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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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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사랑이라는 단어만큼 자주 쓰여지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말이 얼마나 더 많이 있을까요?   사랑에는 다양한 의미와 내용이 있지만 이 세상에 변함이 없는 사랑이란 가능할까요?  ‘사랑’ 하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리고 시와 노래와 소설과 드라마와 영화의 소재가 되는 대부분 남녀간의 사랑이 항상 아름답고 애틋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온 천지를 불태우려는 듯 맹렬하게 타오르다가 어느 사이에 그 기운을 잃고 매캐한 연기만 내고 서로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랑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죽기살기로 좋아하다가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실망스런 부분이 드러나면 금새 시큰둥해지고 언제 사랑한다고 했더냐는 듯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엉터리 사랑도 많습니다.   대단히 충동적이고 계산적이며 이기적이고 변질되기 쉬운 사랑입니다.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숭고하고 거짓이 없는 사랑은 뭐니뭐니해도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버지들 보다는 어머니의 사랑이 상대적으로 깊고 지속적입니다.   혹시 아니라고 반대하는 아버지들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어머니 사랑이 아버지들보다는 더 애틋하고 희생적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모성애를 통해 희미하게나마 그 사랑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부활절을 3주 앞두고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지나고 있는 오늘 아침에 요한복음에서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찾아보기로 합니다.   그 사랑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끝까지 변함 없는 사랑이고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 더 간절하게 표현되는 거룩한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오늘 본문 한 절의 말씀 속에 충분히 담겨있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신 주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처럼 예수님의 생애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체 21장 가운데 거의 절반에 가까운 분량을 주님의 생애 마지막 한주간에 일어난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점에서 다른 복음서들과는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제자 요한은 십자가 죽음을 목전에 두신 주님이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야 할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그 마음 쓰심과 행동들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33세쯤 되셨을 때 세상을 떠나신 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떠나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젊고 아쉬운 연령입니다.   평균 연령을 살거나 그보다 더 긴 세월을 살다가 떠난다 해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세상에 두고 떠나는 마음은 여전히 섭섭할 것입니다.   그래도 인생을 살만큼 살다 가시는 분들은 우리가 이 다음에 천국에서 만나자 하며 이 땅에 남은 자들을 생각하며 삶을 정리할 여유를 가질 수 있겠지만, 30대 초반의 젊은이로서는 남겨두고 갈 사람들보다는 못 다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아쉬움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에게 집중하다가 떠나기 쉽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하루 앞둔 주님의 행적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의 행적을 살펴보면 큰 은혜가 됩니다. 

요한은 13장 1절을 기점으로 예수께서 남은 시간 동안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지 마치 예수님의 마음 속에 들어가 그 생각을 환히 들여다 보고 있는 사람처럼 매 장마다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정의를 내린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어떻게 정의를 내리겠습니까?   요한의 복음서에 표현된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은 책임 완수라는 말로 바꾸어 말해도 좋을 듯 합니다.   그 책임은 하늘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이며, 그 사명은 하나님이 주신 세상 사람들을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건져내어 생명을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 또는 책임완수는 사랑이 아니고는 감당할 수 없는 너무나 힘들고 무거운 명령이었습니다.    요한은 주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남기신 말씀은 ‘내가 다 이루었다’였다고 증언합니다.   주님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그 모진 마음의 고통과 신체적 고통을 참고 또 참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책임완수라는 관점에서 우리에게 보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주님은 잡히시기 전날 마지막 목요일 밤에 제자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도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대야에 물을 담아오시고는 열 두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모두 씻어주셨습니다.    유대인의 풍습에 잔치 음식을 먹으러 모이는 집 하인들이 손님의 발을 씻어주곤 했는데 그날 저녁에는 그런 대접도 받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제자들 중에 누구 하나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사람은 없었고 선생님의 발조차 씻어주려 나서는 제자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더 큰 사람이냐 서로 논쟁을 하며 신경전 벌이던 제자들이었으니 어느 누구도 동료의 발을 씻기는 일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눅22:24).   

그런데 선생님이신 주께서 먼저 본을 보이셨습니다.   선생님께 자신들의 발을 내 맡긴 제자들은 당황스럽고 송구스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으로서 너희의 발을 씻어 준 것처럼 너희도 서로에게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옳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였다’ 하셨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 사형을 당하실 분으로서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선생님을 떠나 보낼 준비가 아직 안 되었습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아직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내가 높다 네가 높다 서로 힘겨루기나 하고 있는 철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말로서 이해될 상황이 아니기에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심으로 참 사랑이 무엇인지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단호한 어조로 당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 알리라.’   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강조하십니다.    주께서 본을 보이신 행동을 따라 수련회 같은 모임에서 ‘세족식’을 하는 교회들도 많습니다.   물론 문자 그대로 형제의 발을 씻어주는 의식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형제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그의 허물과 약점을 닦아주는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주님이 원하신 형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믿음 좋다 운운해도 예수님의 참 제자로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깨끗하고 흠이 없이 완전하여서가 아닙니다.   만일 좋은 조건을 보고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과연 몇 사람이 그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을까요?    외모가 뛰어나서, 재력이 있어서, 선행을 많이 해서, 남보다 기도를 많이 해서, 믿음이 뛰어나서?   겉으로 보이는 이 모든 조건들은 그저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나의 미모가 출중해도 더 잘난 사람이 있고, 나보다 더 재물이 많은 사람이 항상 있기 마련이고, 나보다 선행을 더 많이 하는 사람이 있으며, 기도를 더 많이 하는 사람, 믿음이 더 큰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외적인 조건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가진 그럴듯한 조건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말씀한 적이 없으십니다.    다만 ‘아직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실히 증거하셨다’(롬5:8) 하셨습니다.   내가 무슨 선하고 기특한 일을 해서 하나님 마음을 나에게로 돌려놓았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내 믿음이 남보다 뛰어나서 나를 자녀로 삼아주셨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더니 나를 구원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 큰 착각이고 넌센스입니다.   그 사랑은 내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0,11)  

물론 사람에 따라 연약한 믿음이 있고 크고 든든한 믿음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어떤 이에게는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느냐?’ 하고 책망하셨는가 하면 ‘네 믿음이 크도다’ 하고 칭찬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큰 믿음 작은 믿음의 분량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믿음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어리고 작은 믿음일지라도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심을 고백하는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합니다.   

어른들이 볼 때에 저 어린 아이가 뭘 알고 기도하는가 하여 가볍게 여기고 작게 보이는 어린아이들의 순수하고 소박한 믿음이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게 하는 참 믿음이 됩니다.   그래서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을 볼 수 없다’ 하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믿는 부모들은 자녀의 믿음을 위해 신앙훈련을 소홀히 여기지 말기 바랍니다.   부모는 주일 아침에 교회 나오면서 아이는 교회에 가든지 말든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부모들은 꼭 기억하십시오.   나중에 자기들이 스스로 알아서 판단하도록 맡기겠다고 하지 말 것은 그런 방관 자세 때문에 어른이 되어도 예수께 대한 분명한 믿음이 없이 수 십 년을 허송세월하며 살아왔다는 고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부르신 것은 우리 믿음이 다른 사람보다 뜨겁고 확실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 밖에는 나의 소망이 없고 나의 구원이 없다고 겸손하게 낮아지는 작은 믿음을 보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유초등부 어린아이들도 이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음을 무심코 지나치지 마십시오.   아직은 작은 믿음이지만 그 믿음이 어린이를 하나님 자녀로 살게 합니다.   어린아이의 믿음으로 천국 시민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놀랍습니다.  그러나 어린 믿음은 자라면서 큰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어린아이 적 믿음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왜 큰 믿음이 있어야 할까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새 생명을 얻은 후 계속하여 성장합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젖을 먹고 그 다음에는 단단한 음식을 먹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더 자라서는 어려운 일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고 씩씩하게 맞서는 것처럼, 영적 아기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날마다 성장하여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씩씩하게 헤쳐나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 사람은 그냥 자녀가 아니라 주의 일군입니다.   그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반응하기 마련입니다.   작은 믿음은 그 믿음만큼 반응하고 큰 믿음은 거기에 맞는 삶으로 반응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지막 밤 모임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의 제자로 인정받으려면 서로 사랑하라는 당부를 하십니다.  

아이들은 어릴수록 이기적이고 욕심꾸러기들입니다.   이런 아이들이 못되고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어린아이들의 특성입니다.   맛있는 과자를 주면 한 손에 쥐고 또 한 손을 내밀어 양손에 다 쥐고 두 손이 다 차서 더 이상 움킬 수가 없으면 당황하여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어린아이의 욕심이고 이기심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성숙해지면 비로소 남을 생각하고 이웃을 돌아볼 마음이 생깁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말씀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하면 좋습니다.   

어린 믿음은 언제나 자기 사랑에 도취되어 삽니다.   나만 좋으면 다른 사람이야 어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 기분 내 감정이 우선이고 다른 사람의 감정과 형편은 그 다음이다.   내가 좋으면 다른 사람도 다 좋아할 거라고 확신하고 행동합니다.   하나님 사랑은 물론 가족들 사랑도 독차지 하고 이웃으로부터 나 혼자 사랑 받고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다 조금 성숙하면 그제서야 옆에 있는 형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그 사람의 아픔과 고민을 이해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 서보는 성숙함을 보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누가 더 위에 있고 더 높은 사람이며 영향력이 있는가 그런 것 내세우지 말고 나보다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라고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남보다 믿음 좋다고 자랑하면서 어리고 연약한 믿음의 형제를 무시하거나 우쭐댈 일은 없습니다.   큰 믿음은 그 믿음의 분량만큼 일을 하고 내 앞에 닥친 고난과 싸워 이기며 성숙한 믿음의 본을 보여줘야 진짜 큰 믿음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정말 큰 사랑은 움켜쥐고 독차지하는 사랑이 아니라, 주께서 끝까지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나누는 사랑입니다.   그런 점에서 큰 믿음은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보여지며, 그 사람에게 있는 사랑을 보고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아닌가, 하나님의 사람인가 아닌가 알아보게 됩니다.    

순교자 베드로, 요한, 그리고 다른 모든 제자들이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는 다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었고 어린아이의 사랑을 가졌었습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숨을 내어주며 복음을 전하고 희생하며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 속에 자리 잡고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신 이후로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그렇게 불뚝거리고 나서기 좋아하고 덤벙대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실천하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나 살려라 도망하고 멀찍이 따라가며 재판정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려고 신분을 감춘 채 기웃거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결국은 가련한 목숨을 부지하려고 예수님을 자기 입으로 부인하고 말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갈릴리 바다로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뵙고 다시 주님 사랑을 회복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으면서까지 주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하신 말씀처럼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밤에 고귀한 사랑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가시지만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 약속하셨고, 그 밤에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이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보전하여 주시고, 내가 아버지와 하나된 것처럼 이 사람들도 우리와 하나되게 하옵소서’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제자들을 하나님 손에 맡기셨습니다.    

한편, 밤을 새워 기도하신 다음 날 새벽,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군병들을 이끌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리에서 주님은 한 번 더 제자들을 향한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물으신 주님은 ‘내가 바로 너희가 찾는 나사렛 예수다.   너희가 잡으려는 사람이 여기 있으니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은 자유롭게 가도록 하라’ 하시며 제자들을 끝까지 보호하신 주님이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더라는 요한의 말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고백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은 드디어 십자가에서 그대로 표현이 되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하시고 숨을 거두신 주님을 보고 요한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로 이것이구나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곧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대신 자기 목숨을 버려 죄의 형벌을 담당하는 책임을 끝까지 다 이루는 사랑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보여주신 사랑은 끝이 없는 사랑이고 모자람이 없는 사랑이며 책임을 완수하신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내가 부름을 받았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붙드신 그 사랑의 손을 절대 놓지 않고 끝까지 함께 가십니다.    기쁨의 자리에도 고난과 아픔의 자리에도 함께 가시는 주님이십니다.   아버지 앞에 서는 그날까지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즐거워하며 서로의 발을 씻기는 사랑으로 성숙한 제자의 삶을 살기 바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며 주의 자녀와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의 마땅한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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