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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하는 사람들 (행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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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들 (행 6:1~7)
  

저는 목사로서 <우리 교회가 몇 점 짜리 교회일까>하는 생각을 종종 해 봅니다. 세상에 교회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완벽한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교회가 다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교회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회, 그 중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닮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완벽한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심각한 문제 한 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히브리파란 처음부터 본토에 살던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지요. 그리고 헬라파 유대인이란 다른 나라에서 살다가 온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이 흩어진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그들은 그 곳의 언어와 풍속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함께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마치 미국에서 태어나 공부한 한국 처녀가 우리나라로 시집와 사는 것과 비슷해서 어색하고 적응이 잘 안 되어 늘 갈등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을 돕는데, 그 과정에서 헬라파 유대들이 소외되는 일이 발생했고, 이것이 불평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본래 가장 민감한 것 중 하나가 돈 문제입니다. 헬라파는 자신들만 소외된다고 생각하니 섭섭했습니다. 이 불화는 매우 엄중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교회가 막 생겨나서 복음이 퍼져나가는 중인데, 이 문제를 잘못 처리하면 교회가 분열되고 전도의 문이 막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본문을 보면 그들은 정말 멋지게 해결했습니다. 그 해결책은 교회 재정을 맡아 관리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전담할 집사님들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 듣는 사람 일곱 명을 뽑아 집사로 세우고 그들에게 모든 재정 관리를 맡겼습니다. 

2절 이하를 보십시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래서 제자들은 제자들대로, 집사님는 집사님 대로 일을 분담한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일만 분담한 게 놀라운 게 아니라, 진짜 감동적인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것은 일곱 명의 집사님들이 전원 헬라파였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세요.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라고 했는데, 이 이름들은 모두 헬라식 이름입니다. 이들은 헬라 지역에서 태어나서 살았고, 이름도 그렇게 된 것입니다. 

집사님 일곱 명을 히브리파가 아닌 헬라파로 채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이것은 교회의 중심이었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그 동안 소외되었다고 섭섭해하는 헬라파를 끌어안은 것을 보여 줍니다. 헬라파가 소외되지 않기 위해 헬라파에게 모든 재정을 맡긴 것입니다. 그들은 헬라파를 밀어낸 것이 아니라, 끌어안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화해와 사랑입니다.

우리도 소홀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밥 먹으러 가는데, 빠지는 사람이 생깁니다. 때로는 부주의하거나 분주해서 알려주는 것을 깜빡 잊거나, 혹은 제대로 전했는데도 중간에서 전하는 사람이 전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모릅니다. 그래서 나중에 알게 될 때 섭섭함을 느낍니다. 그 사람이 어른스럽고 너그러우면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이 섭섭함을 잘 이기지 못하고 오래 갑니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심지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어디나 그런 일들은 있을 수 있지요?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이런 갈등과 위기를 멋지게 극복한 것입니다.

이런 양보와 사랑은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그것은 성령 안에서 가능했습니다. 본문의 제자들은 바다와 같은 너그러운 마음을 보여줍니다. 제정을 관리하는 데서 자신들도 다 빠지고, 히브리파도 다 빠집니다. 헬라파에게 창고 열쇠를 맡깁니다. <이제부터는 당신들이 직접 관리하세요. 그래서 헬라파가 빠지지 않도록 잘 챙기세요>라고 한 것입니다. 본문의 제자들은 정말 멋집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사랑이 많고 너그러운 사람들이었나요? 아닙니다. 복음서를 보세요. 복음서의 제자들은 옹졸하고 속이 막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9장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도착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도 화가 났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들을 멸하자>고 예수님께 건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결코 너그러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제자들끼리도 갈등이 많았습니다. 절대 지지 않았습니다. 서로 자신이 크다, 훌륭하다고 싸우다가 예수님의 책망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게 복음서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제자들은 너무도 다릅니다. 제자들은 헬라파들에게 다 양보했습니다. 다 넘겨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를 하나되게 했습니다. 얼마나 너그럽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렇게 되길 원합니다. 우리도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관용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철저히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바뀐 것도 성령께서 역사하신 결과였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면 이렇게 바뀝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성령은 사랑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의 아버지입니다. 요한일서 4장 7-8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또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기도 한데,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을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사랑의 영이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은사들 중에서 최고는 사랑의 은사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상대방을 포용합니다. 함께 하기를 좋아합니다. 불편하게 하는 사람과도 잘 어울립니다. 감싸주면서 함께 합니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 예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돌보아줄 사람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는 평소에 품행이 나빠 학교에서도 골칫덩어리입니다. 선생님들도 그 아이 때문에 머리를 흔듭니다. 이제 그 아이의 인생은 정말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합니다. 

이 때 어느 가정에 아버지와 아들이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너 아무개 알지? 그 아이가 얼마 전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이제 그 아이들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어. 더구나 그 녀석은 품행도 나쁘고, 성적도 형편없다면서. 그래서 말인데, 이제부터 네가 그 녀석을 도와라. 네가 친하게 지내. 공부도 같이 하고, 마음을 좀 어루만져 주라구. 너 밖에 없다!> 

그래서 아버지의 부탁을 받은 아들이 부모를 잃은 아이를 찾아갔습니다. 그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난 너와 친구가 되고 싶어. 우리 아버지가 원하시는 게 바로 그거야. 널 잘 도우라고 하셨어. 우리 가까이 지내자. 공부도 나와 함께 하자구. 내가 가르쳐 줄게. 그리고 이제 못된 녀석들과의 관계는 정리해. 이젠 나와 친구가 되는 거야!> 그 녀석은 처음엔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나중엔 감동이 되어 둘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에서 아들에게 도와 주라고 말하는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의 부탁을 듣고 찾아가는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못된 짓을 하는 아이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문제아와 같은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에게 손을 내밀면서 <친하게 지내자>고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9절을 보면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교제하기를, 함께 친하게 지내길 원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가 중요합니다. 만약 내미시는 손을 거절하면서 <난 나 혼자가 좋습니다. 난 누구와 함께 지내는 게 질색입니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는 절대로 예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구원은 주님과 함께 하는 데서 얻습니다. 함께 지내는 데 실패하면 예수님의 사람이 되기 힘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함께 하는 삶을 잘 살기를 원하십니다. 첫째는 주님과 함께 하고, 둘째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기를 원하십니다.

천국은 <함께 하는 나라>입니다. 거기는 민족, 언어, 성별, 노소의 차이가 없습니다. 장로교인도, 감리교인도 다 같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나라입니다. 경상도 사람도, 충청도 사람도, 강원도 사람도, 호남 사람도, 서울 사람도 다 같이 삽니다. 함께 하는 데 성공하시길 기원합니다. 본문의 제자들처럼 너그러운 성품을 가지십시오. 관용하십시오. 양보하십시오. 사랑하십시오. 

그 사람이 싫다구요. 어울리기 싫은 사람이라구요. 그럴 때 더더욱 관용하고 사랑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거룩한 분이면서도 세리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세리는 당시의 죄인들입니다. 사람들은 세리들을 짐승보다 못하게 취급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아버님께서 과수원을 하시던 봉화에 제가 처음 간 것은 고등학교 일 학년 때였습니다. 방학이 되어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주일에 집사님 가정에서 아버님을 점심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가는 중에 아버님이 말씀했습니다. <그 집에 가거든 꼭 집사님 손을 잡고 인사드려라> 가보니 그 분들은 생긴 모습이 이상했습니다. 눈썹은 이상하게 길고 색이 짙었고, 손은 오그라들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나병을 앓았던 분들이었습니다. 나환자촌에서 만나 결혼했고, 완치되어 사회로 나온 분들이었습니다. 눈썹이 다 빠져 머리칼을 심었는데, 이게 계속 자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발하듯 눈썹을 잘라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그라진 손은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아버님이 시키는 대로 손을 잡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 순간 집사님이 긴장하더니 얼굴이 환하게 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들은 완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네 사람들의 멸시를 받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들과 악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손을 잡자, 감격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 다음부터 너무도 친밀해졌습니다. 그 집사님 가정은 저희 아버님 과수원 일들을 만사를 제쳐놓고 도와 주셨는데,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저희 아버님이 집사님 내외를 스스럼없이 대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날 저는 부인 집사님이 오그라진 손으로 만든 음식을 너무도 잘 먹었습니다. 

여러분, 가까이 하기 힘든 이들일수록 여러분들이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감격할 것입니다. 친하지 않은 이들과도 친하게 지내려고 애를 쓰십시오. 기도하십시오. 모든 사람과 잘 지내십시오. 밀어내지 마시고, 다가올 수 있게 하십시오. 

그리고 불편한 분들과도 함께 하십시오.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그렇게 하십시오. 특히 서로 다투어 관계가 악화된 분들은 특별히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살려면 반드시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 미움이 자신에게 독이 될 것입니다. 

어느 숲 속에 작은 연못이 있었습니다. 연못에는 두 마리의 물고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녀석은 먹이를 두고 다투느라고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한 녀석이 다른 녀석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기뻐했습니다. <이제 이 연못의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 녀석도 죽었습니다. 그 이유는 먼저 죽은 녀석이 썩어 연못이 오염되었고, 그 오염된 물을 마신 녀석도 죽은 것입니다. 

권선영이란 한의사께서 쓰신 글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속이 상하거나 미움이 쌓이면 가슴에 응어리가 진다. 미움은 증오를 낳고 증오는 강한 분노를 낳는다. 그 분노는 가슴 한 가운데에 있는 단중혈을 막는다. 단중혈이 좀 심하게 막힌 사람은 대부분 가슴 가운데를 손으로 눌러보면 아프다. 단중혈이 막히면 세상이 어두워 보인다. 단중혈에 조금이라도 여분의 공간이 있어야 마음에 여유와 기쁨이 있게 된다. 이곳이 막히면 즐거운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자신이 우울하고 불쌍한 존재로 생각된다. 이유 없이 화와 짜증이 자주 나고 남과 이야기도 하기 싫어진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공격하는 적으로 보인다. 이 상태가 심해지면 가슴에 쌓인 분노와 증오의 화기가 사지로 넘쳐나게 된다. 증오가 가슴의 공간을 다 채우고 넘쳐 온 몸으로 퍼져 팔과 다리의 관절까지 흘러가게 된다>

그런가 하면 이런 조사도 있습니다. 미국의 모 대학에서 60세가 된 사람 중에서 건강 상태와 경제 수준이 비슷한 6천명을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후 그들을 다시 추적했는데, 20년 후에도 살아있는 사람은 겨우 48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 5,500여명은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조사해보니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상대방을 죽이면 나도 죽습니다. 상대방을 살리면 나도 삽니다. 그게 하나님의 상생의 원리입니다. 

성도 여러분, 미워하지 마십시오. 담장을 쌓고 살지 마십시오. 잠언 10장 12절은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고 가르칩니다. 용서하십시오. 먼저 손 내미십시오. 화해하십시오. 용서는 한 순간입니다. 자존심을 버리십시오. 그 다음에는 영원히 행복할 것입니다. 짐을 던져버리면 그 순간부터 계속 가볍습니다. 그러나 던지지 못하면 계속 눌려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충만하길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히브리파, 헬라파의 갈등이 없길 원합니다. 지연에 따른 차별, 학벌에 따른 차별, 부에 따른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오래 믿은 사람과 새로 오신 분들 사이에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앞장서서 교단의 장벽, 교파의 장벽을 넘기를 원합니다. 부산의 주변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함께 잘 지내야 합니다. 함께 부흥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복을 주십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난제를 사랑으로 해결한 후 어떤 복을 받았습니까? 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할렐루야! 다가온 위기가 오히려 교회 부흥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에게 다가온 경제 위기를 사랑으로 극복하길 원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확산되고 있는 잡 셰어링(직장 나눠 갖기)이나, 노사간의 화해 무드는 결국 사랑입니다. 추우면 서로 끌어안아야 얼어죽지 않습니다. 사랑만이 위기를 극복하게 합니다. 

어려울수록 부부 사이에 꼭 끌어안으세요. 예배 시간에 나란히 앉으세요. 왜 서로 다른 문으로 들어와 다른 문으로 나갑니까? 그러니 받는 은혜도 달라서 <오늘 그 말씀 당신한테 주시는 말씀이더라>고 하면서 더 싸우면 곤란합니다. 또 힘들수록 자녀를 꼭 안아주세요. 사랑으로 승리하시길 기원합니다. 

<서로 믿음 안에서, 서로 소망 가운데, 서로 사랑하면서 손잡고 가는 길, 오 주 사랑의 종소리가, 사랑의 종소리가 이 시간 우리 모두를 감싸게 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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