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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예수님의 권위 (막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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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권위 (막 1: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 도다 하더라.”(막1:27)

우리는 권위(authority)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회와 공동체에서 질서가 유지되려면 반드시 그 구성원들이 납득하고 딸아 갈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 힘이 권위입니다. 권위가 바로 세워진 사회는 그만큼 건강하고 안정되어 있습니다. 사회나 공동체에서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 질서가 유지되도록 하는 권위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권위가 상실되어질 때에 강제적 방법을 통해서 질서유지를 위한 힘이 발생하는 데, 이것이 권위주의이다. 권위주의는 권위와 다릅니다. 권위는 설득과 순종을 만들지만 권위주의는 강제적이고 강압적이며 때로는 폭력적이기도 합니다.  
  
권위주의를 배격하다 보니 권위 자체를 부정하며 권위가 필요 없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이 ‘신비주의’가 되면 나쁘지만 ‘신비적 신앙’은 필요하고 좋은 것과 같이 ‘권위주의’는 나쁘지만 권위는 필요한 것입니다. 권위는 한 사회 혹은 공동체에서 설득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가버나움의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달리 권위와 권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회당에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귀신을 꾸짖을 때, 귀신은 큰 소리를 지르며 쫓겨났습니다. 이 예수님의 권위를 보고 사람들은 ‘서기관과 같지 않은 권위 있는 가르침’ 또는, ‘권위 있는 새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서기관은 율법을 필사하여 전승하는 일을 전담하며, 회당과 각종 공공기관 및 단체에 소속하여 공문서등을 작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자매체 및 인쇄술이 미약했던 당시에 그들의 직책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기에 그들은 그 시대에 높은 지위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서기관들은 공문서 작성의 직능과 율법의 필사뿐 아니라 율법 등을 연구하고 전승하는 기능도 담당하였기에 주로 각 회당 등에 속하여 랍비 또는 율법사 등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산헤드린공회, 성전, 로마 식민체제의 각종 기관에 속하여 일종의 행정 관료로서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대개 바리새파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이들의 권위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귀신도 두려워 떠는 힘 있는 권위였습니다. 그럼 서기관들과 달리 예수님의 권위는 어떤 권위였습니까?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권위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권위에 입각하여 가르치셨고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자신의 권위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28:18)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마9:6)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 이로소이다.” (요17:2)

본문의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에게 있는 귀신도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1:24)

예수님의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위였습니다. 곧, 하나님의 권위였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의 권위는 그들의 스승으로부터 오는 권위요 자신들의 연구에서 나오는 권위였습니다. 전통이나 인습에 그 근거를 둔 권위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 라고 말하여 왔다.” 라는 그들의 전통에 의존하는 표현을 상투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권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거룩한 성도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의 권위, 거룩한 성도의 권위, 하나님 나라 백성의 권위를 부여받은 영광스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의 권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요14:12)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15:7)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니라.”(요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우리는 이 예수님의 권위를 가지고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막6:7) 또한, 예수님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베드로에게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에도 예수님의 권위를 부여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권위 있는 성도와 교회의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이 권위는 생명과 빛의 능력이고 거룩함이고 사랑이고 기쁨이고 평화이고 온전함입니다. 이 능력의 권위를 가지고 살아가기에 이 세상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며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리스의 사람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사랑에서 나오는 권위였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인간을 죄와 죽음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에서 나오는 권위였습니다. 이 사랑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의 권위는 사람들로 놀라며 귀신들도 떠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신 예수님의 행위는 긍휼하심을 베푸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고통당하는 백성들을 볼 때 마다 긍휼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각종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좆아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치유와 자유의 역사를 만드셨습니다. 이 긍휼이 여기시는 사랑의 역사는 사람들의 영혼의 갈급함을 채워주시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목자의 심정으로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가르치시고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권위는 사랑에서 나오는 권위였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삯군의 마음으로 사랑보다는 명예와 재물에 애착을 더 두었습니다. 인간영혼에 대한 사랑 없는 그들의 가르침은 종교적 지식뿐이었고, 단지 기교적 지혜로운 말의 표현을 과시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권위는 거부적이고 불쾌감을 안겨주는 권위였습니다.   
 
이들과 달리 예수님의 권위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존경과 함께 사랑의 응답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앗시스 프란시스’ 는 본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난 속에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위대한 성자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며 그를 성자라고 부르며 쫓았고 그를 스승으로 섬기고자 했습니다. 그에게는 사람들로 존경받게 하고 사람들을 따르게 하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사랑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 프란시스가 문둥병자에게 가까이 하려 했을 때에 어느 누구도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고 가까히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프란시스는 문둥병자를 껴안고 입을 맞추는 사랑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이 사랑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추종의 권위가 되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 삶이 사람들이 추종하는 권위로 들어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요일4:7-11/새 번역)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의 권위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므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의 아름다운 권위를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진리대로 사는 데서 나오는 권위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힘 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 이러라.”(눅4:32)
 
예수님은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사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신 삶, 진리대로 사신 삶은 존경과 함께 순종을 불러일으키시는 권이였습니다.
  
때로는 권위가 존경받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서기관들은 그 권위를 자기의 소유로 삼고자 했습니다. 의도적으로 권위를 만들려고 하는 데서 권위주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서기관들의 권위는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적인 권위주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들의 이러한 잘못을 이렇게 지적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마23:2-7)
  
예수님은 이런 서기관들을 가혹하게 꾸짖으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마23:13-15)

예수님은 서기관들을 꾸짖으시면서 심각하고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우리는 권위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스왈드 스미스’의 비유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살릴 묘방을 가졌다는 유명한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심오한 인생철학을 가지고 하루 종일 강론했습니다. 그러난 죽은 사람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 대 종교가가 와서 경전을 읽고 신비로운 의식을 행했으나 죽은 사람은 여전히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강철의지의 사나이가 와서 죽음보다 강한 의지와 신념을 불어 넣으며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여전히 말이 없었습니다. 다음에는 생명과학자들과 의사들이 와서 수술과 주사의 온갖 묘약을 다 썼으나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심으로 벌떡 일어나 걸어 나왔던 것처럼, 예수님이 이 죽은 사람에게 일어나라 명하시니 그 사람이 즉시 살아났습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다 죽은 자라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권위를 걸고 말씀하셨는데 예수 외에 과학도 윤리도 철학도 종교도 이 죽은 자에게는 소의 귀에 경 읽기입니다.” 
  
누가 사람의 영혼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 오스왈드 스미스는 예수님 외에는 과학도 윤리도 철학도 종교도 어느 무엇도 인간을 살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 이 세상이 어두워져 가고 사람들이 생명을 잃어버린 인생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권위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절기 예수님의 권위를 우리가운데 회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하십시다. 예수님의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권위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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