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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하나님의 특 대우 (창 1: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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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특 대우 (창 1:26~29)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 이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사순절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받으실 고난을 생각하며 묵상하는 부활절 전 40일간의 기간을 말합니다. 기독교에서 이 사순절은 절기 중에서 절정입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고난은 핵심이고 근간이고 은총이고 하이라이트 입니다. 이 고난주간이 지나면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3세기까지는 부활절을 예비하기 위해서 2-3일간 금식을 하였고 사순절이 40일로 지키게 된 것은 기원후 325년 니케야 교회법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순절을 40일로 규정한 것은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40일간 금식기도를 한 것에 기인합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사순절에 금식기도를 토, 일요일을 제외하고 7주간 하였고 서방교회에서도 6주간,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4세기 초부터 8주 동안 금식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된 것은 7세기 라틴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물고기나 육식이나 달걀도 우유도 금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는 죄를 상징하는 붉은 옷을 입었고 할렐루야 찬송과 축제도 금하며 지내었고 특히 자선을 베풀고 회개하는 기간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 형식적입니다. 하루도 금식하기를 꺼려하고 있습니다. 경건의 삶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가능하면 절제하는 마음으로 조금이라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정신을 발휘를 하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이유와 목적을 알았으면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창조과정을 살펴볼 때 특이한 사항을 한 가지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실 때 인간을 가장 염두에 두고 지으셨다는 점입니다.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은 인간에게 특별한 의미를 두고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이 성경을 통해서 발견하는 내용입니다. 


인간 특대우 

본문을 보면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지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과 거룩과 성결을 부여하여 지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전체 세상의 주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특 대우입니다. 인간을 영광의 존재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값입니다.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행복한 일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누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아주 소중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아담을 특 대우해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 형상을 따라서”, 그 말은 아담을 지으시고 그 아담과 늘 대화하시고 교제하는 대상으로 지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쯤 되면 인간의 수준이나 값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을 그렇게 지으셨으면 하와는 또 얼마나 아름답게 지으셨겠습니까. 아담의 갈비를 뽑아서 하와를 지으셨다고 했는데 아담이 깨어나 보니까 곁에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일설에 의하면 아담이 하나님께 여쭙기를 “이 여인을 내 아내로 주시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내 아내를 이렇게 아름답게 지으셨어요”하고 묻자 하나님께서 “네가 바람피우지 말라고 예쁘게 지었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아담의 후예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대우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알면 우리 자신에게 부여된 영광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특대우를 하신 것은 인간이 특 대우를 받을만한 가치가 주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인간은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는 인간에게 그런 값이 주어져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는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와 같은 존재 

창세기를 보면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예수와 같은 존재로 지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큰 기대를 하셨습니다. 부모들이 아기를 잉태했을 때 다 그런 소망과 기대가 있습니다. 장차 이 아이가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그래서 태교도 하고 좋은 생각도 하고 좋은 음식을 먹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즉 예수를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가장 아름다운 성결한 낙원으로 지으셨습니다. 거기 악이 없었고 죄가 없었고 거기 독이 없었습니다. 완벽한 낙원이었고 천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의 수준으로 지어진 인간이 살아갈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런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인간에게 큰 뜻과 목적을 두셨습니다. 마치 모든 부모들이 아이를 잉태하거나 낳고 기대하듯이 말입니다. 그것이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내용은 마치 천국의 모습이고 가장 선한 모습이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 상태가 오래 계속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것이 창세기 1장과 2장이 전해주는 메시지입니다.  


인간의 타락 

그런데 그 인간이 그만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이 틀어진 것입니다. 온갖 기대를 모았던 자식이 성장하여 타락의 길을 걸어 부모의 기대가 어긋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탄식하시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또 때로는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기도 했습니다. 참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은 불행장입니다. 창세기 3장은 불행으로 시작됩니다. 

3장1절을 보면 “뱀은 ...” 하고 시작합니다. 여기 뱀은 타락을 부추기고 유혹하여 넘어지게 하고 순전한 사람을 타락하게 하는 사탄이고 마귀입니다. 마침내 뱀의 유혹을 받아 준엄하게 명령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타락하고 죄를 짓고 마침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결과 그 열매를 먹으면 죽으리라고 말씀하신대로 인간은 예수님 수준의 존재에서 죽음의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어느 부흥회에서 선악과를 따 먹어서 추방되고 죽음이 오게 되었다는 설교가 있었습니다. 어느 불신 남편이 아내에게 이끌려 처음 부흥회에 와서 그 이야기를 듣고 집에 가다가 한숨을 내 쉬며 말했다는 것입니다. “미친놈, 선악과가 다 익어서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떨어지건 주워 먹었으면 일 없었을 것을 왜 익지도 않은 열매를 따먹고 지랄이야.” 좀 기다렸다가 다 익어서 떨어지건 주워 먹었더라면 괜찮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따 먹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그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는 말씀대로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담내외를 당장 죽이지 않으시고 임시로 옷을 만들어 입히시고 겨우 현장 죽음을 유예했습니다. 그러나 아담내외는 앞으로 죽을 것이라는 선고를 받고 죽음을 생각하며 언젠가 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예들인 우리들도 모두 오늘도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마음 졸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아담 내외는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 좋은 특대우를 스스로 포기하고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병들고 실패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아주 비참한 존재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고 자의로 스스로 자신들이 그런 우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장벽이 생겼습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을 그리워했고 기다려졌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오시는 것이 겁나고 부끄럽고 두려웠습니다.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실망이 너무 컸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착 

그런데 하나님은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을 향해서 기대를 저버리시지도 포기하시지도 방치하시지도 않고 인간의 회복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다시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는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왜 세상에 보내셨는가 하면 인간을 다시 회복시키려고 보내신 것입니다. 다시 회복시키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복원하고 인간을 죽음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입니다. 인간을 다시 회복시키려면 누군가가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오셔서 “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내가 주님을 믿는 순간 내가 다시 영적으로 회복되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어두워진 내 눈이 뜨여져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타락한 인간이 원래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죄를 짓고 타락하고 탕자가 되어 집을 나가면 괘씸하고 기대는 무너지겠만 그렇다고 그 자식을 포기하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때 모든 부모들은 한결같이 다시 자식을 회복시키려고 뭔가를 시도할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들의 마음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큰 기대를 두시고 목적을 삼으셨는데 그 인간이 그만 죄를 지었다고 포기하시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비록 죄를 짓고 타락하였지만 다시 회복시켜 놓으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비록 이미 인간이 죄를 지어 흠은 생겼고 탕자가 되었지만 다시 받아들이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되고 잃어버린 자녀의 자리를 회복하고 잃어버린 영성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이고 아주 원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보내신 그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복음이라 하고 은총이라 하고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그때는 정말 길이 없어집니다. 그 때는 말씀하신 그대로 준엄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고 죽음과 멸망만 있을 뿐 입니다. 그것을 창세기에서 예표로 주신 상징이 아담내외를 대신해서 죽은 양의 사간입니다. 그 양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순전히 아담내외가 죽을 것을 대신해서 죽은 것입니다. 그 양이 죽음으로 아담내외는 당장 죽음을 것을 잠시 유예 받고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는 그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그 영원한 길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일”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16-17절을 보면 “모든 성경은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모든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간혹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주신 목적은 “교훈과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려고” 교육재료로 주신 것은 아닙니다. 

물론 성경은 교육적인 자료로 아주 훌륭합니다. 성경 안에는 많은 교육적인 자료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을 주신 원 뜻도 목적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은 단순히 교육하고 깨닫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깨달아 알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고 예수를 보내신 뜻을 알아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장16절의 “온전케 하려 함이라”는 말씀의 뜻은 “삶의 변화를 위하여” 라는 뜻입니다. 즉 그 말씀은 교육차원이 아니고 지식을 넓히는 차원도 아니고 생각을 깨우치는 계몽수준도 아닌 성경을 통해서 깊으신 하나님의 경륜을 깨달아 예수를 알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성경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고로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밝히 알고 하나님의 본뜻을 아는 일이 인간이 온전케 되는 일입니다. 그 온전케 되는 그 상태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모습입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유리병이 있습니다. 이 상태가 완전한 상태입니다. 아무 금도 없습니다. 이것이 완전한 상태입니다. 인간으로 말하면 죄를 짓기 이전의 에덴에서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완전한 유리병이 잘못 관리해서 금이 갔습니다. 그러면 이 유리병은 완전치 못합니다. 상품가치가 사라졌습니다. 그렇다고 이 유리병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버리기에는 이 병을 만든 사람이나 바라보는 사람 입장에서 아깝습니다. 그래서 이 병을 회복시키려 했습니다. 그 회복방법이 그 병을 만든 사람에게 가서 수리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 유리병을 완벽하게 수리했습니다. 그 말은 이 유리병이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그 유리병이 본래처럼 완전하냐 하면 아닙니다. 이미 이 유리병은 금이 갔고 수리를 했습니다. 이 병을 잘 수리했지만 아주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상태가 온전에 가까울 뿐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하고 죄를 지은 우리를 온전케 하신다는 말은 우리를 그렇게 수리하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내가 예수를 알고 예수께 가기만 하면 수리가 되어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차선으로 온전해 질 수는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예수를 보내셨고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셔서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한 가지 원대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 목표는 우리들이 위대한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철학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위대한 인격자가 되는 일도 아닙니다. 우리의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목표는 우리들의 모델 되시는 예수를 닮아가는 일입니다. 내가 예수 안에서 은혜를 입고 영성을 회복하여 잃어버린 나의 본 모습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목표이고 목적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 예수를 보내신 것이고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기대를 저버리지도 않으십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알기를 촉구하십니다. 그를 믿기만 하면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으시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서 당신의 자녀를 만드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생각하면 그 하나님의 은혜가 한이 없으신 것입니다. 그 깊이와 넓이와 규모가 우리들이 상상하는 것과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사순절을 통해서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알되 깊이 있게 알고 깊이 있게 깨달아 예수를 닮아가고 예수의 수준까지 성숙해 가는 영적 성숙도 이룰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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