25절부터 28절까지 이 백성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이 언약과 이 약속을 가지고 붙들고 살아온 지금 우리는 이 땅을 다 정복할 수 있게 되었노라고-----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 약속을 지키신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오늘 너희들도 섬기겠느냐?” 고 백성들에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 가운데 우상을 제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신 그 하나님,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실 그 하나님을 섬기겠노라고 고백하고 선택하라고 그럴 때, 그 백성들이 대답할 때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25절부터 28절까지 “그날에 여호수아가 백성들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더라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 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취하여 거기에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 나무 아래 세우고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라 그런즉 너희로 너희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돌에 인격성은 부여했습니다. 이 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이 고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처음 주님을 믿고 섬길 때 주님 앞에 들였던 그 고백의 아름다운 고백들을 다시 한번 되살리면서 우리 인생의 가장 밑바닥처럼 여겨지는 내가 이룰 수 없었던 그 요단강 강바닥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셨던 그 기억들을, 그 돌멩이들을 다시 가져다가 우리의 삶의 자리에 다시 놓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이 기념비를 어디에 세웠습니까? 여호수아 4장 19절부터 20절까지 보니까 “정월 십 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치매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여러분 길갈이란 곳은 ‘굴리다’ 라는 뜻을 가진 단어인데 이 ‘갈랄’ 에서 유래해 왔습니다. 쉽게 말하면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였다” 라는 그런 의미를 가진 지명입니다. 즉 존귀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 되며 살았던 수치와 고통 그리고 굴욕과 치욕, 모든 것을 요단강을 건너서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 오므로 애굽에서의 그 수치와 치욕을 다 굴러가게 하시고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 그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이야기하는, 바로 은혜가 시작되는 자리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약속이 시작되는 그 자리가 바로 길갈이라는 의미가 이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이 길갈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수치를 물러가게 하시고 하나님 자녀로서 새 출발하게 하신 곳이라는 것과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장소였습니다. 이런 길갈은 여호수아에게 있어서 가나안 정복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도 여호수아를 이렇게 깊게 보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그냥, 저절로 승리하고 자동적으로 승리한 것 같지만, 여러분 여호수아서를 아마 우리 군인이신 분이 있다면, 군사적 전략적 요충지를 살피면서 본다면, 지도와 함께 살펴 본다면 이 여호수아 얼마큼 전략을 많이 세운 그런 사람인가 하는 것을 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남과 북이 이렇게 길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리고 성은 이 중앙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요단강을 건넌 이 시점이 여리고성에서 보여지는 위치에다 이 정복해야 될 남과 북, 이스라엘 중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즉 여리고 성을 공략함으로 남과 북의 가나안 땅의 족속들이 연합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면서 북쪽을 치고 남쪽을 치면서 그 전략적 요충지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급품입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병사들의 사기 입니다. 전쟁을 하다 보면 지칩니다. 그리고 싸우다 보면 낙심될 때도 많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연약해 질 때도 많습니다. 실패할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 길갈에 요충지를 세워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우리의 수치를 물러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우리를(나님의 백성을) 이 가나안 땅에 두게 하셨다는 것과 더불어서 저 요단강 강바닥에서 가져온 그 돌멩이를 그곳에 세워 두게 하면서 날마다 그것을 보게 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 가나안 땅을 향한 새로운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고 나갈 수 있게 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삼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성을 공격했을 때, 실패했을 때도 그들이 이 길갈로 돌아와서 이곳에서 회복의 역사를 다시 만듭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삶의 아름다운 돌멩이, 이 기념비를 어디에 세워야 될 것 같습니까? 우리 삶에 전략적 요충지에 세워야 됩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생활하며 지칠 때도 많습니다. 낙심될 때도 많습니다. ‘내가 믿음의 길 걷는 다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때로는 우리가 피를 흘려야 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패배할 때도 있습니다. 모든 일이 우리의 생각처럼 잘 되지 않을 때 우리는 믿음의 생활을 포기하고 세상의 생각으로 돌아갈 때마다 나를 지금까지 인도하신 그 하나님, 나의 수치와 나의 고난과 고통을 다 잊게 하신 그 하나님, 그 하나님께 다시 돌아와서 그 하나님께 다시 무릎을 꿇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약속의 말씀을 다시 붙들고 걸어갈 때에, 우리의 삶은 다시 나에게 주어진 그 삶에 여정 속에 극복하며 이겨 나갈 수 있는 힘을 공급받는 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어디 가보십시오. 우리에게 힘을 주는 곳이 있는지요? 
여러분 저는 박카스 같은 거나 요즘 뭐 강장제 이런 거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걸 볼 때 마다 “하나님 육적으로도 힘을 얻지만, 영적으로도 이렇게 좀 마시면 힘을 얻는 어떤 그런 눈에 보이는 거 뭐 좀 없습니까?” 이렇게 마음으로 기도할 때가 참 많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겉 사람도 건강해야 되지만 우리의 속 사람이 너무나 무너져 있는 이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기에 너무나 어려운 세상입니다. 보장 된 것 없습니다. 우리를 도와주는 분위기도 없습니다. 때로는 고독하고 처절하게 살아가야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우리를 인도하여 주신 그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리고 우리의 수치를 멀리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 죄의 저주의 자녀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시고 약속의 자녀로 살게 하신 그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하나님 자녀 삼으시고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의 족속으로 나를 삼으시고 믿음 안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이 기대와 사랑과 하나님의 역사가 머물러 있는 그곳에 우리가 다시 돌아와서 보충을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매 주일 드리는 이 예배가 여러분 단순하게 드려지는 예배가 아닙니다. 한 달을 시작하는 그 첫 새벽에 드려진 예배가 단순한 그런 예배가 아닙니다. 여러분 구역마다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단순한 예배가 아니라 그것은 내가 시간을 열어서 가 주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려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시 살 길, 내가 다시 세워지고 믿음으로 다시 걸어갈 그것을 다시 보충 받고 새롭게 도움을 받은 바로 그 장소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내가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도우리라” 

이 말씀을 듣지 말아야 될 사람이 오늘 우리 중에 한 사람이라도 있단 말입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두려워할 일들이 여기 저기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놀랄 일들이 우리의 삶을 어렵게 만듭니다. 우리의 힘을 빼 버리고 좌절하고 주저 앉게 만드는 그리고 힘을 낼 수 없는 그런 상황 속에 우리를 몰아가는 이 땅 속에 소년도 넘어지고 장정도 자빠질 수밖에 없는 이 상황 속에 다시 한번 우리의 속 사람을 강하게 하며 우리를 도우시며 그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않고 살아갈 인생이 우리 가운데 있는가 말입니다. 

오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다시 한번 우리가 돌아가서 실패로 돌아올 것이 아니라, 낙심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셨던 그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됩니다. 그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갈 때 우리의 수치를 멀리 하게 하셨고, 가난하고 연약한 나를 세우셔서 하나님의 역사 무대에 다시 아름답게 다시 세우셨던 그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산들은 옮겨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그 약속은 변치 않는다고 약속하신 그 말씀처럼 성실하게 지금도 이행하시는 그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들 속에 공급되지 않으면 우리는 오늘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왜 하나님께서 이 돌멩이들로 기념비를 세우라고 하신 이유가 뭘까요? 22절과 24절까지 보면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돌 더미를 볼 때마다, 우리 후손들이 물어 볼 때 즉 자기들이 왜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지, 자기들이 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지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없어서 삶의 현장 속에서 우리에게 물어 볼 때, 이 돌멩이들을 통해서 이룰 수 없었던 일들 가질 수 없었던 것들 해 낼 수 없었던 것들을 연약한 우리를 통해 이루게 하셨던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여전히 함께 계신다는 그 사실들을 이 후손들에게 알려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즉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기를 원하셨고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누리는 축복과 은혜 가운데 거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들에게 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녀들에게 도움을 준다 하더라도 그들 곁에 영원히 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곧 조만간 그들 곁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더 이상 우리가 도와 줄 수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 꼬맹이를 남겨놓고 올 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이 아이를 위해서 무엇을 준비할까 할 때, 기껏 준비 해 봐야 열흘 내지는 보름 정도 외에는 제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재산을 많이 가지고 우리가 많은 것을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언제까지나 우리 자녀들에게 해 줄 수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떠나야 됩니다. 

우리 자녀들이 자신들의 삶을 살 때 인생의 겨울이 다가오고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혹독한 삶의 현실 앞에 좌절하고 낙심할 때 저들을 어떻게 해야 될 것 같습니까? 
내 도움은 한계가 있고 저들은 내가 살아왔던 그 인생처럼 어려움을 겪을 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나를 도와 주셨던, 나로 하여금 오늘에 이르게 하셨던 그 하나님을 저들도 함께 깨닫고 고백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저들을 가르치시고 교육하라는 것입니다. 

잠언 14장 26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는 그 자녀들이 그 고난과 어려움 앞에 정말 진정한 피난처, 그 하나님을 발견함으로 피난처가 되어서 그 고난이 저들을 불행으로 몰아가지 않고 그 절망이 그들로 하여금 인생 전체를 좌우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그 이유,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돌아감에 있다는 것을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수많은 세월이 흐릅니다. 
스가랴 3장 9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놓은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여러분 여기 보십시오. 여기는 돌에 눈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일곱 눈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이렇게 완전한 수를 얘기합니다.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의 모든 것을 살피십니다. 그런데 무슨 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여호수아 때 세워진 이 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왜 오늘 예배를 드려야 되지? 왜 하나님께 헌신해야 되지? 이 가운데 내가 낙심하지 않고 왜 믿음으로 살아야 되지?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과 우리를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삶을 우리는 오늘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교육에 핵심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 자기 후손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가장 비참하고 낮은 보 잘 것 없으면서, 무기력했던 노예와 갔던 자기들의 삶을 그들은 보여 주면서, 그리고 그러한 자기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과 사랑을 증거하게 만듭니다. 

그 동일하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자녀들도, 자손들도 사랑한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게 하면서 자기들이 살아가는 시대 속에 그 앞에 세워진 그 돌들을 여전히 기억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복된 삶을 위하여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우리 자녀들을 편하게 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 또 어르신들이 더 힘들었을 때 쥐를 잡고 어머님과 누나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팔 수밖에 없는, 그리고 외국의 깊은 탄광에 가서 탄을 캐내며 그 돈을 보낼 수밖에 없는, 외국 사람의 시체를 닦으면서 그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 부모님들에게 송금할 수밖에 없는, 월남전에 가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면서 이 땅을 다시 살릴 수밖에 없었던 그 고통과 고난의 시간을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희생 없이 고통 없이 치루어진 안락함과 편안함은 그들을 오히려 타락하게 만든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고난을 통해서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풍요로움에, 그 속에 살면서 “우리의 주인이 물질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힘들게 가르쳤던 그 자녀들은, 이 고통을 견지지 못해서 지금 자기의 삶을 정면으로 이 고난과 맞서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피하고 회피하며 도망가며 죽어버리는 일들을 바라보면서, 우린 또 다시 고난을 이들에게 가르쳐야 됩니다. 고통을 가르쳐야 됩니다. 그리고 그 고난 가운데서 “내가 절망하지 않았노라, 내가 낙심하지 않았노라, 포기 하지 않았노라 그 이유가 있다면 바로 나를 붙드신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 믿음으로 인하여 내가 다시 살아났노라, 내가 극복하며 오늘까지 왔노라” 고 얘기할 수 있는 그 자녀들에게 전해 줄 수 있는 믿음의 아름다운 유산을 만들어 가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려웠을 때 나는 좌절하고, 나는 절망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내가 하나님 안 계신다고 부인하고 나는 세상 밖으로 나갔다고, 부끄러운 고난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 가운데서 당당하게 맞서며 믿음으로 걸어갈 수 있었던 그 삶의 아름다운 모습들 그것을 우리 후손들에게 이야기 할 수 있을 때, 그들은 물질의 풍요로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아름다움 풍요로움을 누리며, 정말 물질을 지배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그 자녀들로 자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고난을 자녀들과 함께 겪기를 바랍니다. 그 고난의 의미를 설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고난 가운데 오늘도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될 이유를 다시 말씀해 주시고 그 고난 속에서도 우리가 믿음으로 해야 될 일들이 무엇인가를 마땅히 저들에게 가르치게 될 때, 저들은 이전에 우리가 풍요롭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었을 그 어떤 때보다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녀가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문득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의 뒤를 이어 살아갈 이 자녀들, 우리가 분단이라는 아픔을 저들에게 넘겨주고 떠날 수밖에 없는, 남북이 서로 나누어지고 반목할 수밖에 없는 그 아픔과 고통을 저들에게 떠 넘겨주고 살아질 수밖에 없는 그 삶 속에 그 자녀들을 바라보는 애처로운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면, 오늘 우리 마음을 잘 표현한 맥아더 장군의 아들을 향한 기도가 아닐까요? 

“내게 이런 자녀를 주옵소서. 
약할 때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대담성을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자녀를 주옵소서. 

생각해야 할 때 고집하지 말게 하시고 주를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기초임을 아는 자녀를 내게 허락하옵소서. 원하옵나니 그를 평탄하고 아니한 길로 인도하지 마옵시고 고난과 도전에 직면하여 분투 항거할 줄 알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폭풍우 속에서 용감히 싸울 줄 알고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그 마음을 깨끗하고 그 목표가 높은 자녀를, 남을 정복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자녀를, 장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지난 날을 잊지 않는 자녀를 내게 주옵소서. 
이런 것들을 허락하신 다음 이에 더하여 내 아들에게 유머를 알게 하시고 생을 엄숙하게 살아감과 동시에 생을 즐길 줄 알게 하옵소서. 

자기 자신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시사, 참된 유대성은 소박함에 있음을 알게 하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나 아버지는 어느 날, 내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그렇습니다. 미국이 분열되고 나누어질 때 저는 스물일곱 살 된 젊은이가 어떻게 깊게 골이 파인 흑백의 문제 전쟁으로 나누어진 미국의 여론과 사람들의 찢어진 마음들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생각을, 바로 가장 근본적인 독립선언의 그 기초에서 찾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이념에, 그 신념에 맞서서 그 이념을 지키기 위해서 쌓아온 수많은 삶의 희생과 노고와, 쉽게 말하면 아름다운 유산을 기억해 낼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었고, 현실과 그 유산을 연결시킬 수 있었던 그 생각을 스물일곱 살의 젊은이가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미국은 소망이 있는 나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 자녀들에게 어렵고 힘들 때에 우리의 믿음의 유산을 그들이 서로 연결할 수 있고 그 연결된 믿음의 유산을 통해서, 절망의 나라에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걸어갈 수 있다면 우리 자녀들과 우리의 삶의 미래는 희망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이제 가장 어두운 밤에 가장 아름다운 찬미로 이 감옥의 모든 문을 열 수 있었던 바울과 실라의 노래처럼, 힘들 때에 가장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노래하는 그 노래로 이 고난의 길을, 어려운 시간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지금까지 걸어온 것, 나의 노력과 나의 힘이 아닌 것을 고백합니다. 알 수 없는 주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문제 앞에 좌절하는 것, 당연하다고 하나님 받아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소망을 갖는 것은 그런 나를 붙들어서 인도해 오신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의 삶을 통해서 아름다운 유산을 만들어 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 내 고집과 내 생각과 주시고 내 기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우리가 남길 유산이 무엇인가를 돌아보며 부끄럼 없는 믿음의 조상들로 세워질 수 있도록 고난의 때에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수 있는 주님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김형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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