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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경건의 훈련 (딤전 4: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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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의 훈련 (딤전 4:6~10)

 
구약 성경 사사기를 보면 삼손이라는 사사가 나옵니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었습니다. 나실인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입니다. 평생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삼손에게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삼손은 나귀 턱뼈 하나를 가지고 블레셋 군대 천명을 물리칠 만큼 대단한 힘과 용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놀라운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삼손이 비참한 죽음을 겪게 됩니다. 그는 블레셋 군대에게 사로 잡혀 두 눈이 뽑혔습니다. 멍에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거대한 맷돌을 돌려야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에 나가 재주를 부리며 광대처럼 행동해야 했습니다. 삼손의 말년의 삶은 매우 고통스러웠고 비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삼손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을 가지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다가 그렇게 비참하게 생애를 마감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경건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들릴라라는 음란한 블레셋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후에 그녀의 치마폭에 싸여 지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들릴라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영성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삶과 거리가 멀어진 삼손에게서 떠나셨습니다. 삼손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는 가운데 정말 두려운 말씀이 한 곳 있습니다. 사사기 16장 20절입니다.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라는 말입니다. 삼손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블레셋 군대와 싸우기 위해 몸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몸에 힘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삼손은 자신에게서 하나님께서 떠나셨는데도 그것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삼손의 영성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신의 영성을 관리하는데 실패했고 결국 그는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성경 안에는 삼손과 똑같이 여성 문제로 시험에 들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윗 왕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했습니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을 통해 자신의 죄를 지적받게 되었을 때 머뭇거림이 없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가슴을 치며 통회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영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라고 간구합니다. 다윗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자신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면 얼마나 비참해 지는 지를 사울 왕을 통해서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밧세바 사건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지만 결국은 더 깊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다윗의 영성은 더 깊어집니다. 다윗은 살아서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지만 죽어서도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이 되었습니다.

삼손과 다윗이 똑같이 여인 문제로 잘못된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경건 훈련에 있습니다. 삼손의 생애를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경건 훈련을 하는 모습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삼손의 생애를 보면 그의 생애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전혀 없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기도하는 모습이 없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위해 전혀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더 깊이 알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삼손의 삶에는 경건 훈련이 없었습니다. 경건 훈련이 없는 삶은 죄를 죄로 깨닫지 못합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합니다. 결국은 영적으로 무뎌지고 강팍해져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반면에 다윗의 생애를 보면 그는 경건 훈련으로 자신의 영성을 단련시켰습니다. 다윗은 수시로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말씀의 깊이를 깨닫고 ‘주의 말씀이 어찌 송이꿀보다 더 단지요’라고 고백합니다. 시편 대부분의 찬양은 다윗이 지은 것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수금을 타며 찬양을 했습니다. 그의 찬양은 사울왕을 괴롭히는 악신을 쫓아내는 영혼이 실려 있는 능력의 찬양이었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삶 자체가 기도하는 삶이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다윗은 어김없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기 위해 일상생활 속에서 경건 훈련을 쌓았습니다. 경건 훈련이 있는 삶은 죄를 죄로 깨닫게 됩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됩니다. 경건 훈련이 있는 삶은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들은 삼손과 다윗의 생애를 통해서 일상 생활 속에서 경건 훈련이 얼마나 유익한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제자, 디모데에게 경건의 훈련을 쌓으라고 권면합니다. 7,8절에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며 경건의 훈련을 쌓으라고 말합니다. 

에베소는 지금의 터키 서쪽 끝에 있는 해변 도시입니다. 오래 전부터 이 도시는 동양과 서양을 잇는 거점 도시로서 상업이 발달했고 다양한 문화가 유입되었습니다. 디모데전서가 쓰여질 당시, 에베소에 어림잡아 25만명 정도가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고대 도시로서 얼마나 규모가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지중해 연안에 살던 여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꿈이 에베소에 한번 가 보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없는 물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질의 풍요와 세상의 향락 문화가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에는 당시 세계 7대 불가사의한 건물 중의 하나라고 하는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의 중심 신전이었던 파르테논 신전보다 네 배 정도 더 큰 것으로 에베소의 가장 큰 자랑이었습니다. 이 신전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행위는 매우 광적이었고 음란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종교와 신화에 대해 논쟁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신화를 알고 있느냐가 교양의 척도가 되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논쟁을 즐겼습니다. 이런 도시를 배경으로 복음 사역을 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바울은 마음의 초점을 잃지 말고, 한 눈 팔지 말고 예수님의 복음에 집중할 수 있도록 경건의 훈련을 쌓으라고 권면합니다. 

‘경건’이라는 말은 ‘일생 생활 속에서 신앙인답게 살아가는 것’ 을 말합니다. 신앙인들이 신앙인답게 살지 못하도록 세상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유혹합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우리 시선의 초점을 흐리게 만들기 위해 어떤 때는 달콤한 유혹으로, 어떤 때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믿음의 시선을 흐리게 하기 위해 달려듭니다. 온갖 유혹이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은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생활의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훈련이 경건 훈련입니다. 경건의 능력이라는 것은 하루 하루의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은 믿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믿는 사람답게 믿지 않는 사람들과 차별성을 드러내며 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 교회가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경건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전형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계시록 3장의 말씀을 읽어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징을 세 가지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는 말씀을 통해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미지근하여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는 말씀을 통해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세상적인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을 통해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손님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매우 어정쩡한 관계입니다. 예수님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온전히 시인하며 삶의 주인으로 모신 것도 아닙니다. 얼마나 애매한 관계인가 하면 예수님 조차도 떠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리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문밖에 계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포기하시고 떠나시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을 향해 어느 정도 마음을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두 팔 벌려 환영하며 집안으로 모시고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떠날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는 상태입니다.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 디모데후서3장에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무늬는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생활에 들어가 보면 예수님의 말씀과 정신에 전혀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항상 문밖에 세워 두는 사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믿는 사람으로서의 영향력을 전혀 끼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무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데 생활에서 전혀 예수님을 믿는 향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생활 속에서 믿는 사람으로서 영향력 있는 삶을 살려면 영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체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몸에 좋다는 것을 선별해서 먹고, 여러 가지 운동을 하며 건강한 몸을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한 보고서에 의하면 중년층의 미국 사람들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 중 가장 위험한 것 두 가지가 있는데 자전거 타기와 농구라고 합니다. 한해에 자전거를 타다가 병원을 찾는 사람이 20만 명이 넘고, 농구를 하다가 부상을 당해 실려 온 사람이 16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고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해서는 다치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노력을 합니다. 몸매를 유지하고, 근육을 단련시키며 더 오래 살 수 있다면 힘들고 어렵더라고 땀과 눈물을 견디며 참아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육체의 건강을 위해 몸을 단련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영혼의 건강입니다. 하나님은 육체의 운동은 우리에게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영혼의 운동은 범사에 유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영혼의 훈련은 이 땅에서의 삶은 물론이거니와 죽은 이후의 삶에 있어서도 약속이 있다고 말합니다. 

경건의 훈련은 하나님과 만남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모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사모하며 나가는 것이 경건 훈련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최고의 경건의 장입니다. 기도의 자리, 말씀을 묵상하는 자리, 찬양하는 자리, 주의 이름으로 섬기는 자리는 경건의 훈련장이 됩니다. 우리들이 술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음란물을 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찬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게으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수 있도록 거룩한 사람, 거룩한 장소, 거룩한 시간, 거룩한 관계를 만들라는 명령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사모하는 자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경건의 마음, 경건의 자리로 나갑시다. 경건의 능력을 믿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묵상합시다. 경건의 능력을 믿고 영혼이 숨을 쉬는 찬양을 부릅시다. 경건의 능력을 믿고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기도를 드립시다. 마음의 빗장을 열고 하나님을 만나는 경건의 장으로 나아가는 모든 성도님들 가운데 경건의 능력이 강하게 임하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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