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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에 참예하는 자 (고후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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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에 참예하는 자 (고후 1:3~11)
 

SBS 다큐멘터리에 방영되어 시청자들의 눈가를 적셨던 박진식(朴振植) 시인은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의 저자입니다. 칼슘이 과잉축적돼 몸이 석회석처럼 굳어 가는 휘귀병인 '각피석회화증' 과 20년간 싸워온 박 시인은 굳어버린 손으로 볼펜잡기도 힘들지만 볼펜을 두 손에 끼고 2년 동안 컴퓨터 자판을 눌러 책을 쓴 것입니다. 석회화증은 폐와 심장까지 위협하고 몸의 절반이 마네킹처럼 굳어지는 불치병입니다. 스무 살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선고가 내려졌지만 그는 벌써 서른이 넘었습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일 수 있습니다. 

9살이 되면서부터 주변의 사물을 붙잡지 않고는 일어나거나 앉거나 눕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산사람이 점점 돌로 변해갑니다. 몸 속에 생긴 하얀 시멘트가 살갗을 뚫고 밖으로 흘러나오는 고통스런 신음 속에서 박시인과 어머니는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울면 내가 더 힘들고 내가 웃으면 내가 덜 힘들고 내가 울면 어머니가 울고 내가 웃으면 어머니도 웃었기에 난 절규하면서도 웃었다". 그 상황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극심한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더라도 자신이 혼자이지 않다고 용기를 내었습니다. 자신 안에 계신 예수님을 떠올리며 미소짓습니다. 아프지만 감사할 수 있는 축복입니다. 그는 열정적으로 피어오르는 청춘을 맛보지 못했지만,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내는 사랑을 배웠습니다. 

예수를 영접한 그는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은 잔인하게 고통으로 뒤덮였지만 마음은 평화와 행복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내일을 알 수 없는 절망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의미를 찾으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는 "죽고 사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사는 날까지 최 을 다할 뿐" 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에 맞서 싸운 자신의 의지와 용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격려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여러 모로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지만 우리는 박시인을 통해 더 이상 절망을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워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순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 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고난에 참여함을 뜻합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애쓰며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이기적이라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합니다. 고난을 모르기에 기분에 민감합니다. 그러나 진정 고난을 겪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며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려 합니다. 이는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다고 증거합니다. 우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될 수 있음은,

첫째로 위로가 있기에

빅토리아 여왕(Victoria, Queen)시절입니다. 신하의 아내가 유산을 한 후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죽음만 생각한다는 소식을 여왕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왕이 그녀를 방문한 이후 여인이 놀랍게 회복되어 삶의 안정을 찾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여왕이 찾아와 무슨 말을 해주었냐고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여왕은 제 손을 잡고 꼭 한마디 말만 하셨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어떤지 내가 알아요". 그런데 그 한마디의 말은 과거에 여왕도 유산한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말이었습니다. 여왕도 과거에 유산의 아픔과 상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은 고난이 혼자만의 고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고난의 아픔이 물러가고 소망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때 우리는 고난에 적극적으로 참예하게 됩니다. 슬픔 속에서 기쁨이 회복될 것입니다. 절망 속에 소망이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 시로다". 여기 '위로하사' 의 헬라어 '파라칼론' 은 위로하심이 중단 없이 계속됨을 뜻합니다. 즉 연속되는 환난과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역설적으로 결합되어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만들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기꺼이 고난에 참예하게 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복음을 증거하다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아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갔습니다. 빌립보에서는 귀신들린 여종을 낫게 해주었다가 고소를 당해 매를 맞고 투옥되기도 했으며 유대인들에 의해 살해당할 위험도 겪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난에 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기에 위로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순간적인 아픔을 치료하는 진통제가 아닙니다. 외적인 상처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도 근본적으로 치료하여 주십니다. 마치 우는 어린아이를 품에 감싸는 어머니 같으며, 용기와 힘을 주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둘째로 소망이 있기에

요한 세바스챤 바하(Johann Sebastian Bach)의 음악은 황무지에 핀 아름다운 한 송이 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릴 적에 부모가 돌아가셨으며 형은 자신을 미워했습니다. 아내 마리아는 일곱 자녀를 남겨 놓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혼하여 열 한명의 아들과 아홉 딸을 두었지만 열명의 자녀가 어려서 죽었습니다. 자녀 가운데 정신 박약아도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바하는 노년에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었고 뇌일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둘째 부인이 죽었을 때는 장례 치를 형편도 못되어 빈민구제를 위한 조치로 치러졌을 정도입니다. 참으로 황무지 같은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바하는 처절한 환경 속에서 작곡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였습니다.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가지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는 장엄한 찬양과 경배의 노래, 불후의 명작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바하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음악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내고 사람에게 즐거운 감정을 솟아나게 하는 것이다." 그는 음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었으며 음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가 구주인 것을 고백하며 황무지 같은 인생 속에서 음악의 꽃을 피웠던 것입니다. 바하는 작곡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의 마지막 부분에 항상 'S.D.G' 라는 글자를 적었습니다.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의 첫 번째 글자들입니다. 또 오르간 연주 작품 첫 부분에는 'I.N.J- In Nomine Jesus(예수 이름으로)'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바하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좋은 음악이 나오게 하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바하야말로 고난에 참여하는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본문 7절입니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바울 역시 고난 가운데서 고린도 교인들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견고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망은 '엘피스' 인데 '강한 확신'을 의미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견고한 소망이 있으면 흔들리거나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자들에게는 위로가 넘치며 소망이 임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로마의 탄압에도 줄기차게 뻗어나가 로마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신앙 때문에 받았던 고난이 도리어 강력한 힘으로 작용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소유하고 전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고난 보다 더 큰 소망을 견고케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발견하여 어떤 고난에도 참예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믿음이 있기에

1634년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고 있었습니다. 독일 남쪽 바바리아 지방에 오버아마가우(Oberamagau)라는 외딴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웃 마을로 돈벌이 나갔던 주민 한 사람이 돌아왔는데 흑사병에 감염되어 있었습니다. 흑사병은 삽시간에 마을 전체로 번졌습니다. 대책 없이 죽어간 무덤 앞에서 마을사람들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저희들을 죽음의 병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면 십 년마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기념하는 연극을 만들어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날 이후 단 한 명도 흑사병으로 죽지 않았습니다. 35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마을 사람들은 약속대로 연극을 만들어 십 년마다 공연하였습니다. 

연극의 이름은 그리스도의 수난극(Passion Play)입니다. 마을 인구는 오천명인데 이천 이백명이 연극에 동원됩니다. 출연료는 없습니다. 아침 9시에 시작하여 점심시간을 빼고는 저녁 6시까지 연극이 계속됩니다. 다섯 달 동안 110번 공연하는데 일년 전에 표가 매진이 됩니다. 혹독한 날씨와 가파른 지형 때문에 농사도 짓지 못하는 마을인데 입장료와 숙박비 수입이 8천만 달러가 넘는다고 합니다. 농사나 짓고 공예품이나 깎아 팔았다면 이름도 없는 시골동네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을 의뢰하지 않고 예수만 높이고 증거 하는 일을 350년 동안 계속해 올 수 있었기에 '오버아마가우' 는 세계의 명소로 소문이 나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뢰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본문 9절입니다.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난 받기 전에는 가치체계가 복잡하였으나 고난에 참예함으로 가치가 자리를 잡습니다. 절망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을 포기하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는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바울은 무엇보다 위로와 구원과 신뢰가 인간의 한계 상황인 죽음 너머로부터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신뢰를 전적으로 포기할 때 하나님께대한 신뢰를 체험하게 됩니다. 

고난이 많은 세상입니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고난 속에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과 믿음이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에 참예한 자가 되어 고난이 유익이 되는 복을 얻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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