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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럼에도 살만한 세상 (창 1: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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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살만한 세상 (창 1:26~31)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 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 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 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 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 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26-31)

세계 경제가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경제도 어렵습니다. 기업들마다 월급을 줄여 일자리를 늘리고 관공서들도 월급을 줄여 더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길들을 열고 있습니다. 구청 공무원들도, 구청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월급을 떼내어 여기저기 일자리를 만들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다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미국발 경제 위기는 서브 프라임 몰기지(Sub-prime Mortgage)로 인해 발생 되어졌습니다 이것은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서브 프라임 몰기지란 미국 사람들이 저희들 나라 안에서 신용등급이 낮은 사람들에게 주택마련 자금을 빌려주는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을 말합니다. 그런데 금융사들이 너무 무분별하게 금융대출을 하자 집값이 거품으로 폭등하게 되었고 거품이 꺼지면서 집값이 폭락하자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줬던 금융사들이 큰 타격을 받으면서 미국 금융기관들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세계 금융기관을 비롯한 경제기구들이 서로 묶여 있다 보니 유럽과 아시아 경제까지 흔들리면서 오늘의 세계 경제위기를 몰고 왔습니다. 유럽의 몇 국가들은 국가부도를 초래했고 아프리카도 몇 개 나라도 부도를 냈습니다. 아시아의 주식시장도 붕괴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닐 듯 보여 집니다. 달러 환율이 폭등하고 주식시장이 폭락하여 전년대비 절반도 더 떨어졌습니다.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가 염려들을 많이 하지만 10년 전 외환위기를 겪은 우리나라이기에 잘 견뎌 내리라 기대합니다. 

어차피 경제는 늘 호황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올라갈 때가 있는가 하면 내려 갈 때도 있습니다. 제가 짧은 세월을 살았지만 제가 경험한 바로는 10년을 주기로 경제위기가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1978년부터 일어난 첫 번째 오일쇼크는 세계 경제를 뒤흔들었습니다. 1988년부터 약 3년 동안 세계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엄청난 위기를 겪었습니다. 

일본은 그때 얻어맞은 상처를 치유하는데 20년 넘게 걸렸습니다. 1998년에는 우리가 이미 잘 아는 아시아의 외환위기였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때 국가부도 위기까지 가서 결국 IMF의 돈을 빌려 나라경제를 지탱시켰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8년에 미국의 서브프라임 몰기지 사태가 세계를 경제파탄에 몰아넣었습니다. 아직도 세계 경제가 그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민일수록 더 살기가 힘들어 지는 것이 이런 경제위기입니다. 그러다보니 서민들은 세상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래저래 생활고에 시달려야 하고 되는 일은 별로 없는 듯합니다. 

이런 때에 강호순의 연쇄살인 사건까지 겹쳐 우리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였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엽기적인 살인행각은 결코 이 땅에서 다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인데 자꾸만 일어납니다. 대한민국은 살기 좋은 나라인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마음이 아픕니다. 삼천리금수강산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나라인데 어찌 제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살해할 수 있을까? 누가 선량했던 우리나라 사람을 이렇게 악하게 만들었습니까? 안타깝습니다. 

언제인가 미국신문에 끔찍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애틀랜타에서 약 60여마일 떨어진 아덴스(Athens)라는 작은 도시에 사는 한 흑인 여성이 자기가 낳은 아이를 낳자마자 칼로 심장을 찔러 죽였습니다. 이 흑인 여성은 너무나 어려운 인생을 살고 있었는데 자기가 낳은 아이에게 이런 어려운 인생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 흑인 여성은 인생은 고통스러운 것이니 구태여 오래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을 것입니다. 생명이 있어 아직 살고는 있으나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하러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이 흑인여성 말고도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을 것입니다. 

“언제까지 이런 고통스런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이런 고통을 받으며 살아야 하나?”
“더 이상은 못살겠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못된다!”

때로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못되는구나!” 그래서 어떤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을 합니다.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여겨질 때 자살을 택합니다. 

요즘 북한이 안달을 합니다. 우리 한국정부가 가만히 있는데도 돈 안 바친다는 것 때문인지 우리 정부를 헐뜯고 대통령에게 입에 담기 민망할 욕을 퍼붓더니 요즘엔 위협적인 으름장을 놓습니다. 또 다시 ‘핵’을 가지고 벼랑끝 전술을 일삼는 그들이 미사일을 쏜다는 것인지, 인공위성을 쏜다는 것인지 모르지만 위기를 조성합니다. 서로 간의 약속이었던 영해나 영공을 지나갈 수 없다며 협박합니다. 공짜로 지나가는 것도 아니고 일 년에 수 백 억원씩 돈을 주었는데도 생떼를 씁니다. 우리의 내부 분열을 획책하려는 의도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북한의 공산당에 대한 경계를 잘 해야 하는데 어떤 부류는 우리나라를 헐뜯고 북한의 김정일과 공산당을 좋아하는 친북세력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북한의 동포들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를 보고 들으면서도 친북내지는 종북노선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답답하고 이해가 안갑니다.

어떤 이들은 그 꼴 보기 싫다며 이민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땅이 살만한 곳이 못 된다는 것이죠.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면 그래도 이 세상은 살만한 곳입니다. 특히 우리가 사는 이 나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이 땅이 살기 싫다고 자살도 합니다. 정말 이 땅과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못되나요?

아닙니다. 그래도 이 세상은 살만한 곳입니다.

첫째로 더 좋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나빠진다고 해도 역사를 보면 점점 더 좋아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과거보다는 현재가 더 좋아졌고 미래는 더 좋아질 것이 분명합니다.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는 사람의 평균수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서기 660년대의 평균수명은 25세였고, 1800년대는 37세, 1900년대는 45세, 그리고 2000년을 넘어서는 80세에 이르고 있습니다. 과학발전의 가속도로 보면 다음세대는 평균수명이 몇 배로 늘어날 수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병의 발생과 사망속도보다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과학의 발전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인 1세기에는 평균수명이 20세였다는 조사를 보면, 20세에서 40세로 평균수명이 늘어나는데 1900년이 걸린데 비해, 40세에서 80세로 늘어나는 데는 불과 100년도 안 걸렸습니다. 곧 평균수명이 100년을 넘어설 것입니다.

의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과학의 발전은 삶의 환경도 편리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지금 삶의 환경이 아무리 나쁘다 해도 과거보다는 매우 좋아졌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냉장고도 없었고, 세탁기도 없었으며, 전기불도 없었습니다. 라디오나 TV도 없었습니다. 수화기라해서 높은 나무에 철사줄을 늘여놓고 광석에 바늘을 꽂아 수화기에 연결하면 라디오 방송이 잡혔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나오면서 전자세계에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세탁기와 냉장고의 출현은 여자들에게는 혁명이었습니다. 여인네들은 냇가에 나가 손빨래를 하느라 겨울에는 손등이 다 불어터졌습니다. 아이를 낳고나면 기저귀 빨래가 방과 마당에 가득 널려 있게 마련입니다. 산모의 일감이 첩첩산중이었습니다.

지금은 얼마나 편해졌나요! 아무리 빨래감이 많아도 세탁기에 넣으면 금방 빨아 나옵니다. 기저귀는 한번 쓰면 버리는 1회용이 나와서 10쌍둥이 길러도 문제없습니다. 최근에는 직장에서 코드만 누르면 밥솥의 밥이 저절로 되는 시대입니다. 벽결이 TV로 안방극장에서 24시간 TV를 봐도 시비 걸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아무리 힘들어도 30년-50년 전보다는 훨씬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좀 어렵다고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맙시다. 우리의 부모님 시대보다는 우리가 훨씬 좋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보다 더 좋은 삶을 살 것이고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좋은 음식을 먹을 것입니다. 세상은 좋아지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우리는 혼자가 아니니 살만합니다. 가끔 TV에서 사자와 버팔로의 싸움을 봅니다. 1:1로 싸우면 사자는 상대도 안 됩니다. 단체로 싸워도 사자는 버팔로의 상대가 안 됩니다. 문제는 사자는 떼로 덤비는데 버팔로는 늘 혼자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자의 공격이 있으면 수 백 마리의 버팔로는 도망가기 바쁩니다. 부모가 사자의 공격을 받아도, 자식이 물어 뜯겨도 부모의 버팔로는 도망만 가지 함께 싸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버팔로는 위기 때 혼자입니다. 사자는 어미사자를 비롯해 모든 가족(딸들)이 하나가 되어 합동작전을 벌립니다. 그러니 등치가 아무리 커도 버팔로는 사자와의 싸움에서 백전백패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만물의 영장으로 홀로 세상을 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동료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가족들이 있습니다. 입원과 요양을 하면서 수많은 교우들이 저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저를 든든하게 하고 안심시키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제게 많은 교우들이 싸인을 해서 쾌유를 비는 롤카드를 보내주셨는데 어린 주일학교 학생이 “목사님 빨리 나으세요. 기도할께요!”라고 싸인한 것을 읽을 때, 콧날이 시큰하며 감사함이 가슴을 메웠습니다. 

뉴스를 보니 아내를 위해 신장을 이식해 주신 분이 너무 고마워 남편이 자신의 신장을 다른 사람에게 기증한 분이 계셨습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너무 고맙고 감사할 뿐이라 했습니다. 마음을 열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마음을 닫고 스스로 밀폐된 공간을 만들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세상을 사는 것같이 낙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양을 하며 내 생애에 TV를 가장 많이 시청하였습니다. 자칫 연속극의 달인이 될 뻔했습니다. 통쾌한 복수를 이어가는 아내의 유혹, 천추태후, 다시 돌아온 일지매까지 보았습니다. 그중에서 ‘에덴의 동쪽’은 형제애를 물씬 풍겼습니다. 마지막 장면이 멋있었습니다. 잠깐 오해를 했던 형을 구하기 위해 악당들의 소굴로 들어간 동생 이동욱 검사가 묶여 있는 이동철 형에게 말합니다. “형! 내가 너무 늦었지? 미안해.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그때 악당이 동생에게 총을 발사하자 형이 동생을 막아서며 자신이 총알받이가 되고 동생을 살려냅니다. 그 멋진 장면을 다시 볼까요? 형이 있고 동생이 있어 그들은 외롭지도 않고 세상의 삶이 좋기만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님들!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을 만물의 영장으로 삼으신 것은 우리에게 고매한 사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족, 친구, 동료, 교우 등을 엮는 것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있기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만한 곳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랑은 무엇입니까? 에릭 프롬(Erik Fromm)은 사랑을 5가지 속성으로 정의를 내렸습니다.

① 관심(Concern)입니다. 
② 이해(Understanding)입니다.
③ 돌봄(Care)입니다.
④ 존중(Respect)입니다.
⑤ 주는 것(Giving), 또는 나눔(Share)입니다.

서로 관심을 갖고 이해하며, 서로 돌보고, 서로 존중하며, 내게 소중한 것을 남을 위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입니다. 내 안에 이 사랑이 있는 한 세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사랑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더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셋째로 나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이 세상은 살만한 곳입니다. 예수님이 내 곁에 계시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봉독한 오늘의 말씀,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는 장면이 간단하게 나옵니다. 엿새 동안에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첫째 날, 빛을 만드시며 시작한 창조역사는 맨 마지막 날에 인간을 만들면서 절정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만들고 난 후에는 꼭 “보시기에 좋았더라”(God saw that the it was good)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God saw all that he had made, and it was very good)고 말씀하셨습니다. “심히”라는 부사를 하나 더 붙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보다 우리 인간이 심히 더 좋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사랑하신다는 징표입니다. 얼마만큼 더 사랑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요한복음에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스스로 독생자가 되셔서 우리를 죄악의 심판과 멸망으로부터 살려내시려고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한 달반 동안 요양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양평에 머무는 동안 창밖에 펼쳐지는 들녘과 산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에 젖곤 했습니다. 그런 여유를 가져본 적이 별로 없었기에 제게는 매우 뜻 깊은 기간이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때 이미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물론 사춘기 때 신앙의 방황이 있었지만 한번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저는 끝내 목사가 되었습니다. 제 얘기를 얼른 들으면 “어려서부터 목사가 되려 했으니 경건하고 아주 순수하게 자랐겠구나”고 상상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전쟁터나 삶의 현장에서가 아니라 죄악의 삶속에서 파란만장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려서부터 부끄러운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참외서리, 토끼서리는 기본이고요, 차마 생각도 하기 싫은 죄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으나 죄의 항목은 다른 이들보다 많으면 많았지 전혀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창피한 인생을 살았음을 느끼고 또 느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매번 용서하시고 살려주셨습니다. 목회도 잘 하게 하셨습니다. 좋은 동역자들과 교우들을 제게 붙여 주셨습니다. 가정도 잘 지키게 했고, 자녀들도 잘 키우게 하셨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문대학 유학도 하고 보통서민들은 경험하지 못하는 좋은 경험을 많이 하게 하셨습니다.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깊이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부족하고 죄 많은 인생을 사는 종인데도 이 세상에서 벌하지 않으시고 지금까지 참고 용서하시며 기다리셨습니다. 많은 축복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내가 죽어 하나님 앞에 선다면 하나님은 뭐라 하실까? “내 너를 그렇게 사랑했거늘, 내 너를 그렇게 믿었거늘, 너는 어떻게 살았느냐?” 물으시면 난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목사인 저는 솔직히 두렵고 떨렸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한일 주님께서 보시고
훗-날에 나를 보고 무어라 하실까
주님 내게 오시면 나 어찌 대할까?
멀리 방황하던 나 불쌍한 이 죄인
이제 주만 생각하며 세상 영광 버리고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만 따라 가오리다.”(복1310: 주님내게 오시면)

아무리 생각해도 주님 앞에 선다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설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기왕에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는다면 차라리 주님 낯 피해서 지옥으로 뛰어가는 것이 나을 듯 했습니다. 솔직한 고백입니다.

시편기자가 이렇게 부르짖은 것도 저와 같은 심정이었기 때문 일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시 25:7) 
『Remember not the sins of my youth and my rebellious days; according to your love remember me, 
for you are good, O LORD.』

이 죄책감 때문에 몸부림치는 제게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염려하지 말거라. 나는 용서한 네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 성경을 들고 이 말씀을 찾았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25) 

이 말씀을 붙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붙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사 64:9) 

하나님은 히 10:17에서도 죄로 번민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10:17)

사랑하는 여러분!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사순절 때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나의 죄를 도말하시고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려고 당신의 몸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모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우리에게 이 사랑을 보여주신 징표입니다. 저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내가 네 죄를 용서하고 다시는 기억조차 하지 않을 것이며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리라”는 음성을 들려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는 기간이 사순절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정말 살만한 곳이 아닙니까?

나를 이 세상에 만들어 놓으시고 “보시기 심히 좋았더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더욱 큰 목소리로 오늘 여러분에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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