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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의 통로 (창 3:6, 마 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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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통로 (창 3:6, 마 4:5~7)
 
 
❚타인의 시선이라는 죄의 통로

여러분은 남의 눈을 얼마나 의식하며 삽니까? 세상을 살아가며 남의 시선을 얼마나 의식하며 사시냐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봐줄까? 내가 이런 말이나 행동을 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생각을 얼마나 하냐는 것입니다.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곳이기 때문에 남을 전혀 의식 안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너무 남을 의식하다보면 어느새 나는 남의 눈치만 살피며 내 소신껏 살지도 못하고 내 주장 한 번 못 펴보고 살아가는 못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반대로 남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내 맘대로 내 하고 싶은 대로만 산다면 우리는 남을 전혀 의식하지도, 배려하지도 않고 오직 내 주장, 내 고집대로만 사는 독불장군이 되고 말 것입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남의 눈, 타인의 시선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남들은 어떤 눈으로 나를 바라볼까, 타인의 시선에 너무 집착할 때 이런 태도가 우리에게 죄가 들어오게 하는 통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동양과 서양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얼마나 의식하느냐 하는 데서 아주 큰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서양 사람들은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개성을 중시합니다. 서양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것 중에 하나가 음식 시킬 때 “통일”을 외치는 것이랍니다. 심지어 식당에 가서 이 메뉴 저 메뉴 골고루 시키면 주인이 짜증을 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서양 사람이 볼 때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횡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개인의 개성과 취향을 무시할 수 있냐는 것이지요. 한국 사람들 놀 때 무조건 돌아가며 노래시키는 것 보면 서양 사람들은 기절합니다. 이렇게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개성을 중시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왜 남의 눈은 의식하느냐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옷차림도 머리 모양도 내 좋은 대로 하면 그만입니다. 옷을 길게 입든 짧게 입든 벗고 다니든 아무도 신경 안 씁니다. 나도 신경 안 쓰고 남도 날 보고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세상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지금도 옷차림이 좀 이상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미친 ◯”하면서 손가락질 합니다. 그러다보니 옷 입을 때 남들이 어떻게 볼까 참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이런 서양식 사고방식과 남을 많이 의식하는 동양식 사고방식 중 어떤 것이 더 좋을까요? 그 때 그 때 다릅니다. 남을 의식하고 잘 배려하는 동양식 사고방식이 좋을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느라 내 개성이나 주장이 묻혀버리는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남의 눈을 의식하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봐줄까 걱정하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지만 이것이 지나치면 남의 시선이, 남의 판단이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남의 눈에 얽매어 사는 사람은 불행하고 때로는 그것이 내 우상이 되어 나에게 죄가 들어오는 통로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닫힌 문>이란 희곡에서 “타인의 시선은 지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지나치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다가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표현한 것입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봐줄까, 이것이 우상이 되고 죄의 통로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눈을 통한 유혹

하와가 선악과를 보았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했답니다. 먹음직하다는 것은 오감(五感)을 통해, 인간의 감각을 통해 죄가 들어오는 것이라고 지난 주 설명했지요? 그렇다면 보암직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눈으로, 시선으로 유혹이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 눈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모릅니다. 눈은 너무 잘 속습니다. 너무 잘 현혹됩니다. 조금만 어떤 생각이 들어오면 우리 눈은 너무나 쉽게 반응합니다. 저 여자가 좋다 하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면 얼마나 예뻐 보입니까? 어디 하나 흠 없이 완벽하게 예뻐 보입니다. 얼굴에 점도 예뻐 보이고, 비뚤어진 코도 예뻐 보입니다. 그러다가 결혼해서 살면서 점점 제정신이 돌아오면 점점 미운 데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물건을 사고 싶은 열망이 생기면 어디를 가도 그 물건밖에 안 보입니다. 저도 가방 하나가 마음에 들면 어디를 가도 그 가방만 보이고 그 가방 든 사람만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 가방 들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만큼 우리 눈은 약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했습니다. 벌써 하와의 마음속에 그 선악과를 먹고 싶은 욕망이 들어가 자리 잡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서라도 그것을 먹고 싶은 욕심이 들어오니 보기에 무조건 좋아 보이고 맛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눈이 속은 것입니다. 시선이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이, 우리의 시선이 얼마든지 죄 짓는 통로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와의 경우처럼 내가 무언가를 보는 시선도 죄의 통로가 되기 쉽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남이 나를 어떻게 봐줄까 즉, 남의 눈, 타인의 시선이 죄의 통로로 사용된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자, 보십시오.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 받을 때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두 번째 유혹은 무엇입니까? 마귀가 예수님을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고 유혹합니다. 이 성전 꼭대기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남쪽 망대를 뜻한다고 봅니다. 이 남쪽 망대가 높이 솟아 있고 그 아래로 깊은 기드론 골짜기가 펼쳐져 망대가 더 높아 보였습니다. 그 높은 망대 꼭대기에서 천 길 낭떠러지 기드론 골짜기 아래로 뛰어내려 보라는 것입니다. 뛰어내리면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분명 마귀가 한 말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마귀가 성경을 인용합니다. 이 마귀의 말은 시편 91편 11~1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
   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참 이상합니다. 마귀가 성경을 인용하다니요. 아니요. 이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마귀는 성경을 인용하는 것을 즐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어떤 경우에 그런지 조금 있다가 설명하기로 하고, 아무튼 이 말대로라면 예수님이 그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 너를 받들어 바닥에 부딪히기 않게 해줄 것이라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결과가 어떨지를. 성전이라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예수님이 그 높은 꼭대기 위에서 뛰어내립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외칩니다. “사람이 떨어졌다, 사람이 떨어졌어. 에이그 금세 옥떨메가 되겠구먼.”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감습니다. 여러분, ‘옥떨메’가 뭔지 아십니까?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랍니다. 이제 몇 초도 안 되어 저 사람은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처럼 바닥에 부딪혀 아주 박살이 나겠다고 끔찍해 하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님의 발밑을 받쳐 바닥에 부딪히지 않게 해준 것입니다.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예수님은 어느새 공중에 떠서 거룩한 표정으로 성전에 모인 사람들을 지긋이 내려다봅니다. 사람들은 순간 함성을 지릅니다. “와, 저 사람 누구냐? 도대체 누구 길래 천사들이 발을 받쳐서 저렇게 공중에 떠있는 거야?” 그 순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긴?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너희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 구세주란 말이다.” 그 순간 수많은 사람들은 황홀한 표정으로 외칩니다. “저 분이 바로 메시야다.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구세주란 말이다.” 이 얼마나 멋진 시나리오입니까? 만약 예수님이 정말 이렇게 하셨다면 단박에 스타가 되셨을 것입니다. 순식간에 메시야로 추앙 받으며 멋진 개선행진을 하고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로마를 쳐부수고 유대인의 왕으로 등극하셨을 것입니다.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가장 편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가장 쉽고 편한 방법을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가장 어렵고 가장 고통스러운 길을 택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방법이 마귀의 유혹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며 그 시선을 이용해 단박에 스타가 되는 이 방법이야말로 죄가 내 안에 들어오는 통로요, 마귀가 시험해서 나를 넘어뜨리려는 방법임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남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 남들에게 잘 보이려는 것, 우리의 과시욕이 얼마든지 죄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마귀가 시험한 것 세 가지

그렇다면 오늘 마귀가 이 두 번째 시험을 통해 원한 것은 무엇일까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시험을 통해, 타인의 시선이라는, 남의 눈을 의식하는 죄의 통로를 통해 이루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마귀는 성전을 시험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전은 본디 뭐하는 곳입니까? 본디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사 56:7, 막 11:17)이요,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두 번째 시험을 통해 성전을 자기 능력을 나타내고 과시하는 장소로 변질시키려 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험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받는지 모릅니다. 교회를 왜 다니느냐? 말로는 예배하기 위해 다닌다고, 하나님 만나려고 나온다고 하면서도 실은 교회를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장소가 아니라 자기를 과시하고 자기주장을 내세우려는 장소로 변질시키라는 시험을 우리가 당하고 있습니다. 이 시험에 넘어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그런 자기 과시의 장소로 만들고, 교회를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 듭니다. 우리가 이 시험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래서 교회를 오직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만 높여드리는 장소로 만들지 못하면 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설교를 들으면서 “저건 나와 상관없는 얘기다”라며 안심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든지 이 시험에 걸릴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스스로에게 세 가지를 질문해 보기 바랍니다. 첫째, 나는 왜 교회 나오는가? 둘째, 나는 교회에 와서 나를 나타내거나 자랑하거나 과시하고 있지 않는가? 셋째, 나는 교회에 와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바라보느냐, 아니면 내 뜻대로 내 고집대로 행하고 있는가? 이 세 가지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워야 우리는 비로소 이 시험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고, 남의 눈과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죄의 통로를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마귀는 성경을 시험한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할 때 성경말씀을 인용합니다. 시편 91편 11-12절 말씀을 인용했다고 했지요? 어떻게 마귀가 사탄이 성경을 인용하는가? 얼마든지 인용합니다. 아니, 이렇게 성경을 인용해 우리를 유혹하는 일은 마귀가 아주 즐겨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겉으로는 성경을 인용한 것처럼 보입니다. 얼핏 보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자기 뜻대로, 자기 목적에 맞게 마음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전인수(我田引水) 격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마귀는 이렇게 성경을 오용하고 악용합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이단들이 성경을 자기 뜻대로 목적대로 악용하면서 아전인수 격 해석을 통해 성경을 모독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순종하려는 목적에서만 사용되어야지 결코 나 자신을 위해, 내 목적을 위해 끌어다 쓰는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이단만 이런 짓을 하느냐? 아닙니다. 마귀는 이단뿐 아니라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성경만 인용하면 기적적인 힘, 마술적인 힘이 있어 그대로 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식의 주문처럼 사용하게 만듭니다. 성경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자신의 뜻과 목적을 이루려는 수단으로 사용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고 인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마귀는 하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을 시험해보라고 말씀합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
    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
     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우리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고 우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는지 안 붓는지 테스트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이 하나님이 시험해보라고 하면서 왜 지금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죄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시험이 하나님을 나를 돕는 수단으로 만들려는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잘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어려울 때, 필요할 때 반드시 도우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나를 돕는 수단처럼 여기서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짠’하고 등장해서 도와주는 내 전용 신(神)으로 전락시키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취해야 할 자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끝까지 그분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것이지 하나님께 나를 돕도록 강요하고 요구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억지로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를 위한 편리한 도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일부러 시험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회 다니면 복 준다고 해서 다녔는데 복은 무슨 복, 아무 일도 없어요. 나 교회 안 다닙니다. 절에 갈래요.” 예, 좋습니다. 절에 가서, 부처님이 여러분에게 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얼마든지 가십시오. 하지만 우리에게 진정 복주시고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또 어떤 분은 아예 하나님을 협박합니다. “하나님, 나 이번에 안 도와주면 하나님 안 믿습니다.” 이런 분들은 하나님을 아주 편리한 내 전용 신(神)으로 삼으려는 분들입니다.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타나 나를 도와야 하고 내가 필요할 때 안 도와주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그런 편리한 도구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유혹에 대해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겨냅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오늘 본문 7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
    였느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1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말씀을 왜곡하고 악용하는 마귀에 대해 예수님은 참된 말씀의 인용으로 이겨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신명기 말씀은 출애굽기 17장에 나온 맛사 또는 므리바 사건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이라는 곳에 이르러 마실 물이 없어서 모세에게 물 달라고 원망하며 난리를 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팡이로 반석을 치게 하셔서 물을 주신 후 그곳 이름을 “다툰다”는 뜻을 가진 므리바, 혹은 맛사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 사건이 뭐가 문제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목이 마른데, 물이 필요한데 하나님은 뭐하고 계시냐고 난리 친 것입니다. 내가 필요할 때 하나님은 뭐하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앙이고 죄입니다. 아니, 내가 물이 필요해서 달라는데 뭐가 문제냐고요? 아닙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종이 되어 신음하면 모세를 보내 해방시키시고,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의 바로 왕을 굴복시키시고, 홍해 바다까지 갈라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으면 만나로, 메추라기로 먹이셨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인도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 하나님이 목마르면 당연히 물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도 못 기다리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번뿐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힘들어도, 조금만 아쉬워도 그때마다 난리를 칩니다. 하나님 뭐하시냐고, 내가 필요할 때 하나님 왜 안 도와주시냐고요. 이것이 죄입니다. 기다릴 줄 모르고 신뢰할 줄 모르는 죄입니다. 하나님을 내 전용 신으로 만들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만드는 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입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이 죄를 많이 짓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나를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만듭니까? 내가 아쉽고 나 필요할 때만 하나님 찾고 아쉽지 않을 때는 잊고 사는 죄 말입니다. 얼마 전 어떤 분이 이런 얘기를 하십니다. 자녀들한테 참 서운하다고요. 멀리 떨어져 사는 자녀들이 평생 연락도 안 하다가 뭔가 도움이 필요할 때만 전화한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전화할 때는 오직 뭔가 바랄 때뿐이고 아쉬운 것 없으면 부모 잊고 산다고요. 제 얘기가 아닌가, 아니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목전에서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두 번째 시험은 눈이라는, 시선이라는 죄의 통로를 통해 성전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시험하고, 나아가 하나님 자신을 시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런 시험을 수없이 받고 있습니다. ‘사명자’가 아닌 ‘능력자’(스타)가 되라는 유혹입니다. ‘사명자’는 누가 수고했다고 칭찬해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만 영광 받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능력자’는 무슨 일을 애도 자기를 드러내고 과시합니다. 자신이 인정받고 하나님만 받으셔야 할 영광을 자기가 대신 차지하려 듭니다. 우리는 이런 시험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이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필요할 때만 찾는다면, 내가 아쉬울 때만 나타나 돕는 분으로 전락시킨다면 우리가 믿는 신앙은 무당 푸닥거리나 부적 붙이고 복을 비는 미신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눈이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눈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 눈치만 봐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고 눈치를 보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목전에서”라는 표현이 수도 없이 나옵니다. 이 목전(目前)이라는 말이 바로 “하나님 눈앞에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눈앞에서 죄 짓지 말고 하나님 눈앞에서 바로 살라는 뜻입니다. 사람 말고 하나님 눈치만 보라는 것입니다. 저도 목회자로서 하나님 눈치만 볼 것입니다. 사람들 뜻에 휩쓸려 이리 저리 쏠려 다니는 목회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시선만 두려워하는 목회자가 될 것입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돈 있는 사람, 힘 있는 사람,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 눈치를 보게 됩니다. 공평한 목회도 못하고, 하나님 뜻대로 목회하지도 못합니다. 저도 그럴 것입니다만 여러분도 사람의 눈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눈만 두려워하며 오늘도 하나님의 목전에 바로 서는 참된 하나님의 사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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