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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자 (시 118:21~23, 마 21: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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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자 (시 118:21~23, 마 21:42~43)


오래 전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성 스테파누스 성당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성당을 건립할 당시의 얘기를 유심히 들었습니다. 성당을 건립할 당시에 한스라는 벽돌공이 스테파누스 왕의 딸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은 한 달 만에 한쪽 종탑을 완공하면 딸을 주겠는데 절대 그 동안에는 성인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딸의 이름이 마리아였습니다. 

종탑 공사를 하던 한스가 하루는 종탑 아래로 마리아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한스는 “마리아”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이 일로 한스는 성당을 건립하던 도중 완공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지금도 성당 한쪽 탑은 미완성인 채로 남겨 두었다고 합니다.

성 스테파누스 성당 단 중앙에는 스테파누스의 상이 있습니다. 왕은 자신의 아들이 죽자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하지 않으려고 사람을 많이 죽인 왕이지만 교황에게 돈을 주고 성자 칭호를 샀다고 합니다. 자신의 폐위 후에 기독교가 몰락할까봐 성자의 칭호를 얻게 되었고 서방교회의 성자 칭호를 얻은 사람 가운데 희랍 정교회인 동방교회에서도 성자의 칭호를 얻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어떤 왕이든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하고 나라를 이어받게 하려는 욕심은 다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에게 받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계승자가 되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가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받았다면 이미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후기 로마에는 독특한 후계자 계승법이 있었습니다. 황제가 될 만한 제목으로 적합한 자손이 없을 때는 황제 자질을 갖춘 양자를 입양하여 황제가 직접 후계자로 교육하여 세우는 법이었습니다.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양자를 세울 수 있었지만 세우지 않고 자질이 부족한 아들 콤모두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계승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아우렐리우스의 업적도 빛을 바랩니다. ‘글래디에이터’라는 영화는 이런 내용을 극화한 영화입니다. 양자라도 세워 나라를 이어받아 계승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 사람의 욕심입니다. 그러나 잘난 양자보다 못난 친자가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양자가 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받게 하십니다. 
  
조선 왕조 27왕은 평균 23살에 왕위에 오르고 46살에 승하하였습니다. 왕들은 평균 19년 2개월 왕위에 있었습니다. 27대 왕 가운데 30대에 죽은 왕이 8명이며, 약 절반인 13명은 10대 이하의 나이에 왕이 되었으며, 40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당시 평균수명보다도 못 살았던 왕들이 많았습니다. 나라를 이어받고 왕위를 계승한들 무슨 덕이 있습니까?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살아야 하고, 내가 누려야 합니다. 
  
나라를 이어받는 자는 황태자입니다. 황태자는 왕위 계승자입니다. 어떤 이가 황태자가 됩니까? 일반적으로 왕의 아들이며 딸입니다. 우리가 이런 찬양을 합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하나님이 왕이시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왕자이며 공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받을 왕자이며 공주입니다. 
  
바사의 왕 아하수에로는 유대인 포로의 후손인 에스더를 왕비로 얻습니다. 왕은 에스더를 얼마나 사랑했든지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갔을 때 왕은 에스더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합니다. 자신의 나라를 떼어 줄만큼 사랑받는 사람이 에스더였습니다. 실제로 나라를 나누어줄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사랑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자가 어떤 자입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의 계승자가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42절 상반절에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얻지 못하고 빼앗기는 불행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가장 귀한 것을 버리고, 빼앗기고, 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빼앗기면 모든 것이 다 필요가 없습니다. 
  
시편 118:22에는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받아들여야 할 유대인이 버리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은 요긴하게 얻은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이 버린 예수님입니다. 유대인들은 목전에서 나라를 빼앗긴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돌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건축자들인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에 의해 예수님은 버림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할 자들은 도리어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예수님을 버리지 말아야 할 자인데 버린 자가 된 자들이 지금도 수없이 많습니다. 
  
디모데후서 4:10에는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라고 합니다. 교회를 섬기고 바울을 돕다가 세상으로 가버린 자들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다 얻었다가 빼앗긴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문턱에서 들어가지 않고 포기한 자들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란 건축에 가장 중심이 되는 돌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공사에 이런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성전은 거룩한 곳이므로 성전 터에서 망치소리 등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멀리서 모든 돌을 다듬어 가지고 와서 성전 터에서는 맞추기만 했습니다. 공사 중에 어떤 돌이 왔습니다. 현장에 있던 기술자들은 쓸모없는 이상한 돌이 왔다고 하여 시냇가에 버렸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 돌은 이끼가 끼고 더러워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돌이 다 맞추어졌습니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한 돌이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돌을 다듬던 사람은 이미 그 돌은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현장의 기술자들은 오래 전에 필요 없는 돌이라고 하여 버린 돌이 생각나서 그 돌을 다시 가지고 와서 그 자리에 끼워 넣었더니 성전의 모든 공사가 끝났다고 합니다. 가장 요긴한 돌인데 사람들은 필요 없다고 버렸습니다. 다시 그 돌을 가지고 와서 완성되게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3:11에는 천국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니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라고 하십니다. 12절에는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는 자가 있다고 하십니다. 도중하차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문턱에서 좌절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는  ‘므나비유’라는 비유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비유’와 흡사한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의 공통점은 결론입니다. 있는 자는 더 많이 받고, 없는 자는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받든지, 빼앗기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흔히 말하는 본전은 없습니다. 
  
현대 랍비인 마빈 토케이어의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배가 항해 도중에 항로를 벗어나 이름 모를 섬에 도착하였습니다. 바람이 너무 잔잔하여 돛단배가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섬에는 나무가 울창하고 꽃이 만발하고 향기가 진동하였습니다. 승객들은 다섯 그룹으로 나뉘어졌습니다. 

첫째 그룹은 언제 바람이 알맞게 불어올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배에서 내려오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둘째 그룹은 잠깐 섬에 올라보기로 하고 적당한 시간에 다시 배로 돌아왔습니다. 
셋째 그룹은 섬에서 충분히 즐겼습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지만 배가 닻을 올리는 것을 보고 급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넷째 그룹은 섬에 남아서 즐기는데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배가 출발을 알리는 종소리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다섯째 그룹은 섬 생활의 즐거움에 아주 정신이 빼앗겼습니다. 배가 떠나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섬에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가장 올바른 태도를 가진 그룹은 두 번째 그룹입니다. 왜 생명을 빼앗기고, 기회를 빼앗깁니까? 세상에 정신이 빼앗기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영혼이 세상에 빼앗기면 하나님의 나라도 빼앗깁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긴 자들을 보세요. 한 결 같이 세상에 자신을 빼앗긴 자들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율법이나 재물이나 지식 같은 세상의 것에 자신을 빼앗긴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깁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가실 때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들어가신 흔적이 있습니다. 마르다는 일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음식을 장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언니 마르다가 부엌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방에서 예수님의 말씀만 경청하였습니다. 언니가 예수님께 불평하면서 마리아도 부엌에 나와 함께 일하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0:42에 보면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좋은 자리를 절대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양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절대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도 보면 꼭 믿어야 할 사람이 안 믿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채필근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시고 평안도 어느 작은 마을에 전도사로 가셨습니다. 그 마을은 마을 전체가 50호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교회가 있었고 50명 정도의 교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젊은 전도사가 열심히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동네의 어떤 남자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참 장례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천국에 갔다 왔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한사람씩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그 사람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채전도사는 그 사람에게 가서 “다른 사람이 다 안 나온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나와야지요”라고 권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은 “그럼요, 나갑니다. 잠깐 쉬다 다시 나갈 겁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두 번째 정말 죽을 때는 교회에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문턱에까지 갔다 왔지만 결국은 빼앗긴 사람입니다. 다 얻은 하나님의 나라를 버린 사람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 받습니다. 

42절 하반절에는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합니다. 율법을 전달하던 특권을 가진 유대 종교지도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권한을 박탈당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 복음을 전달하는 특권과 사명을 갖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긴 너희”는 바리새인과 율법주의자와 서기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은 왜 빼앗겼습니까?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받았습니까?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을 잘하기 때문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나 지위나 돈이 많이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를 맺을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는 은혜로 맺고, 성령으로 맺고, 하나님과 함께 맺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는 세상 나라의 열매와는 전혀 다릅니다. 
  
에베소서 5:11에는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합니다. 어둠은 지옥입니다. 어둠의 일은 지옥의 일입니다. 어둠의 일이 지옥의 일인데 어둠의 일이 열매가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어둠에 열매가 맺힙니까? 여름에 일조량만 적어도 열매는 잘 맺히지 않고 익지 않습니다. 빛에는 열매가 맺힙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매 있는 하나님의 나라, 열매 없는 지옥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7:18에는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계속해서 19절을 보세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고 합니다. 또 20절을 보세요.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합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뿌리를 가지고, 좋은 땅에 심긴 나무입니다. 이런 나무가 찍히지 않고 열매로 그 나무의 가치를 드러냅니다. 성도의 좋은 열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이 없으면 맺을 수 없는 열매입니다. 
  
시편 1편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풍성한 물가, 풍성한 은혜가 열매를 맺는 조건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책망하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세요.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가 없어 저주를 받습니다. 요즘에 이런 말이 유행합니다. 90년대 이전의 남자는 과거 있는 여자는 절대로 용서 못했습니다. 90년대 남자는 과거 있는 여자는 용서하지만 얼굴 못생긴 여자는 절대 용서 못했습니다. 요즘 남자는 과거 있는 여자도 용서하고, 얼굴 못생긴 여자도 용서하지만 직장 없는 여자는 절대 용서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태를 말합니다. 남자들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가를 말해줍니다. 그리스도는 부정한 여인은 용서했지만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는 저주했습니다. 열매 없는 나무는 절대 용서하지 못합니다. 
  
좋은 씨라야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도 4가지 씨가 있답니다. ‘솜씨, 맵씨, 말씨, 마음씨’입니다. 이 씨를 가지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씨를 잘 뿌려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씨는 이미 씨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성령의 열매란 성령으로 맺는 열매입니다. 좋은 열매란 성령이란 씨가 맺는 하나님의 나라의 것들입니다. 우리도 좋은 씨로 좋은 열매를 많이 맺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자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첫 사람 아담은 잘 못된 열매인 선악과를 먹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사심으로 생명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아담은 죽음의 열매를 먹었지만 예수님은 생명의 열매가 친히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는 살리는 열매입니다. 영원히 사는 열매입니다. 
  
호세아 10:1에는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고 합니다. 열매 없는 나무는 필요 없는 나무입니다. 열매 맺는 나무가 되어야 하나님의 나라의 나무가 됩니다. 신령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열매가 무성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는 오직 믿음의 열매만이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얻는 일의 열매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입니다. 믿음으로 얻는 말의 열매가 있습니다. 우리의 말로 형제들을 깨우치면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으로 전도의 열매를 맺습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열매입니다.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성 카타리나’ 섬이 있습니다. 쾌속정으로 한 시간 정도 가는 아주 아름다운 섬입니다. 저도 아주 오래 전에 한 번 가본 적이 있는 유명한 관광지입니다. 1952년 7월 4일 여성 수영선수인 플로렌스 채드윅(Florence Chadwick)은 수영으로 해안에서 이 섬까지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이미 영국 해협을 수영으로 횡단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강도 높은 훈련을 하여 해안에서 섬까지 횡단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날따라 바다에는 안개가 짙게 끼었습니다. 차가운 바닷물과 거친 파도 그리고 시계를 상실하는 안개뿐인 바다를 15시간 55분 동안 수영하였지만 결국 포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안개로 앞을 전혀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포기한 곳은 섬에서 불과 800미터 앞이었습니다. 수영을 포기한 다음 기자들이 질문했습니다. “포기 당시 도착예정이던 해안에 매우 근접해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까?” “나는 목표 지점을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해안만 보였더라도 끝까지 해냈을 것입니다”. 문턱에서 포기하고, 좌절하고, 빼앗기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있습니다. 
  
영혼의 안개를 걷어내세요. 영혼의 빛을 얻으세요. 하나님의 나라를 확실히 얻으세요. 문턱에서 좌절하고, 포기하는 자가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와 멀리 사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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