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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앞에 서 있다면... (행 10: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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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서 있다면... (행 10:23∼33)


대만의 한 청년이 어떤 처녀를 열정적으로 짝사랑했답니다. 한 번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짝사랑을 하는 처녀에게 편지만 줄기차게 보냈는데 2년 동안 무려700통의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것이 기네스북에 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러브레터 사상 세계 최고의 기록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편지를 보냈는데도 이 청년은 그 처녀와 결혼을 하지 못했답니다. 결국 그 편지를 받은 처녀가 누구와 결혼한 지 아십니까? 편지를 전한 우편배달부와 결혼했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감정이 충만하고 매일 그 마음을 글로 전한다 해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랑이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고 시작 되었지만 그 편지를 전해주려고 본의 아니게 매일 만났던 우편배달부와 정이 들었고 결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심리학에서 하는 말 가운데<단순 노출 효과(Mere exposure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이 존크]라는 사람이 사용한 개념인데 무슨 이야기냐 하면 어떤 사람을 자주 보기만 해도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는 가설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특히 사람이란 자주 보면 정이 들고 자꾸 만나다 보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말씀 드린 배달부와 결혼한 처녀의 이야기가 이런 경우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다른 말로는<에펠탑 효과(Eiffel Tower Effect)>라고도 합니다. 

1889년 3월 31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프랑스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에펠탑을 건립했습니다. 그런데 탑이 세워지기 전 건립계획과 설계도가 발표되었을 당시 파리의 예술가들과 시민들은 탑 건립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고 합니다. 시민들은 거대한 철제구조물이 고풍스러운 파리의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시인[베들렌]은 흉측한 에펠탑이 보기도 싫다면서 에펠탑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고, [모파상]은 몽소 공원에 세워진 자신의 동상이 에펠탑을 보지 못하게 등을 돌려 세워놓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또한 에펠탑 철거를 위한<300인 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지금 에펠탑은 천박한 흉물이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파리의 명물이 되어 있습니다. 세계의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매력 있는 구조물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가만히 보면 파리의 시민들이 눈만 뜨면 장대한 탑을 보아야 했고 보다 보니 정이 들고 점점 에펠탑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에펠탑 효과(Eiffel Tower Effect)>라고 부른답니다. 

이 효과를 가장 잘 이용하고 하고 있는 현대의 분야가 바로 광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똑 같은 광고를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보거나 듣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리면서 따라하게 되고 그 물건을 선호하게 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지요. 희한하게도 15초의 짧은 시간이지만 갓 난 아기들도 텔레비전에 광고가 나오면 주목하는 것을 보면 그 효과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만하지 않습니까? 

하여간 그렇습니다. 어떤 대상이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사람들은 그 대상에 대해 점차 우호적인 반응을 갖게 됩니다. 혹시 내가 살아가는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먼저 관계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 인간관계에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서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이 낯설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이 낯설거나 하나님이 어색하다면 이거는 보통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지속적인 만남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 봅니다. 만남도 여러 가지입니다. 만나서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하는 속담이 있는데“천생연분에 보리 개떡”이라합니다. 아무리 천한 사람도 다 제 짝이 있어 보리 개떡을 먹을망정 의좋게 산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다 이렇게 만나서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래보나 저래보나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만났습니다.‘어떻게 저 두 사람이 만나서 부부가 되었을까?’싶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제야 말씀입니다만 우리교회에도 제가 처음 만났을 때 깜짝 놀란 부부가 몇 쌍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보니까‘역시 저 두 사람은 잘 만났구나.’싶은 사람들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처음에는 제가 세상적인 눈으로 봤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눈으로 봤더니 그렇게밖에 평가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차차 보는 눈을 바꿨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믿음의 눈으로 봤더니 그렇게 잘 어울리는 부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저 두 사람이 만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할 뻔 했을까’싶은 분들이 여기에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저 평범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면으로만 봤더니 세상에 안 어울리는 어색했던 부부가 영적인 눈으로, 신앙적인 눈으로, 믿음 안에서 봤더니 세상에 더 없는 아름다운 부부로 보이는 신비가 있더란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 안에서의 만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더란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만남도 귀한 만남이 되고 의미 있는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을 보면 참으로 어색한 두 사람의 만남이 있습니다. 어쩌면 만나서는 안 될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아니 일생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사람들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고넬료]라고 하는 로마 군인인데 지금 이 유대 땅에 와있습니다. 무슨 상황입니까? 로마가 유대를 점령했고[고넬료]는 점령군의 백부장장교로 와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지배를 받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이 점령군 장교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저 어떻게 해서든지 안 만났으면 좋겠고 제발 없어졌으면 좋을 사람 아닙니까? 

그리고 또 한 사람은[베드로]라고 하는 점령지의 초라한 어부이자 평민입니다. 사회적 지위로 말한다면[고넬료]와[베드로]는 비교자체가 안 됩니다. 그래서 만날 이유도 없고 어쩌면 한평생 안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두 사람이 만나게 됩니다. 당시 유대사람들에게는 남다른 종교적 우월감이란 게 있었습니다. 비록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는 어렵지만 종교적으로는 이방사람을 멸시할 만큼 우월감을 가졌습니다.‘비록 우리는 이렇게 어려운 고난의 길을 가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너 같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종교적 우월감이 꽉차있었습니다. 자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오늘 본문에 만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있겠습니까? 당시로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희한한 일이지만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두 사람이 만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두 사람이 가진 몇 가지의 공통점입니다. 

첫째는 두 사람이 다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는 당연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지만 문제는 로마사람인[고넬료]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행10:1절부터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2절입니다.“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그랬습니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치적으로는 이 땅을 지배하고 있지만 그 정치적 우월감이나 교만을 다 버리고 피점령국가의 종교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같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것이 공통적이요, 

또 하나는 이 두 사람이 다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고넬료]도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고[베드로]도 비록 여행 중에 있지만 시간을 정하고 지붕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끼리는 영으로 통하고 기도를 통하여 만나는 겁니다. 이것을 영적인 교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만나게 해주십니다. 보세요. 이 두 사람이 기도를 했는데 둘 다 하나님이 보낸 천사를 만나서 지시를 받습니다.[고넬료]에게는“욥바라는 곳에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데려오게 하라”고 지시하셨고,[베드로]에게는“두 사람이 너를 데리러 오거든 아무소리하지 말고 따라가라.”고 지시합니다. 두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었고요,

그리고 또 한 가지 공통점은 기도응답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당시 상황이라면 베드로가 로마사람의 집에, 더구나 로마군인집에 들어가서 숙식한다는 것은 생활풍습과 전통에 따라서 절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하라는 것입니다. 또[고넬료]의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신분이나 위치로 볼 때 무엇이 아쉬워서 베드로 같이 촌티 나는 어부를 자기 집에다가 부르겠습니까? 자기 체면이 있는데...그러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합니다. 

이[고넬료]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믿음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굉장히 체면 따지거든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자식 같다고 생각하면서 순종 잘 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체면이 깎인다나요.. 왜 순종하는 것이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갑니다만 하여간 그렇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오늘[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이 정말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본문25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자기 집에 들어서자마자 넙죽 엎드려서 절을 합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인간 베드로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는 모습니다. 베드로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이 사실은 베드로가 엎드린 고넬료를 얼른 일으키면서“나도 사람이라”고 하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것이<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옳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이고 기도응답을 받은 사람이고 응답 받은 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고 보니 생전에 만날 일도 없고 만나선 안 될 사람들도 만나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 안에서 만나게 되고 마음을 열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신앙적 인격이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임재의식으로 살고 하나님을 보고 사람을 봅니다. 비록 사람에게 듣고 있어도 하나님께 듣는다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기도응답을 받고 오늘을 살아가는 인격이 신앙적 인격입니다. 손에 쥐는 것을 보고 사는 사람이나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사는 사람은 평범한 수준의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을 봅니다. 다른 사람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다른 사람이 잡지 못하는 것을 잡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신앙을 너무 추상화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고넬료]의 신앙은 구체화되는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베드로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구체적인 신앙의 모습니다. 지금은 이론적으로만 충분히 습득해 놓고 나중에, 나이 많아서 체면이 좀 수그러들면 하는 게 아니라 지금 뭘 해야 되는지를 생각해야합니다. 

오늘 내가 할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서 있는 사람이 정말 고민해야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다면 구체적이고 아주 현실적인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일을 생각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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