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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이 성장해야 (히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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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성장해야 (히 6:1~3)


금번 중국선교 여행 일정을 따라 하남성을 다녀왔습니다. 하남성은 중국 안에서도 기독교가 가장 부흥하고 또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곳입니다. 
하남성에 정식으로 등록된 세례교인 수만 280만입니다. 성 기독교 지도자들 말로는 전체 교인 수가 약 500만 정도는 될 것이랍니다. 그렇다면 하남성 인구가 1억에 육박하니까 5%이상이 기독교인인 셈입니다. 여타 다른 성이 1%가 넘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까 하남성은 아주 특별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하남성의 경우 교인들의 신앙성장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신앙훈련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남성에 공식적으로 허락 받아서 예배를 드리는 곳이 7000 곳 정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남성 안에 정식 신학교나 임시 훈련반에서 훈련 받아서 설교다운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 2000명 정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5000여 예배처소에서는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사람들이 설교라 할 수 없는 수준의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곳에서 성경공부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결국 이런 상황 속에서 교인들의 신앙성장은 거의 기대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남성에는 이단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계시를 받았다며 엉뚱한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또 그 말이 통합니다. 정말 골치 아픈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부흥하는데 교인들의 신앙성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숙한 교회에서 일어나야 할 일들이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반대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히브리서 기자도 비슷한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5:11-1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히브리서 기자는 4:13절부터 9장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관해 설명해 갑니다. 특히 7장부터 그 옛날 멜기세덱이라는 대제사장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설명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도중에 기록하지 않아도 될 내용을 삽화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독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멜기세덱의 비유로 설명하면 좋을 텐데 그렇게 하기가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지금 독자들의 영적 수준이 너무 낮아서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잔소리처럼 이야기합니다. 독자들이 예수 믿은 지 벌써 오래 됐는데 아직도 믿음의 초보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믿음이 성장했다면 남을 가르치는 수준까지 갔을 텐데 아직도 계속 남에게 지도를 받아야 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미 배운 내용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다시 초보 이야기를 해야 하는 형편이라는 것입니다. 

한 번은 젊은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아이가 귀여워 몇 가지 물었습니다. 부부의 표정이 어두워졌습니다. 알고 보니 두 돌이 되도록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를 위한 기도 부탁을 하면서 자세한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뇌에 조금 문제가 있어서 경미한 언어 장애가 있다는 것입니다. 엄마가 차마 설명을 다 끝내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렸습니다. 젊은 엄마의 안타까운 눈물에 마음이 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믿은 시간이 오래 될수록 믿음은 더 자라야 합니다. 믿음이 자라지 않고 늘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께서 안타까워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자라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실 때 안타까워하시지는 않으실까요?
그러면 우리의 믿음이 자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 말씀이 그 답을 줍니다.

‘초보를 버리고’
본문 6: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믿음의 초보 단계를 벗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운전 초보시절 저마다의 에피소드들이 있을 것입니다. 정말 진땀납니다. 하도 운전대를 꼭 잡아서 차에서 내릴 때 온 몸이 뻐근합니다. 특히 다른 운전자들에게 여러 가지로 민폐를 끼쳐서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초보 운전이라는 것을 알리려고 차 뒤편에 글을 써 붙여놓습니다. '초보운전', '초보입니다. 죄송합니다.' 어떤 사람은 공격적으로 써놓기도 했습니다. '당신도 초보일 때가 있었습니다' 오래 전인가 이해하기 힘든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집에 밥하러 갑니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아마도 아주머니인 것 같습니다. 하도 운전이 서투니까 사람마다 손가락질 하면서 "여자가 집에서 밥이나 하지 운전도 못하면서 이 바쁜 시간에 차를 끌고 도로에 나오나!"라는 욕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집에 밥하러 간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얼마나 미안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초보 시절은 누구나 꼭 거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초보시절이 길면 안됩니다.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초보시절이 있습니다. 누구나 꼭 거치는 시기입니다. 역시 이 시기는 길면 좋지 않습니다. 빨리 이런 시기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의 초보란 무엇을 말할까요? 오늘 본문이 그 답을 말씀해 줍니다. 5:12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신앙의 초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의 초보는 교회생활의 초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것이 곧 신앙의 초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교회생활의 초보를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반대로 교회 다닌 지 오래돼서 교회생활에 익숙하고 교회에서 여러 가지 주요직책을 맡아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이 신앙의 성숙 단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생활의 완숙 단계를 말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초보 단계냐 성숙 단계냐와 교회생활의 초보 단계냐 완숙 단계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교회생활의 초보 단계의 사람도 신앙의 성숙 단계에 들어 선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생활의 완숙 단계의 사람도 신앙의 초보 단계인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의 초보란 무엇일까요? 신앙의 초보란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라 했습니다. 즉 신앙의 초보 단계냐 아니면 성숙 단계냐는 하나님의 말씀과의 관계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히 5:13을 보면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수술 받기 전 기도받기 위해 집사님 한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오래 교회 다니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아직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해 본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이 분을 위해 간절히 안수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수술장에 들어가기 전 주님께 간절히 기도해 보십시오”라고 권면했습니다.

수술 후 병원을 찾았습니다. 이 집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수술장에 들어가기 전 주님께 정말 제 평생 처음 간절히 눈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놀랍게도 마음이 평안해 졌습니다. 마치 주님께서 제 손을 꼭잡고 함께 수술장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주님께서 저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제 평생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 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 속에서 깊이 체험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 때가 신앙의 초보를 벗어나는 때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럴 것이라고 막연히 감만 잡을 때도 많습니다. 이럴 때가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단계를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초보를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완전한 데로 나아갈 지니라’

본문 6: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데로 나아갈 지니라” 신앙의 초보를 벗어났으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완전한 데까지 믿음이 자라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완전한’이라고 번역한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원어로는 ‘텔레이오테스’(Teleiotes)를 번역한 말입니다. 그 뜻은 성숙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는 말은 신앙의 완성을 이루라 또는 신앙의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신앙의 성숙한 상태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즉 믿음의 진보를 이루라는 말입니다.

본문 6:1-2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여기서 여섯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회개이고, 둘째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고, 셋째는 세례이고, 넷째는 안수이고, 다섯째는 죽은 자의 부활이고, 그리고 여섯째는 영원한 심판입니다. 이 여섯가지는 초대교회 교인들은 신앙의 기초로 삼았던 교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그저 신앙의 기초교리에만 매달려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둑에 보면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정석은 잘 익혀두고 난 뒤에는 잊어버리라!” 바둑의 초보 때에는 철저하게 정석을 익혀서 정석대로 두어야 합니다. 초보 때 정석대로 두지 않으면 실수를 연발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수가 되려면 정석대로만 둬서는 안 됩니다. 고수만의 묘수는 정석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바둑 해설자들이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저 수는 하수들이 두면 야단 맞을 수입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고수가 뒀기 때문에 묘수입니다.” 알송달송한 말입니다. 어쨌든 고수들은 무엇엔가 얽매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기초를 잘 닦아야 합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개인적인 신앙훈련을 잘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생활도 철저하게 해 가야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믿음의 진보를 이루기 위해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요? 믿음의 성숙의 목표는 어디일까요? 엡 4:13을 보면 이 점에 구체적인 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한 마디로 그 심령이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진 상태까지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성숙에는 목표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처럼 살려고 애쓰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님처럼 살려고 애쓸 때는 결코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내가 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내가 나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중국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제를 나누며 여러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저들에게 물었습니다. “중국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한 일이 있습니까?” 현재까지 단 한 사람도 선교사를 파송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선교사를 파송할 계획은 있습니까?” 당분간 선교사를 파송할 계획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답은 간단했습니다. 지금 선교사를 파송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선 중국 정부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지금 중국 교회를 돌보기도 벅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선교를 생각하거나 토론할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화 도중에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장 선교를 하지 않더라도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가질 수 있지 않습니까? 선교하는 교회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자기들이 하려고 하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내가 노력해서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내 연약함과 내 부족함이 발목을 잡기 때문입니다. 내 한계가 내 앞 길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면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면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샘솟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나를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게 합니다. 그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이끌어 줍니다.

운남성 곤명에서 평신도 선교사 가정을 만났습니다. 이 분은 대기업 임원으로 어엿한 직장생활을 하던 분입니다. 그리고 부인은 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분입니다. 아이는 이제 초등학교 6학년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낯선 중국 땅에 와서 선교사 자녀들, 한인 자녀들을 기독교 정신으로 교육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여기 오게 됐느냐고 물었습니다. 가정 예배드리며 늘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해 왔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에 있는 선교사 자녀들, 한인 자녀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그런데 가정 예배를 드리던 중에 세 식구 마음에 저들을 도와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강력하게 일어나더랍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답니다. 그렇지만 현실의 장벽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놓고 하나씩 기도했답니다. 놀랍게도 그 문제들이 하나 둘 씩 해결되며 길이 열리더랍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순종하고 여기까지 왔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마음을 소중하게 받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능력을 덧입고 그 마음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채워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마음이 여러분 안에 일어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을 덧입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를 바라십니다. 믿음의 초보에 머무르지 말고 성숙한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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