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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있는 사람 (마 5: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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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있는 사람 (마 5:6~12)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말씀, 팔복의 말씀입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서 마태복음 5, 6과 10절 말씀 ‘의’와 관련된 복에 대하여 말씀 나누고자 합니다. 

팔복의 말씀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고 계시지만, 사실은 여덟 가지가 아니라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하나의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팔복은 세속적인 가치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천국)와 관련되어 있는 복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 중에는 ‘의’와 관련된 복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오릅니다. 

['의'(디카이오쉬네)의 기준을 달리 말씀하신 예수님]

우리는 산상수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마 5, 1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말하는 율법주의적인 의가 아닌 차원이 전혀 다른 의를 말씀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또 예수님은 그들이 말하던 토라와 선지서의 의미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해석하셨습니다. 

한국교회 안에, 기독실업인 모임이 아주 활성화 되어 있습니다(기독교인들 중에서 기업을 하시거나 사업하시는 분들이 모여 활동하는 모임, 예배, 말씀공부, 조찬, 교제). 이 모임이 너무 잘 되어서 몇 해 전부터는 중국에까지 기독실업인 모임을 수출하고 있습니다. 기독실업인 모임에 참여하는 대다수는, ‘돈을 벌어서 돈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이런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독실업인 중에는 직간접적으로 경제적인 헌신을 많이 하십니다. 교회의 여러 가지 필요에도 적극적으로 헌신하십니다. 선교활동에도 남다르게 공헌하십니다. 기업하시는 분이니까 십일조도 많이 하십니다. 예전에, 아주 열정적인 분들은···목사님 매달 1,000만원씩 십일조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선십일조개념 가진 분들 더러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을 굉장히 왜곡한 것입니다. 헌금을 마치 무슨 투자나 사업밑천 같이 생각합니다. 헌금은 손이 수고하여 정직하게 번 돈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로, 돈으로 마음껏 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하여도, 우리가 스스로 반드시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로, 넉넉하게 주를 섬기고 있는 내가 과연 하나님과는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이루어드리는 신앙인가? 자기점검을 꼭 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디 돈 문제만이겠습니까?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봉사(디아코니아, 요즘은 ‘섬김’; 지배의식 버림, 의의식버림)인가? 겸허하게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요한복음 2장 예수님 공생애 초기사역,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전정화사건을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2장의 예루살렘 성전정화사건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첫 해, 유대인의 유월절에 있었던 사건입니다(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성전정화사건은 3년 뒤의 또 다른 사건). 

예수님께서 보실 때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종교의 최고의결기관인 산헤드린공회와 대제사장들이 주도하에 그들과 결탁한 장사꾼들이, 자신들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 버린 강도의 굴혈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유대종교 지도자들과 장사꾼들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만 통용되는 화폐로 성전세를 바쳐야 한다는 유대종교의 규정을 이용해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이방인의 돈을 ‘성전 전용화폐’로 바꾸어주면서 엄청난 환전수수료를 부과했습니다. 또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한다는 율법을 악용해서, 백성들이 집에서 가져온 제물은 무슨 트집을 잡아서라도 불합격시키고, 성전 안에서 파는 짐승들로만 제물을 삼아 바치도록 하면서, 폭리를 취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성전규정과 율법규정을 악용해서 사욕을 취하던 유대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인 서기관들, 그리고 그들과 결탁해서 폭리를 취하던 장사꾼들이 아무런 죄의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겁니다(예전, 로마천주교회/ 미성을 가진 소년들의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명목으로, 소년들을 거세하여, 평생 미성찬양대). 그들은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안식일을 잘 지켰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해서 번 소득에 대하여 호리(毫釐: ‘자’나 ‘저울’ 눈금의 호와 리)도 남김없이 십일조를 잘 바쳤습니다(마태복음 23에 보면 예수님은 그들이 –薄荷, 음식을 향기롭게 하는 풀 약재; 茴香, 미나리과 일년생 초본식물, 조미료로 사용됨; 芹菜, 일년생 초본 양념, 약재/ 이런 것들은 율법이 정한 십일조 목록에는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까지도 주도면밀하게 십일조 항목에 넣어서 십일조를 계산해 드리는 율법주의자들이었다). 

십일조 생활만 잘 했겠습니까? 각종 제사와 절기도 잘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들, 요즘으로 말하면 기업경영에서 이윤을 추구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기독실업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을 칭찬하시기는커녕, 도리어 성전에서 모두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자들에 불과했던 겁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번 수입으로, 십일조하고, 제사드리고, 율법을 준수한다면서 자기를 의를 자랑하는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십일조드림, 헌신, 봉사가 다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기 義’를 드러내는 일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말미암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 6-8).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의 말씀 중, 의와 관련된 복은 두 가지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 있는 자]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하셨습니다. 신학자 Reinhold Niebuhr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백악관 초대장 하나가 신기하게도 비판 능력을 무디게 한다.”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경고입니다. 대통령에게 설교하는 것은 보통 영광이 아닙니다(우리나라도 그랬습니다. 청와대예배설교에 초청받는 순서가 한국교회목사서열이 되었다). 웬만한 목사는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가면, 보답의 찬사로 그 시간을 보내기 十常입니다. 상호칭송의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입담의 소화제로 전락하고, 예언자적인 설교는 실종되기 쉽습니다.

작고하신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입원한 병상에 걸어놓았던 그림 하나가 있습니다. 무슨 그림입니까?(얼굴그림) 󰡔바보야󰡕(김수환 자화상)이라는 해설이 붙은 자신의 상징한 그림입니다(영상). 

김수환 추기경님은, 늘 자신을 바보라고 생각하셨답니다.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사랑(뜻)을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당신의 삶을 미화하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또 한 번은, 오래 전 어느 인터뷰에서 그런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추기경이 아니고, 죄인입니다.” 자기를 죄인이라고 고백하셨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도 병상에 걸어놓았던 󰡔바보야󰡕(김수환 자화상)은, 그의 구도자적인 삶을 말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얼마나 예수님과 거리가 먼 世俗的인 삶을 사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여류작가 박완서 선생님의 말씀 묵상집에서(마 25, 31-46 최후심판 때 양과 염소를 가르며 상벌주시는 예수님 비유) 밝힌 󰡔가장 부끄러운 고백󰡕이라는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제는 가서 축하해줘야 할 결혼식이 두 건이 있었습니다. 둘 다 잘 아는 집인데, 한 집은 사회적 지위가 있는 부잣집이고, 한 집은 근근히 착하게만 사는 보잘것없는 집안입니다. 부잣집엔 하객도 많을 테니 저 같은 사람은 참석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일 겁니다. 어려운 집엔 손님도 많지 않을 테고 저 같은 사람도 그 자리를 빛내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쨌는 줄 아십니까? 제일 좋은 옷으로 멋을 부리고 축의금도 제 형편으로는 과하게 준비했습니다. 부잣집 결혼식에 갈 작정을 한 거죠. 물론 그 보다 얄팍한 봉투도 하나 더 마련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소한 봉투는 마침 인편이 생겨 그쪽에다 부탁을 했지요. 요즘 같은 교통난에 비슷한 시간대를 두 탕씩 뛰는 것이 불가능한 바에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신에게 변명을 했지요. 부잣집 결혼식에서 줄서서 기다렸다가 한구석에서 잘 얻어먹고 집에 오면서 제 자신이 문득 모래알처럼 초라하고 왜소하게 느껴졌습니다. 부잣집 잔치에서 옷 잘입은 사람, 유명한 사람을 하도 많이 봤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제야 제가 일을 거꾸로 처리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입니다.

정말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없는 사람한테 한 푼이라도 더 주어야 하는 게 사람 도리인데, 왜 번번이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이번만이 아니라 번번이 그런다니까요. 왜 이런 고약한 버릇이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입으로는 부익부 빈익빈을 개탄하면서 행동으로는 번번이 부익부 빈익빈을 돕는 짓을 하고 맙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가장 부끄러운 고백’의 이 글이 저와 여러분의 자화상은 아닌지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 하신 예수님 말씀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아닌지요? 우리는 정말 예수님 말씀처럼 의에 주리고 목마른, 그래서 배부름이 있는 복 있는 자가 맞습니까? 

예수님 말씀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그래서 배부름의 복을 누리는 자로 살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우리는 의를 위한 핍박, 박해를 감수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덟 번째 복으로 이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2.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

세속을 쫓지 않고, 시류를 쫓지 않고, 자기 의를 구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살고자 하면 우리에게는 필연적으로 ‘핍박’이라는 것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 때문에 핍박을 받은 자가 복 있는 자라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을 유의해서 보시기를 바랍니다. 팔복을 가만 보면,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모두가 다 ‘관계적인 복’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팔복 하나하나는 그저 ‘나 개인적인 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복을 누립니다. 동시에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복을 누립니다.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고,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팔복은 하나님과 나, 나와 사람들과의 관계망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복≻입니다. 마음의 가난, 애통함,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 긍휼히 여김, 마음의 청결함, 화평케 함, 의를 위한 핍박, 이 모두는 다 관계적인 복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복 있는 사람이 되면 나는 복의 根源이 되는 것이고, 복의 샘이 되는 것입니다. 관계망이 튼튼해 집니다. 

의를 위한 핍박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꼼수로 얻을 수 있는 불의한 이익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고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마땅히 치러야 하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은 세속적인 가치가 통하는 불의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주어지는 나라는 이 세속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천국)입니다. 누리는 자만이 아는 나라입니다.

오래 전에, 독일에 갔을 때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서 놀란 것이 있습니다. 승차권을 구입했는데, 승차하면서 그 어디에도 티켓을 검사하거나 체크하는 곳도 없고, 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참 두리번거리다 보니까, 사람들이 다 그냥 타고 내리는 겁니다(국민의식수준차이). 신용사회였던 거지요. 우연하게 된 일이겠습니까? 누군가가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서 대가를 치렀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크리스챤들이 그 몫을 감당해 주었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고자 하면, 의를 위하여 마땅히 감수해야 할 代價가 주어집니다.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핍박을 당하며 사는 것이,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사순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내가 누리는 복은 나만의 복이 아닙니다. 관계적인 복입니다. 사회적인 복이 되어야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십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되십시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과 우리교회를 하나님의 나라 되게 하는 축복의 말씀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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