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순절] 하나님을 감동시킨 최고의 예배 (창 22:1~3,13)

  • 잡초 잡초
  • 254
  • 0

첨부 1


하나님을 감동시킨 최고의 예배 (창 22:1~3,13)


성경에는 많은 인물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용맹 자 다윗은 성군이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순결 자 욥은 티 한 점 없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한결같은 신앙 자 에녹은 300년을 하루같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사람입니다. 신앙의 충신 다니엘은 숫한 모함과 위협과 사자 굴에 던져져도 눈 하나 가딱하지 않고 하나님께 일편단심의 마음을 드렸습니다. 어찌 그들뿐이겠습니까. 아브라함도 빼놓을 수 없는 신앙의 위인입니다. 아브라함의 일생 중에서 가장 극적인 모습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대목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해서 몇 가지 분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아브라함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이고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하란에서 촌로로 살아갈 때 하나님으로부터 75세 나이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너는 이곳을 떠나라, 내가 네 자손에게 복을 주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복중의 복은 선택받음의 복입니다. 그 많은 부족들과 유목민들이 있었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기적 같은 복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 아이를 바라보는 행복, 키우는 기쁨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래도 가장 행복한 삶은 가정의 행복이고 자식을 키우는 행복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의 삶의 전부였더라면 오늘 성경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다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삶은 극히 일상적인 삶입니다. 지금 이런 상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다수 입니다. 이런 삶이 1차원적인 삶입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아브라함은 2차원의 삶이 시작됩니다. 하루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그 말은 사랑하는 독자 아들을 죽여 각을 떠서 제물로 바치라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헛소리를 들은 줄로 착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눈앞이 캄캄했고 황당해 했을 것입니다. 열개 중 하나를 바치라 하면 그렇게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돈을 얼마 바치라 했으면 기쁘게 바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100세에 겨우 얻은 그 아들을 잡아서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현실이었고 분명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결단해야 합니다. 명령에 순종하든지 거역하든지 해야 합니다. 이 결단은 자기부정을 해야 할 수 있는 결단이고 다 포기하고 부정해야 순종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렇게 보면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일은 그리 만만치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에는 상당한 수고와 땀과 눈물과 아까움과 내놓고 싶지 않음이 언제나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고민과 갈등과 주저함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 얻은 아이를 내 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정한 예배는 그것을 내 놓아야 예배가 됩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마음으로 해야 그것이 진정한 예배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결단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결단할 시간이 3일간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아들을 바치라는 장소까지 가는데 3일이 걸렸습니다. 그 3일간의 시간은 아브라함의 피를 말리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3일간의 시간”, 아무리 생각해도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조석으로 생각이 변했을 것입니다. 거역하자니 준엄한 하나님의 명령이 기다리고 바치자니 아까움이 사무쳐 왔습니다. 그러나 결단해야 합니다. 

그때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 아내와 상의한 흔적이 없습니다. 아내와 상의했으면 결단에 더 장애가 주어졌을지 모릅니다. 혼자 고민하다가 마침내 아브라함은 아이를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출발합니다. 짐꾼을 시켜 불 피울 장작을 메우고 아이를 걸리고 3일 길을 가는 동안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드디어 목적지가 가까워 오자 아이가 물었습니다. “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준비하시리라(8).” 또 침묵이 흘렀습니다. 도착해서 제단을 만들고 장작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이를 결박해 놓고 칼을 빼 들었습니다. 이 대목이 하이라이트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잡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해서 모든 것을 부정하고 순종하기 위해서 100세에 얻은 아들에게 칼을 댑니다. 대단한 용기입니다. 대단한 믿음이고 대단한 순종입니다. 그래서 그가 비로소 아브라함이 되었고 믿음의 아버지가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어제 밤에 “교회를 건축해야 하겠으니 집을 팔아 바치라”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개중에는 “굳이 교회를 크게 지어야 하느냐, 경기도 어려운데 교회를 꼭 건축해야 하느냐”는 말도 있다는데 “집을 팔아 바쳐라”는 꿈을 꾸었다면 오죽 고민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여기 아브라함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그때 “아브라함이 아이를 결박하고 칼을 빼 들었다”고 했습니다. 시늉이 아니고 아이를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죽이려고 칼을 빼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 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12-13)” 여기서 몇 가지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시험 

1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보자” 하고 시험하셨다는 말입니다. 처음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받고 의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명령은 하나님답지 않은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그런 명령을 하실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은 인신제사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금지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피 흘리는 것을 싫어하시며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셨습니다(9:4-6) 또 이삭은 거듭된 약속과 맹세 속에 태어난 아이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그 아이를 잡아서 제물로 바치라 하십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도저히 하나님답지 않은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아브라함은 순종하기로 결심을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내 이성으로 이해가 안 되지만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명령이었기에 후에는 이해될 줄로 믿고 실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내 이성으로는, 내 지성으로, 내 생각으로는 전혀 납득이 안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명령이 틀림없습니다. 고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스펄전은 성경을 읽다가 납득이 안 되거든 이해가 안 된다고 불신하지 말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일단 수용하고 순종하고 믿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내 신앙이 더 성숙한 이후에 때가 되면 이해될 시간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가장 좋은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태도는 아주 건실한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석자는 이 대목을 설명하기를 “아브라함의 초이성적 순종”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인정에 넘치는 부성애를 믿음의 힘으로 억제하고 떨리는 손으로 이삭을 제단위에 올려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때로 역설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사랑하는 자에게 가장 혹독한 시련을 주시기도 합니다. 또 하나님은 때로 세상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을 불러서 가장 영광스러운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가장 좋은 것 요구 

하나님이 10개중 하나를 달라시면 아낌없이 고민 없이 바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100세에 겨우 얻은 아들을 그것도 잡아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제물도 그냥 제물이 아니고 번제입니다. 번제는 짐승을 잡은 후 각을 떠서 불에 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화제를 말합니다. 집에는 하나님께 드릴 짐승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 굳이 사람을 제물로 드리라면 집에 종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또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요구였습니다. 그래서 고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첫 새끼를, 첫 열매를, 첫 아들을 요구하십니다. 그 말은 가장 귀한 것을 요구하신다는 말입니다. 첫 열매가 얼마나 귀합니까. 첫 열매는 의미가 귀합니다. 첫 자식은 열자식 가운데 뭔가 다릅니다. 생각이 다르고 책임감이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가장 귀한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여기서 본문이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장차 있을 예수의 제물 되심의 그림자로 이삭을 출현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장차 독자 예수를 제물로 내놓아야 합니다. 독자 예수를 제물로 내 놓아야 할 그 때의 속이 까맣게 타 버린 그 심정을 하나님은 미리 이 세상에 알리고 있습니다. 귀한 것을 내 놓을 때의 아픔과 고뇌를 이 세상에 알려서 예수를 제물로 내 놓아 죽이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으로 가기 위해서 3일 길을 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3일을 가야 제물을 바칠 장소에 도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당장 바치라 했으면 좀 결단이 쉬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3일의 시간”, 그 시간은 고문 받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가 십자가에 제물로 달렸을 때 아브라함이 받은 고문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아들이 비명을 지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죽어 무덤에 묻혀 3일간 암흑 속에서 지냅니다. 그 3일간의 시간이 하나님께는 가장 큰 아픔이었고 긴 고문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지다구라라는 신학자는 그 하나님의 아픔을 “아픔의 신학”이라고 풀이했습니다.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함부로 입에 담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마침내 모리아 산에 도착하여 주저하지 않고 결심한 대로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의 행동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아이를 죽이지 말라,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이제야 알겠다, 준비한 양이 있으니 그 양을 잡아 제물로 드리라.” 그래서 뒤를 보니 이미 양이 준비되어 있어 그 양을 잡아 이삭 대신 제물로 바쳤습니다. 여기 갑자기 나타난 그 양은 이다음에 나타날 제물 되시는 예수의 모형이고 그림자입니다. 그 양이 대신 죽음으로 이삭을 살려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죽음으로 오늘 우리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창세기에서 이미 예수를 죽이심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십자가의 모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요구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복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아브라함이 결국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합니다. 그리고 전무후무한 복을 약속받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을 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16)”    


아브라함의 감동의 예배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그날 모리아산에서 최상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또 이 세상에서 가장 만족한 제물을 받으셨고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들이 놓치기 쉬운 대목이 숨어 있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의 전후 문맥을 잘 살펴보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대목이 하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결박하고 칼을 빼들어 아들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성경을 보면 이삭이 순순히 응한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른인 아버지가 아이인 이삭을 결박하고 꼭 잡고 죽이려 했으니까 아이는 꼼짝 못하고 죽으려 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그렇게 이해합니다. 그런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 가 128세의 노인이었고 이삭의 나이 28세의 청년이었다고 말합니다. 청년이고 장정인 이삭이 얼마든지 힘으로 늙은 아버지를 밀치고 도망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 상황에서 자신이 죽어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이 아버지에게 주신 명령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이삭은 가만히 죽어 제물이 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아버지의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마음과 아들의 순종하려는 자발적인 두 마음이 합해서 그날 최상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억지로, 하품하며, 졸며 드려지면 의미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강요와 어머니의 성화에 의해서 그리고 어려서부터 믿어왔으니 안 믿을 수는 없고 믿자니 귀찮고 그래서 억지로 나와 앉아있는 믿음이 진정한 예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배는 자발적 행동이어야 하고 자발적 순종이어야 하고 전적인 헌신의 머리 숙임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 나타난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마음은 의심할 것 없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아낌없이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28세난 힘이 왕성한 이삭은 자신이 제물 되어야 한다는 더 높은 뜻을 발견하고는 순순히 순종해서 죽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 두 마음이 합하여 그날 인류 최대의 진정한 감동의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족한 마음으로 아브라함에게 복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네가 아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을 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게 하고 .. 네 씨로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 세상에서 진정한 것은 다 이런 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거기에 희생과 수고와 봉헌과 죽임 당함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감동이, 향기가, 깊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좋은 작품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어느 날 쉽게 만들어진 작품이 아닙니다. 

어느 신참 미술가가 작품을 만들어 내 놓아도 팔리지 않자 미술의 대가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까, 내 작품은 만드는데 한 3-4일 걸리는데 팔리는 데는 3-4년 걸립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대가는 “작품을 만드는데 3-4년 걸려 만들라, 그러면 팔리는데 3-4일 걸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수는 발칸산맥에서 한밤중 12시에서 2시 사이에 핀 장미꽃에서 추출된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료는 병든 고래의 몸에서 얻어지고 값이 비싼 약재인 우황도 병든 소에서 추출된다고 합니다. 

가장 향기로운 예배는 평안하고 쉽게 그리고 간단히 졸면서 드려지는 그런 예배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예배는 아들과 함께 자발적 행동과 고민을 통해서 마침내 결단하고 순종하여 이루어진 예배였습니다. 이삭의 사건은 예수 탄생 2천 년 전에 ( BC 1870년경)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

런데 하나님은 이삭의 사건이 있은 지 2천년 후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그 모리아 산상에서 이번에는 예수를 다시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사후 2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이 두 사건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고난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 같은 신비함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아브라함이 드렸던 진정한 향기로운 예배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정익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