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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이사랴와 욥바 (행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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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랴와 욥바 (행 10:1~8)


한국 교회에서 이단으로 분류되는 신앙 집단중에 기성 교인들을 접근하여 전도할 때 언제나 구원 문제를 들고 나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분명한 구원의 깨달음과 죄 사함의 확신의 순간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의 예배 행위, 봉사 행위, 그리고 우리의 헌신 심지어 우리의 기도 행위등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로 소위 그들 나름의 전도를 시작합니다. 나는 이들이 구원과 죄 사함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경도 그것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들의 주장처럼 소위 그들이 주장하는 방식으로의 구원의 극적인 체험을 갖기 전에 우리들의 일상적인 종교적 노력, 예배라든가 기도라든가 봉사와 헌신 행위등이 정말 아무 의미가 없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본문에는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도 성령을 체험하지도 못한 이방인 이탈리아 사람 로마 군 장교인 백부장(백명 거느림)고넬료의 종교적 경건 실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가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의 소위 그의 종교적 실천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오히려 주님은 그의 종교적 실천을 하나의 진지한 구도의 과정으로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고넬료로 하여금 온전히 주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도록 사도 베드로를 만나게 하시사 예수를 구주로 믿게 하시고 성령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사도행전의 역사에서 에디오피아 내시 다음으로 이방인으로 복음을 받아드린 자가 되어 이방인 선교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평신도 선교사가 됩니다.

본문에 보면 이 군인 고넬료가 거주하던 곳이 이스라엘 땅의 해안도시 가이사랴로 되어 있고, 이제 그가 베드로를 만나도록 준비하신 베드로의 방문지는 가이사랴 남으로 불과 50km 떨어진 역시 해안 도시 욥바(오늘날의 텔아비브 바로 근교)로 되어 있습니다. 가이사랴에 있던 고넬료가 역시 해안도시였던 욥바에 머물고 있던 베드로를 가이사랴로 청함으로 유명한 고넬료의 회심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 두 해안도시는 당시 로마로 오가는 모든 배들이 정박하는 항구 도시였고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침내 로마와 온 세상으로 전파할 또 하나의 선교 증인과 선교사 가문이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인 선교의 도구로서 주께서 이 고넬료를 준비하고 쓰신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선교의 도구로 쓰임 받음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이 물어야 할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교의 도구로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준비되어야 할 영성-무엇일까요?

1.‘가족 

신앙’의 영성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개인을 구원하는 영성에서 출발합니다. 복음을 수용하는 것도, 예수를 믿기로 결단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결단에 근거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나와 절친한 누군가라도 나를 대신하여 예수를 믿을 수 없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믿음에 근거하여 내가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기독교 신앙이 개인에 대한 관심에서 머문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복음을 통한 구원이 정말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바꾸는 중대한 사건이라면 이 중요한 구원이 나에게만 일어나는데서 어떻게 만족할 수 있단 말입니까?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연스럽게 이 놀라운 구원이 그 누구보다 먼저 내 가족에게 임하기를 갈망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적 신앙은 개인적이면서도 가족적인 더 나아가 사회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구약에 노아가 갖게 된 여호와 신앙의 궁극적인 축복은 그 가족을 구원하는 축복이었습니다. 
비록 그가 그 시대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방주로 인도하지 못했어도 그 가족을 구원함으로 결국 구속사를 이어가는 믿음의 명문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11:7을 함께 읽겠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바울이 빌립보의 감옥에서 간수와 죄인들에게 선포한 복음도 바로 이 가족 구원의 복음이 아니었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오늘 본문에서 고넬료는 아직 예수님을 알지는 못했어도 유대 땅에 군인으로 주둔하면서 유대인들의 여호와 신앙을 받아드리면서 그 온 가족이 함께 그런 결단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본문 2절에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라고 기록되고 있지 않습니까. 

행10:22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는 정복자로 성지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신앙의 대상만은 그도 겸손하게 받아드려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침내 베드로를 그에게 보내시어 그와 그의 집이 예수를 구주로 믿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 가족이  구원을 받지 못했을 때 어떻게 우리가 담대하게 온 세상에 나아가 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가족이 먼저 구원받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가족 신앙의 영성을 유산으로 계승하는 믿음의 명문가가 되기를 기도하십시다. 지금은 사순절-가족이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수님의 수난의 의미를 묵상하고 부활의 주를 찬양하는 가족이 되도록 기도하십시다.

2. 구제의 영성입니다.

오늘 이미 묵상한 행10:22에 우리는 성경이 고넬료를 의인이라고 소개한 대목을 읽었습니다. 어떤 삶을 살았기에 그가 어떤 의미에서 의인으로 소개되고 있는 지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행10:2의 본문이 그 대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제의 실천이었습니다.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그것이 바로 정복지 유대 땅 이웃들에게 그가 칭찬을 받은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구제는 성경에서 경건의 실천 혹은 의의 실천으로 가장 보편적으로 강조된 신앙인의 덕목이었습니다. 마태6:1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여기서 예수께서 강조하신 의의 행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 대답은 바로 다음 절인 2절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구약 시대와 초대 교회를 거쳐 오면서 ‘의의 실천’은 바로 ‘구제의 실천’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한 사람이 새롭게 여호와 신앙, 혹은 예수 신앙을 갖게 되었을 때 이웃들에게 보여 지는 현저한 삶의 변화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그가 이제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다는 것도 중요한 변화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웃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화는 아니지요. 우리의 이웃들은 우리가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는 것으로 감동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교회에 나가게 됨으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주목합니다. 그런데 교회 나가기 전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이던 우리가 이웃들을 생각하고 이웃들과 나눔의 삶을 살기 시작할 때 그것이 바로 이웃들에 대한 간증이요 감동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고넬료가 새롭게 갖게 된 믿음의 경건(2절-그가 경건하여)은 바로 이런 구제의 실천으로 나타났고 성경은 그것이 바로 경건의 증거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약1:27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그래서 구제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이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선교와 함께 영성 실천의 두개의 날개로 강조된 영성 실천의 덕목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 목장 교회들이 선교 사역과 더불어 구제 사역에의 헌신을 독려해온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갈2:9-10에서 읽겠습니다.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무슨 말입니까? 내가 감당할 가장 중요한 사명은 이방인 선교이지만 선교와 함께 잊지 않고 실천하고자 한 것이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실천이었다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바울을 쓰신 이유, 고넬료를 사용하신 이유가 바로 이런 영성의 실천을 귀하게 보심이었다면 오늘의 우리도 구제의 영성이 풍성하기를 기도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순절 저는 우리 목장 혹은 우리 가족이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을 찾아 그들과 반나절이라도 함께 한다면 하늘의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3.기도의 영성입니다.

한 성경 학자는 고넬료의 집은 두개의 창을 열고 있었다는 증언을 했습니다. 하나는 이웃을 향한 창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구제의 실천인 것입니다. 그에게 또 하나의 열린 창이 있었는데 이 창은 하늘을 향한 창 곧 기도의 창이었 것입니다. 

본문 2절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우리가 정상적인 성도의 삶을 산다면 기도의 삶을 피해 갈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고넬료의 기도의 삶을 의식적 차원에서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항상 기도하고 살고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기도가 곧 그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는 아직 하나님만 알고 예수님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 4절의 증언을 읽어 보십시오.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바가 되었으니”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본문의 증언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아직 예수를 모르던 고넬료의 기도도 열납하시고 기억하셨다면 예수 믿고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 성도가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시고 열납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 사는 것일까요? 
                  
본문에 이어지는 기도의 드라마를 지켜보십시오. 기도하는 고넬료를 보시고 하나님의 천사는 그에게 욥바에 있는 베르도를 청하라고 말씀합니다. 9절 이하에 보면 한편 베드로도 길 가다가 기도 시간이 되어 욥바 피장이(무두장이/짐승 가죽으로 물건을 만드는 사람)시몬의 집에 들어 갑니다.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시(정오 12시)더라” 바로 이 기도시간에 그는 환상을 보고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깨고 가이사랴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여 고넬료와 그의 가족 친척 친구들이 함께(24절) 구원받고 성령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가 결국 그의 집을 구원하고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고넬료의 집은 하나님이 쓰시는 신앙의 명문가가 된 것입니다. 

나는 오늘 한국 교회 역사의 초기에 이렇게 기도로 쓰임받은 한국판 고넬료의 가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주인공 서씨는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 어릴 적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글쓰기에 뛰어났고 글을 읽음으로 새로운 세상을 동경하여 청년 시절 이미 중국을 오가며 홍삼 비즈니스를 시작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도 신실하고 총명하였으며 열린 마음으로 이웃을 돌아보던 진취적인 분이셨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만주 영구에 장사차 갔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고생할 때 영국인 의사 헌터의 치료를 받고 이어 그의 소개로 선교사 맥킨타이어 목사를 만나 전도를 받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며 복음의 메시지에 감화되어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또한 이 곳에서 맥킨 타이어와 같은 선교회에 소속된 선교사 로스를 만나 성경 번역에 참여합니다. 

그는 이제 권서인(매서인)이 되어 황해도 소래에서 그의 동생과 함께 한국 최초의 소래 교회를 개척하게 됩니다. 그는 이어 서울에 와서 남한 최초의 교회인 새문안 교회를 설립하게 됩니다. 이 분의 이름이 서상륜이고 그는 그의 동생 서경조와 함께 한국 초대 교회의 신앙의 명문가를 만들게 됩니다. 새문안 교회 설립당시 14명의 세례 교인이 있었는데 그중 13명이 서상륜이 전도한 분들이었다고 합니다. 

기독교 사회 책임에서 섬기시는 서경석 목사님도 바로 이 가문 출신이십니다. 바로 이 서씨 가문이 민족 복음화의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이런 믿음의 명문가를 꿈꾸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 집도 이웃을 향한 창을 열어 사랑을 실천하고 하늘을 향해 창을 열고 기도를 시작한다면 우리 집에서도 가이사랴의 기적, 가문의 영광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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