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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사람 (사 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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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을 받는사람 (사 43:1~7)
 

1. 사랑이 없어서 …

어떤 청년이 인터넷에 다음과 같은 자신의 사연을 올렸습니다. “저는 연하의 여성은 왠지 여자로 보이지 않습니다. 연상에게만 끌립니다. 이것은 비정상인가요?” 그에 대한 답은 “유아기적 애정 결핍”이 원인이라 것입니다. 이 사람의 증상은 5세 미만 때 모유를 덜먹었거나 엄마의 사랑을 부족하게 받은 사람들에게서 종종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젖먹이의 뇌는 엄마의 사랑이 담긴 말과 피부접촉 등을 바탕으로 감정과 기억 등을 담당하는 회로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고차원 회로’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젖먹이 때 부모의 사랑이 결핍되면 뇌 회로 형성에 장애가 생기고, 이 때문에 뇌에 전반적인 이상이 따른다고 합니다. 이것을 그냥 놔두면 자폐증으로 굳어버리는 등, 뇌의 지능이나 정서에 심각한 장애가 올 수 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청년이 인터넷에 다음과 같은 사연을 올렸습니다. “저는 사람과 친해질수록 점점 힘들고 부담스러워져서 결국 그들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맙니다. 저는 많이 외롭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과 조금 친해지면 그것이 도리어 겁이 나서 더 이상 깊어지지를 못합니다.” 이 사연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사랑받지 못한 경험이 현재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나 상대를 피하게 되고, 그렇게 친밀감이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기대려고 하니 상대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방황하는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그러면서도 항상 누군가를 향하여 분노를 나타내는 아이였습니다. 알고 봤더니, 그 원인은 부모에게 있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에게 무관심한 아버지, 그리고 항상 남편을 향해 “어이구 어쩌다 내가 저 인간을 만나가지고…”를 입에 달고 사는 엄마, 그러면서 그 엄마는 종종 아들에게 “지 애비하고 꼭 닮은 놈, 내가 어쩌다 널 낳아가지고…”라는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부정적인 말만 듣고 자란 그 아이가 매사에 우울하고, 자신감이 없고, 그러다가 한 번씩 폭발하듯이 분노를 쏟아내고 ….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상에서 말씀드린 몇 가지 사연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의 결핍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결핍이 그들의 정신과 육신과 인간관계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육신을 가지고 이 땅의 삶을 사는 인간에게서 사랑을 빼 버리면 무엇이 남을까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사랑 이야기를 빼면 무엇이 남을까요? 사람은 부모의 사랑으로 태어나고, 그 사랑으로 양육되며, 자라면서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을 따라 이성을 만나고 또 결혼합니다. 그리고 자녀를 낳고 그 자녀를 사랑하며 살아가지요. 인간사 만사가 사랑으로 이뤄진다는 것이고, 사랑 없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삶의 과정에서 사랑이 결핍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라난 사람들, 남녀의 사랑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의 메마른 삶,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고독한 사람의 삶에는 언제나 문제가 따르고, 그 문제들로 인하여 인생살이가 복잡해지고, 때로는 범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고아원이나 병원 등에는 이름 모를 병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병의 증세는 대체로 우울증 증세를 나타내다가 심하면 죽기까지 한다는데요. 아무리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도, 아무리 위생 시설이 좋은 곳에서 살아도 그런 이상하고 이름 모를 병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연구한 학자들이 이 병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여러분, 그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은 이 병을 “사랑 결핍증”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육신이 건강하고, 그 생각이 건전하며, 성격이 발랄하고 구김이 없습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다른 사람과의 사귐도 원만하여 좋은 인간관계를 이룹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랑을 가까운 사람들만이 아니라 멀리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며, 자연까지도 사랑하여 아끼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 즉 애정결핍에 있는 사람은 그 삶이 힘들고,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마음의 병이나 육신의 병을 안고 살아가게 되지요.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 사랑결핍,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분은 없습니까? 여러분 주위에는요? 아니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 가운데 사랑을 받지 못하여 힘들어 하는 분들은 없을까요?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사랑 결핍 때문에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한 말씀입니다. 

2. “나는 네 하나님, 너는 내 것”

1) “너는 내 것이라!”

오늘 본문은 앞 장의 내용과 연결됩니다. 앞 장에서 하나님은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실은 못 듣는 자들이요 맹인들이라’고 하시면서 안타까워하셨습니다(42:18). 이 말씀은 43장 8절에도 나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 이것은 원래 그들이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그들에게 말씀을 들려주셨고, 당신의 살아계심과 그 기적과 능력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그래서 하나님과 그 하시는 일과 말씀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들은 “귀가 쳐 먹었냐!”, “눈을 감고 사나?” 하는 식의 표현처럼 강력한 욕설과도 같은 아주 엄한 책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사야 42장의 내용입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그렇게 엄하게 책망하시던 하나님께서 그 뒤를 잇는 오늘 본문에 와서는 분위기를 완전 바꾸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한다면, 강력한 책망 뒤에는 구체적인 징벌이나, 아니면 하나님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으셔서 이제는 그들을 버리시리라는 말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1).”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거듭해서 가르치고 깨우쳐 주어도 깨닫지 못하고 계속 잘못된 길로만 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비록 앞에서는 책망하셨지만, 오늘 본문에 와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단히 안타까워하시면서 도리어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아, 내가 누구냐? 나는 너를 창조한 여호와니라.’ ‘나는 너를 빚어 만든 여호와니라.’ ‘나는 너에게 말씀하는 자니라.’ ‘나는 너를 구속한 자니라.’ ‘나는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니라.’ ‘너는 내 것이니라.’ 여러분, 여기에 나오는 “창조”와 “지으심”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지으신 분, 여러분을 만드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부모와 같다는 말씀이지요. 또한 “구속”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고 배신하고 범죄한 그 백성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으시기 위하여 희생과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잘 아시고 그들을 “지명하여 부르시는 분”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무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여러분을 알아주지 않고 알아보지도 못하는데, 갑자기 단상에서 여러분의 이름을 호명하더니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지명하여 불렀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또한 4절에서 하나님은 ‘나는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 말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아예 관심도 없는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의 삶과는 전혀 다른 길로 가는 그들인데도,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본문의 내용 때문에 성경학자들은 본문의 제목을 “선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고백”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습니다. 제가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읽히는 책 가운데 『5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감정이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다 다른데, 사랑의 표현도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인정하고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로서 사랑을 표현하고요. 어떤 사람은 거저 곁에 있어주는 것으로 사랑을 나타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선물 등을 주는 것으로 사랑을 나타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요리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는 등 봉사로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육체적인 접촉으로 사랑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은 어떤 것입니까? “너는 내 것이라!” 한 번 따라해 주시겠습니까?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의 사랑 표현은 “니는 내 끼다!” 이 한 마디로 충분하다고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너는 내 것이라!” 이 한 마디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가슴에 팍팍 와 닿습니까?

최근 신문에 보니까, 유명한 문인들이나 화가 혹은 유명 인사들이 결혼식에 갔다가 방명록에 간단한 싯구나 그림을 남겼는데, 그것이 굉장히 가치가 있는 것으로, 돈으로 치면 엄청난 금액으로 평가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렇게나 한 낙서도 누가 했느냐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유명한 연예인이 입었던 옷이나 모자도 그것 자체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소유한 사람이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입니까? 이 세상의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신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가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것은 정말 놀라운 선언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온 세상과 우주의 지배자이인 하나님의 소유라면, 여러분은 얼마나 가치 있으며 소중한 존재입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비록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통을 당하고, 때로는 여러분 스스로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유혹을 당하여 죄를 짓기도 하지만,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자기 소유로 삼으시면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는 것을 믿으시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범사에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2)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분, 사랑 받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 받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장차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갈 것에 대해 예언한 이후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장차 나라가 망하여 포로가 되어 끌려갈 것을 알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만 두려움을 안고 있습니까? 현대인들은 갖가지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혹시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을까?’ ‘암에 걸린 것은 아닐까?’하고 암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가하면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재산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직장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 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삽니다. 그뿐 아니라 ‘심리적인 두려움’도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어떤 특별한 현상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밀폐 공포'라는 것이 있습니다.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 겁이 나는 것입니다. 식은땀이 나고 혈압이 올라갑니다. 반대로 '광장 공포'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거꾸로 넓고 공개된 장소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고공 공포’도 있습니다. 높은 데만 올라가면 겁이 납니다. ‘세균 공포’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세균이 득실득실하다는 생각 때문에 아무데나 앉지 못하고, 또 시도 때도 없이 손을 씻습니다. 우화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라비아 사람이 바그다드로 가다가 전염병을 만났습니다. 그 아라비아인이 전염병에게 물었습니다. “전염병아, 너는 지금 어디를 가는 중이냐?” 전염병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바그다드로 가는데 거기서 오천 명을 죽일 것이오.” 얼마 있지 않아 바그다드에는 무서운 전염병이 돌았고, 그로 인해 오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 후 아라비아인이 다시 그 전염병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의했습니다. “너는 지난번에 오천 명을 죽이러 간다고 했지 않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오만 명을 죽였느냐?” 그러자 전염병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오천 명만 죽였을 뿐이오. 나머지는 모두 두려움으로 죽었지요.” 두려움이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두려움을 갖고 살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주님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두려워하지 말라(1,5)!”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 두려워하지 말아야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❶ 첫째가 2절에 나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여기서 물과 불은 환란을 의미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산전수전(山戰水戰)’에다가 화전(火戰)까지 겪는다는 말입니다. 즉 인생을 살다보면 도무지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고난의 산을 만나기도 하고, 결코 건널 수 없을 것 같은 환란의 강물을 지나야 할 때도 있고, 결코 통과할 수 없을 것 같은 불터널을 지나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이와 같지 않았습니까? 성도들이라고 해서 땅 위의 어려움에서 예외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업이 실패해서 망하기도 하고, 병에 걸려 수술을 받기도 합니다. 환난을 당하고 시험을 통과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환난과 역경이 성도에게도 찾아오지만 주님은 그 곳에서도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폭풍 속의 예수>라는 그림에 보면, 예수님과 열 두 제자 외에 또 다른 한 사람이 눈에 띕니다. 제자들 사이에서 기도하는 한 사람의 모습이지요. 그는 바로 렘브란트 자신이고, 저와 여러분들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인생길에 풍랑이 일고, 불꽃이 우리를 삼킬 것 같은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하늘과 땅, 온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우리의 연약함과 형편을 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무엇이 우리를 두려움에 빠뜨리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두려움을 떨쳐버리시기 바랍니다.

❷ 두려워하지 말아야할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보호가 있기 입니다. 본문 2절,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5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 물이 침몰치 못할 것이라는 말씀은 홍해를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확인이 되어졌고,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할 것이라는 말씀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세 청년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은 성도 여러분의 방패가 되시고 산성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머리터럭 하나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동쪽 끝에 가 있으면 그곳으로부터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서쪽 끝에 있으면 그곳까지 가서 그들을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북쪽 끝이든지, 남쪽 끝이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어디에 있든지 구하시고 이끌어 내실 것입니다(5~7).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낸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1서 4장 18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부모나, 남편이나 아내, 혹 연인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아무리 어둔 세상도, 어둔 환경도, 어둔 영혼도 환하게 만드는 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믿으신다면, 인생의 모든 두려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말씀합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러므로 성도는 무엇이든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앞에서까지 ‘무서워해야 할’ 것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의 삶에서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오늘 본문을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오. 그래도 느낌이 오지 않는다면 다시 또 읽어 보십시오. 계속해서 본문을 읽으면, 이 말씀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모든 두려움은 사라질 줄로 믿습니다. 

3.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기도도 열심히 하고 귀신도 쫓아내는 은사를 가진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하루는 어떤 집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집에 갔습니다. 거기서 기도와 찬송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나타나지 않고 시간이 많이 흘러 그만 권사님이 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꾸벅 꾸벅 졸던 권사님이 뭔가에 놀라 잠을 깨고 보니 자기 앞에 귀신이 떡 하니 서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권사님, 그 순간 뭐든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찬송을 부르려고 했는데 아무 찬송도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얼떨결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그러자 귀신이 답했습니다.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이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라는 노래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를 기본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는 1997년에 이민섭씨가 작사·작곡한 CCM 찬양입니다. 이 곡은 초창기에는 일부 개신교회에서만 사용되었으나, 폭발적인 인기로 대한민국 전체에서 불리기 시작했고, 모 CF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면서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다 아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이 찬양이 생겨난 배경을 알고 계십니까? 

이 곡이 작사작곡되기 몇 해 전, 어느 일본인 목사님이 모 기독 대학생 단체의 모임에 오셔서 설교를 했습니다. 한국인인 사모님께서 통역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어로만 설교하시던 그 목사님이 갑자기 서툰 한국어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형님, 누나들, 용서해 주세요.” 그분은 젊은 기독 청년들을 향해 자기 나라를 대신해서 빈다며 ‘부디 일본을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한국은 기독교인이 이십오 퍼센트나 되지만 일본은 고작 영점일 퍼센트 정도”라고 하시며, “그 이유가 한국이 일본을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안타까움이 가득한 말투로 일본의 젊은이들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미래가 없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 그와 함께 죽음을 택하려 했던 한 일본 여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여자가 자살을 결심했던 날, 자신을 향해 들려오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노래를 듣는 순간 놀랍게도 그녀는 다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지요. 그 노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지금도 그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태어나길 정말 잘했어요. 살아있어서 너무 행복해요.’” 
이른 새벽 고요한 숲 속을 흐르는 물줄기처럼 일본인 목사님이 불렀던 그 노래는 그 자리에 있었던 이민섭 씨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습니다. 그는 통역된 가사를 받아 적으며 그 음을 기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그만 그 음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그 집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수첩에 적어둔 몇 줄의 가사가 전부였습니다. 그 곡을 떠올리기 위해 거기 참석했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물었지만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민섭 씨는 어떻게 해서든지 아름다운 곡과 함께 그것을 노래로 남겨놓고 싶었습니다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그의 안타까움을 알게 된 주위 사람들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네가 직접 곡을 만들어 보는 건 어때?” 처음엔 조금 망설였지만 그는 음을 붙여 보기로 했고, 거기에다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솟아나오는 가사를 덧붙여 새로운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드디어 곡이 완성되고 사람들에게 불리던 날, 그들의 얼굴에서 한결같이 기쁨의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상대방이 특별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아도, 태어나 존재하는 그 자체만으로 기쁨이 되고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안타까워하시면서 이스라엘과 성도 여러분들이 알기를 바라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향하여 위대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남들과 다른 특별한 면을 보이라고도 말씀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것 하나 제대로 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평상시에 이것을 깨닫지 못했고, 징벌을 받아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수많은 것을 잃고 실컷 고생하고서야 정신 차리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되지 않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러므로 평상시에 말씀과 기도 가운데 주님을 알아 가시기 바랍니다. 귀머거리가 되지 않도록 기도하십시오. 항상 주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소경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십시오. 항상 주님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알아 여러분의 삶이 건강하고, 풍성하며, 자신감이 넘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시오. 그 사랑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고, 또 승리하게 만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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