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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시 2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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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시22:1~11)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도 구약 성경에 나타난 십자가에 관해 살펴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주로 사건들을 통해 십자가를 예표했습니다. 지난 주일 살펴본 마라의 한 나무(출애굽기 15장), 그리고 유월절 어린 양(출애굽기 12장) 등이 그런 예들입니다. 그런데 성경 인물을 통해 십자가를 예표하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이삭, 모세, 요셉 등의 생애를 통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예표합니다. 다윗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적 조상이죠.(마1:1 참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실 때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동시에 다윗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그의 삶을 통해 미리 보여줍니다. 말하자면 다윗은 예수님에 대한 ‘예표적 인물’인 셈입니다. 


[1] 메시야 예언 :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 

다윗은 시편을 여럿 기록했는데, 그 중에 ‘메시야 시편’(Messianic Psalms)이란 쟝르를 통해 예수님에 관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메시야 시편은 다윗이 자기 개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장차 오실 메시야를 예언한 시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메시야는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는 헬라어입니다. 둘 다 같은 뜻이죠. 문자적인 의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데, 쉽게 생각하면 ‘구세주’입니다. 

메시야 시편은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시편 22편입니다. 얼른 봐도 메시야 시편인 것을 알 수 있죠. 1절 첫머리를 보십시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 ” 많이 듣던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가상 칠언(架上七言 Seven Sayings on the Cross) 중의 하나입니다. 가상칠언은 십자가 상에서 하신 일곱 말씀으로, 1절 말씀은 그 중의 제4언과 일치합니다. 마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다윗은 여기서 1차적으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지만, 2차적으로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예언한 겁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 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다윗에게 영감을 주신 겁니다. 

시편 22편을 잘 살펴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 보면,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시22:1의 예언은 마27:46에서 성취되었습니다. 다윗은 B.C. 10세기 때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1천년 전입니다. 그 긴 시간의 간격을 넘어 그가 기록한 예언의 말씀이 정확하게 성취된 것입니다. 

다른 구절들도 분석해 보면 예언과 성취가 얼마나 정확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발견하게 됩니다. 시22:6~8의 예언은 눅23:35에서 성취되었습니다. 6절~8절.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이 말씀을 눅23:35 말씀과 비교해 보십시오!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마치 옆에서 보고 스케치한 것처럼 정확합니다. 다음 몇 구절을 더 보면 정말 기가 막힙니다. 

시22:15의 예언은 요19:28에서 성취됩니다. 시22: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 ” 요19:28 “그 후에 예수께서...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목이 말라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입니다. 온 몸에 수분이 마르고,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은 상태입니다.

시22:16의 예언은 요19:34에서 성취됩니다. 시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여기서 개들은 이방인을 가리키는데, 요19:34를 보십시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 ” 로마 군병들이 창으로 찌르는 장면입니다. 

시22:18의 예언은 요19:24에서 성취됩니다. 시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요19:24 보면 기가 막힐 정도입니다.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1천 년 전에 다윗이 기록한 내용이 하나도 아니고 구구절절 예수님에게서 정확하게 성취된 것입니다. 이런 예언과 성취의 과정을 보면, 성경이 정말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인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2] 메시야의 극한 고통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은 다윗의 예언대로 십자가 상에서 극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 고통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절규로 나타난 겁니다. 


① 예수님의 고통 : 육신적, 정신적, 영적 고통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과정을 통해 당하신 고통이 얼마나 처절했을까 아무리 우리가 상상해도 충분하지 못합니다. 육신적 고통, 정신적 고통, 그리고 영적 고통 등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육체적 고통은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서, 밤새 고문을 당하시고 고통을 당하신 것으로부터 다음 날 새벽 빌라도에게 끌려가 재판 받고 채찍질 당하신 것, 못 박히고, 창에 찔리고,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기까지 온 몸을 꿈틀거리며 고통당하신 것 등입니다. 

흔히 예수님의 고통을 육체적인 것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 이상으로 정신적 고통이 있었습니다. 정신적 고통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며 고통 받으신 것, 제자들에게 배반당하신 것, 원수들의 조롱, 흉악범의 사형 틀인 십자가에 달리는 수치, 따르던 자들과 이별하는 아픔,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두고 죽는 아픔 등입니다. 


② 영적 고통 : 죄로 인한 단절 

그런데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영적 고통이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입니다. 인간과 단절되는 고립감도 큰 고통이지만, 그보다 하나님과 단절되는 영적 고립감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런 영적 고통이 있었을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죄로 인한 단절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후 모든 고통을 침묵으로 참아내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대속의 제물이 된, 다시 말해서 죄 덩어리가 되신 순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신 겁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지만, 성경을 잘 살펴보면 조금이나마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어떤 관계이십니까? 요10:30 “나(=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삼위일체의 관계요 완전한 연합 관계입니다. 얼마나 친밀한 관계인지 막14:36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 ” 예수님이 하나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친밀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로부터 외면당하신 겁니다. 왜 그랬나요? 대신 담당하신 죄 때문입니다. 

사59:2 보면, 죄가 하나님과 관계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설명합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놓습니다. 영적인 단절, 이게 곧 영적인 사망입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 ” 죄의 결과는 영적 사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는 겁니다. 그로 인해 육적인 사망도 오고, 마지막 영원한 사망 즉 지옥의 형벌도 주어집니다. 

하나님과 단절되는 영적 고통이 얼마나 큰지, 그 고통을 참다 참다 절규를 하신 겁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다시 1절~2절을 봅니다.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 말씀은 다윗이 원수들에게 고통당하는데,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고 외면하는 것 같아 고통스러워서 절규한 겁니다. 더 나아가 그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고통을 예언한 겁니다. 

이 말씀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나 예수님이 하나님을 원망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건 아니죠. 전적인 오해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나는 메시야 아냐!” “나 하나님의 아들 아냐!” 이렇게 말하고 내려오면 됩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을 고소한 유대 인 종교 지도자들이 바라던 바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스스로 그 고통을 감내하신 겁니다. 그것을 아시고 참고 참으시지만, 너무 고통스러워서 절규하신 겁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어린 아이가 심각한 병에 걸려 수술실에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울부짖습니다. “아빠, 나좀 도와주세요.” 아빠가 도와줄 게 없죠. 그냥 수술실에 혼자 들어가서 수술 받는 게 상책이죠. 매정해도 할 수 없습니다. 아이도 그 사실을 잘 압니다. 그러나 너무 무서우니까 몸부림치는 겁니다. “아빠, 왜 나를 수술실에 들어가게 하는 거예요? 아빠, 미워!” 이건 결코 원망이 아닙니다. 고통의 절규요, 역설적인 순종입니다. 

이 예언이 성취된 구절을 다시 찾아보면, 마27:45~46 말씀입니다.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 ” 여기서 주목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사방에 깔린 어둠입니다. 그것은 모래 폭풍도 아니고, 일식도 아닙니다. 그 때는 유월절이었는데, 시기적으로 그런 일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 어둠은 하나님의 이적(sign)이었습니다. 제6시는 정오, 제9시는 오후3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은 제3시 즉 오전 9시인데, 3시간 후 정오부터 운명하실 때까지 3시간 동안 어둠이 깔린 겁니다. 그 어둠 속에서 홀로 고통당하신 예수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고통! 그것은 지옥의 예고편이요, 죄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성경 보면, 하나님은 빛이라고 했습니다. 요일1:5 “ ... 하나님은 빛이시라 ... ”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빛입니다. 요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여러 가지 특징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빛이 가득한 곳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빛이고 예수님이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계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반대로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어둠이 가득한 곳입니다. 마8: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지옥은 어두울 뿐만 아니라 완전한 단절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농담 삼아 지옥에 가서 함께 어울리면 괜찮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독방에 갇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과 교제가 전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사람과의 단절도 고통이지만,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이야말로 고통의 극치입니다. 게다가 거기서 벗어날 소망이 전혀 없는 절망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절규하는 순간 지옥의 어둠을 우리 대신 경험한 겁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 죄가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의 햇살을 가렸다. 심지어 우리 죄가 그리스도를 지옥의 어둠으로 보냈다!”(존 스토트)

이게 바로 십자가 대속입니다. 우리가 당한 고통을 예수님이 대신 당하신 겁니다. 대속의 원리를 잘 설명해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미 정글에 서식하는 ‘피란하’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이들은 늘 떼로 몰려다니는데, 이빨이 면도날처럼 날카롭고, 주둥이 힘이 아주 세기 때문에 짐승이든 사람이든 덤벼들어 뜯어 먹습니다. 아주 잔인한 물고기이죠. 그래서 ‘피란하’가 살고 있는 강에는 사람이나 짐승이 빠지게 되면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그런 지역에서 목동들이 가축을 이끌고 강을 건널 때 이렇게 한다고 합니다. 먼저 양이나 짐승 한 마리를 희생 제물로 강에 던집니다. 그러면 피란하가 금세 모여들어 그것을 잡아먹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 틈을 이용해서 가축들을 무사히 강 건너로 이동시킵니다. 수많은 가축이 한 마리의 희생양 때문에 살 수 있는 겁니다. 


[3] 나의 신앙 결단 : 구원과 영생의 확신, 임재와 승리의 확신

우리는 오늘 시편 22편에 예언된 예수님의 고통, 특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절규에 나타난 대속의 고통을 보면서 어떤 신앙 자세를 결단해야 할까요? 

① 구원과 영생의 확신 :

무엇보다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고 영생을 얻었다는 확신이 중요합니다. 사순절이나 고난 주간에 자칫 잘못하면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감상적으로 흘러버리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극한 고난을 당하시는 것을 생각하면서 불쌍히 여기는데, 사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한 죄인 내가 정말 불쌍한 겁니다. 무엇보다 죄인이었던 내가 죄와 사망에서, 지옥의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받았음을 확신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때때로 우리의 삶이 고단하고 힘들 때도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다윗은 고통 중에도 고백합니다. 10절.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그는 아무리 현실이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예수님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하나님인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견고한 관계를 확신해야 합니다. 영생이 바로 그런 겁니다. 요17:3 보면, 영생의 정의가 나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알다’(know) 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기노스코’(γινώσκω)인데, 이는 단순한 관념적 지식이 아니라 체험적 지식 즉 연합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부부가 동침하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보면(마1:25 참조) 어떤 뉘앙스를 가진 단어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영생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단절되는 고통을 대신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이는 우리의 영적 생명이요, 지금부터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천국까지! 영생이란 그냥 영원히 사는 게 아닙니다. 혹은 나중에 천국 가서 사는 게 아닙니다. 믿은 후부터 즉시 하나님과 함께 영적 연합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기쁨을 영혼 깊숙이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② 임재와 승리의 확신 :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해 주심, 즉 임재를 확신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에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다는 승리의 확신 가져야 합니다. 

다윗은 극심한 고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부르짖습니다. 시22:19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이러한 확신을 놓치지 않았을 때 마침내 다윗은 승리합니다. 예수님도 극한 고통 중에도 여전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겁니다. 십자가 위에서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만 바라보며 의지합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믿음입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 때때로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고난이 올 때, 혹은 고난이 너무나 오래 지속된다고 느낄 때, ... 우리는 이렇게 외칩니다. “하나님! 당신은 정말 계십니까?” “하나님! 당신은 나를 버리신 건 아닙니까?” “내가 이토록 고통스러워하는데, 당신은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 한 순간도 하나님은 우리 곁을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천국 갈 때까지, 천국에서도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혹 지금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이 나를 떠나신 것 같은 느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느낌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십니다.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는 영적 고통을 대신 경험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절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거나 소외되지 않습니다. 단 한 순간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먹구름이 내 머리 위로 가득 덮여 있다 할지라도 그 위에 금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태양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 원로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교계에서 존경받는 어르신인데, 20년 전인 50대 시절에 위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한 마디로 청천벽력 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건강했으니까 병환 중에 있는 성도들을 심방하고 위로하며 기도해 주었습니다. 때로는 성도들에게 두려워 말고 믿음으로 이겨내라고 다그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가 그런 입장이 되니까 낙심천만이었습니다. 한참 동안 기도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런 자신이 얼마나 한심스러운지 “내가 믿음이 있나” 탄식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이 여전히 함께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부르짖었습니다. 결국 승리했고,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임재의 확신은 이렇게 어렵기도 하고 중요한 겁니다. 

바울의 위대함이 여러 가지지만, 이런 임재의 확신이 정말 위대한 것입니다. 그는 암담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고후1:9~10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이와 같은 확신으로 바울은 숱한 고난을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신적으로 무조건 잘 되는 것만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승리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보면, 스데반 순교 사건이 나오죠. 스펄전 목사가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하는데,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대뜸 질문을 했습니다. “아니, 스데반이 피투성이 되어서 죽어갈 때 하나님은 도대체 뭐 하신 겁니까?” 당돌한 질문에 황당했지만 잠시 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때 스데반이 원수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용서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정말 멋진 대답이었습니다. 그런 위기에서 살아나는 것도 승리였겠지만, 순교하면서 예수님처럼 원수를 위해 기도하며 평안히 죽을 수 있었던 것도 엄청난 승리입니다. 실제로 그 현장에 있던 핍박자 사울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지만, 이때 이미 일격을 당한 겁니다. 그가 바로 사도 바울 아닙니까?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기독교회는 바울을 얻은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다윗의 예언은 천 년을 넘어 십자가 상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 외침은 이제 또 다시 2천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우리의 귓전에 울리고 있습니다. 이 사순절에 이 말씀을 마음 속 깊이 되새기면서 구원의 확신과 승리의 확신으로 당당히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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