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행복의 3대 조건 (창 2장)

  • 잡초 잡초
  • 545
  • 0

첨부 1


행복의 3대 조건 (창 2장)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이런 질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예”라고 대답할 수 있게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말로만 “행복합니다.”가 아니라 진짜 행복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창1:28에 보면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인 사람을 만드신 후에 5대 복을 주셨고, 사람을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에서 가장 좋은 에덴동산에 두셨던 것입니다. 

신10:13에 보면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 계명을 주신 이유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창2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이후에 안식일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 사람을 두시고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는데, 단 한가지만을 금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셔서 가정을 이루게 하신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행복의 3대조건을살펴보려고 합니다.

 1. 행복하기 위하여 안식하십시오.

 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사역을 마치신 후에 7일째 되는 날 안식하셨습니다. 안식은 쉼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 쉬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것은 하나님이 일하신 후에 피곤하셔서 안식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안식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안식하신 것입니다. 출 20:8에 보면 십계명 중에 네 번째 계명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입니다. 
그럼 안식일을 지키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1) 안식은 하던 일에서 손을 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히브리말로 샤바트, "중단했다" 그런 말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손을 딱 떼고 편안히 쉬셨다 하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쉬는가 하는 겁니다. "샤바트"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서 하루만큼은 손을 뗀단 말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육체노동자라면 엿새 동안 열심히 몸으로 일했습니다. 그럼 이제 하루는 쉬어야하는 겁니다. 정신노동자로 머리 많이 쓰는 사람들은 머리 쓰는 것을 중단해야 된단 말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도 엿새 동안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럼 하루는 쉬게 해줘야 되는 겁니다. 몇 년 전에 부목사님이 읽은 책 중에 하나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고 합니다. 쉬지 한고 공부하면 지식이 뒤죽박죽된답니다. 혼돈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공부하는 아이들 고3이 되었어도 주일에는 공부에서 손을 떼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업가들도, 직장인들도 주일에는 하던 일에서 손을 떼세요. 그래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안식일 계명을 말하는 출 20:10에서는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요즘 바이오리듬에 대해서들 말하는데 인간의 바이오리듬(Bio-rythm)은 7의 배수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바이오리듬 속에서도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가 드러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6일간 일하고 7일째는 쉬게 만드신 것입니다. 
 
운동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할수있느냐를 연구하는 학문이 운동공학입니다. 운동공학에 의하면 운동도 일주일 내내하면 절대로 안 된답니다 엿새하고 하루는 반드시 쉬어라, 그래야 역기능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2) 안식은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3절에 보니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거룩이란 말은 구별이란 말입니다. 뭘 구별하느냐,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나와 교제하는 겁니다. 교제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일보다 더 소중한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네가 붙들려있는 그 일로부터 내가 자유케 해 주마, 그러므로 쉬어라, 그리고 아무 방해도 없는 가운데서 오늘은 나하고 사귀자, 오늘은 나하고 깊이 교제하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식일 속에 들어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쉰다고 해서 마음대로 놀아 버리는게 아니고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보내야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쉬어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안식을 잘못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토요일이 아닌 주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주일 에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한 주간을 승리할 수 있는 힘을 공급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십일조와 주일성수는 기초입니다. 건물을 세우려면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높고 큰 건물을 지을 수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큰 건물 짓는 것 보세요. 기초를 깊게 그리고 넓게 파서 튼튼하게 세웁니다. 그게 안 되면 건물을 잘 지어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십일조와 주일성수가 안 되면 신앙의 건물, 축복의 건물, 능력의 건물이 다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한 십일조 생활과 철저한 두일 성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래 전에 북한에서 목회 했던 김순동목사님이 어렸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부모는 믿지 않았지만 순동이만 10리쯤 떨어진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15세 때, 어느 토요일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니까 아버지가 쟁기를 손질하시면서 "내일은 밀을 베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장마는 곧 온다고 하는데 품을 살 수 없고 마음이 급해지신 아버지가 내일은 교회가지 말고 함께 밀을 베러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순동이는 3년 동안 한 번도 주일에 빠지지 않았는데 큰 걱정이 되었습니다. 순동이는 기도했습니다. 그가 기도하는데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저녁을 일찍 먹고 아버지가 갈아 놓은 낫을 들고 밀밭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주일을 지켜야 겠다는 생각으로 밀을 열심히 베었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밀을 베었습니다. 아침까지 밀을 벤 순동이는 집에도 가지 못하고 바로 교회로 갔습니다.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들을 깨웠습니다. 대답이 없자 방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순동이가 있을 리 없습니다. 아버지는 순동이가 일하기 싫어서 아침 일찍 교회로 도망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순동이의 부모님은 할 수 없이 둘이서만 밭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누가 밀을 모두 베어 놓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순간 순동이의 고무신 발자국이 눈에 띄었습니다. 사실을 알게 된 순동이의 부모님은 "이런 아이를 교회에 못 가게 하고 밀 베러 가자고 하였구나" 하면서 집으로 와서 옷을 갈아입고 교회로 갔습니다. 순동이는 부모님이 온 것을 보고 자기를 잡으러 온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순동아, 오늘부터 너를 따라 교회 다니기로 했다"고 하셨습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 밤새도록 밀을 벤 어린 소년의 신앙이 참 감동적입니다. 우리도 이런 신앙을 본받아 주일을 귀중히 지키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3) 안식은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10계명에 보면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고 안식일에 안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출 20:9에 보면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라고 말씀합니다. 6일 동안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안식할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 그러면 의욕이 생기고 기쁨이 넘칩니까? 아니면 가슴이 답답하고 한숨이 나옵니까? 성경은 일을 축복으로 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일을 축복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마지못해서 하는 저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놀고먹는 것이 꿈인 사람들이 많고, 돈 좀 벌면 “이젠 평생 놀고먹어도 되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의 상당 부분이 유교적인 전통에서 왔습니다. 공자는 제자 번지가 농사를 잘 짓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너는 참 소인이구나 윗사람이 의를 지키고 예를 갖추면 백성이 따라 올 터인데 어찌 농사일을 묻느냐?”라고 논어의 자로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군자가 할 일은 농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노동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는 죽도록 일만 해라”라는 말을 큰 욕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대 서양 사회도 똑 같았습니다. 그리스나 로마는 전부 노예들을 바탕으로 일군 문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노예를 부리며 일하지 않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생각했습니다. 심지어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권은 시간을 낼 수 있고 충분한 재산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 져야 한다.” 라고 하여 노동하는 사람은 시민권을 받을 자격도 없음을 공개적으로 천명했습니다. 
 
성도는 노동을 기피하려고 하는 경향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살후 3:10절을 보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개인윤리도 되지만 원래 사회윤리입니다. 먹지도 말라가 아니라 "먹지도 못하게 하라"입니다. 즉, 일하지 않는 사람은 밥줄을 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일하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일에 대한 적극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일하는 것이 축복이라고 말하는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아예 일하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창 1-2장을 읽어보면 동사들이 전부 일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지으시고', '창조하신' 것은 전부 장인들이 사용하던 단어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손으로 무엇인가 만들고 일하시는 장인 같은 분으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열심히 일하십시오. 그래야 안식을 하면서도 떳떳하고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 행복한 것입니다.
 
일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일하지 않는 것은 불행이요 저주입니다. 전 세계에서 신체적 조건이 가장 우수했던 사람들이 아메리칸 인디언들입니다. 제일 건강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사람들 다 병들어서 지금 멸종 위기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말입니다. 땀 흘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미국 정부가 인디언들이 그 땅의 원주인이었는데 백인들이 와서 빼셨기 때문에 그들의 후손들을 돌봐주고 있습니다. 국가에서 생활비 교육비를 다 줍니다. 그렇게 되자 험악한 산촌을 말 타고 다니고 활을 쏘며 사냥했던 사람들이 할 일이 없어지니 매일 술만 마십니다. 그 결과 인디언 중에 거의 90% 이상이 알코올 중독으로 죽고 지금은 멸종 위기입니다. 땀 흘려 일하는 민족이 보존되고 수고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일이 있음에 감사하십시오.


 2. 행복하기 위하여 생명을 선택하십시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을 잘한 사람이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잘못된 선택을 하기 때문에 실패하고 패배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보내는 것입니다. 선택을 잘하십시오. 그러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9절에서는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2종류의 나무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먹으면 영생을 얻게 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게 되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두 나무 중에 어느 나무를 선택했습니까? 생명나무가 아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는 행복이 사라지고 불행이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은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에서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선택 할 때 옳으냐 그르냐를 따라 가는 것은 선악과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냐 주님이 아니냐가 되어야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옳고 그르냐로 판단하려고 든다면 그 사람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냐 아니냐 주님으로부터 나왔느냐 주님이 없는 것이냐를 볼 수 있다면 그는 생명나무를 먹는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농담 삼아 에덴동산이 한국 땅에 있었다면, 인류는 타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한국 사람들은 뱀탕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하기 전에, 하와는 뱀을 잡아 뱀탕을 끓였을 것입니다. 또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갔다 하더라도, 아담은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국남자들은 부인의 말을 잘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아직도 한국 남자들은 부인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인의 말이 옳은 줄 알면서도 부인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것이 한국 남자들의 특징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선택하므로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고, 가족 간의 사랑에도 금이 가게 되었고, 땅이 저주를 받아서 고생도 하게 되었고, 육체도 저주를 받아서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롬 8장에 보면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그 말씀과 연결시켜서 보면 생명과는 영을 선택하는 것이고 선악과는 육신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보다 육신을 선택했습니다. 선악과를 보니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선악과를 통해서 육신의 자극을 받았고 육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선악과는 육신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육신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이 어령 수필집에 나오는 글입니다. 어느 할머니가 손자와 둘이 살았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손자가 산에 가서 아름다운 버섯들만 따 가지고 왔을 때 할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손자야! 우리 가정은 아름다움 때문에 망하는 구나! 너희 할아버지는 아름다운 여자를 따가 가 버렸다. 너의 아버지는 아름다운 산을 좋아 하다가 산에서 죽었다. 너는 아름다운 버섯만 따왔다. 아름다운 버섯일수록 독이 많은 버섯이란다. 먹으면 죽는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것은 선악과입니다. 
 
아담은 하나님 보다 사람을 따르므로 선악과를 선택한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먼저 먹은 것이 아닙니다. 하와가 먼저 먹고 아담을 유혹했으며 아담은 하와를 따라가므로 선악과를 먹게 된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곳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전구의 생명은 전기입니다. 아무리 전구가 성능이 좋아도 전기가 공급되지 않으면 빛은 없습니다. 어둠입니다. 우리들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무리 인간적인 조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생명의 근원이 예수님이 없다면 나는 어둠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생명의 주님과 연결되어서 해야 생명의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되었든 주님이 빠졌다면 어둠입니다. 주님 없는 생각, 주님 없는 말, 주님 없는 일은 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고 결과는 사망입니다. 행복을 위하여 주님을 선택하십시오. 
 
 
3. 행복하기 위하여 가정을 지키십시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본은 로마제국 붕괴의 가장 심각한 원인 중의 하나는 가정의 붕괴라고 지적했습니다. 로마의 한 철학자는 로마가 무너져 가는 마지막 황혼의 역사를 보면서 “애국자여, 가정을 지키시오”라고 호소하면서 “신이시여, 기도하는 가정을 로마에 다시 일으켜 주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 시대의 희망은 신앙의 가정을 세우는 일입니다.
  
1) 행복한 가정은 사명을 감당하는 가정입니다.

18절에 보니 아담에게 하와를 주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단지 사랑하는 짝을 만들어주신다고 말하신 것이 아닙니다. 돕는 배필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세상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드신 것입니다. 
 
24절 보니 행복한 가정은 하나 된 가정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하나 되느냐 하면, 사명을 위하여 하나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가정은 무슨 사명이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위해서 가족들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2) 행복한 가정은 서로 죽어지는 가정입니다.

21절에 보면 아담이 잠들어서 하와가 살게 되었습니다. 깊이 잠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수술하셔도 모를 만큼 깊이 잠들었습니다. 잠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잠들지 않았으며 죽지 않았으면 하와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남이 죽어지기를 바라는데 아닙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남이 죽느냐 죽지 않느냐는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따질 일이고 나만 죽으면 되는 것입니다. 
 상대가 죽어지지 않아서 내가 괴롭다면 상대를 공격하지 말고 내가 죽어지면 된다. 내가 살아있으니 괴로운 것입니다. 죽어지지 못해서 싸움이 일어납니다. 
 
중국의 장공예씨는 9대째 한 집에 모여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니 식구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다투는 일 없이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 소문이 중국 황제 고종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고종이 직접 그 집에 찾아와서 상을 주고 큰 잔치를 베풀어 주면서 장공예에게 물었습니다. “수백 명이 한 울타리에 사는데 어찌 이렇게 화목할 수가 있는가? 그 비결이 무엇인가?” 그때 장공예는 백지에 붓으로 ‘참을 인’자를 백 번이나 썼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사람이 화목하지 않고 다투는 것은 어른들의 의복이나 음식이 고르지 못하거나 젊은이들의 예의가 부족해서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에서는 언제나 참습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서로 참는 것이 우리 집의 법입니다. 모든 식구가 서로 참으니 식구가 몇 백 명이 되어도 화목합니다.” 
  
3) 행복한 가정은 서로 사랑하는 가정입니다. 

사랑하면 참아집니다. 신앙생활의 비결은 사랑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여 중노동을 하면서도 7년을 수일처럼 살았습니다. 엄마가 자녀를 기르면서 수많은 어려움이 있으나 잘 참아낼 수 있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배우자를 하나님이 주신 짝으로 알고 배우자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행복합니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가정생활에서도 대단히 모범적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도대체 가정생활을 성공비결이 무엇입니까?" 포드가 대답했습니다. "자동차 개발할 때처럼 한 여자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인내할 줄 모르고 새 것에 대한 호기심이 지나치면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미국의 방송인 중에 바바라 월터스라는 유명한 앵커우먼이 있습니다. 그녀는 이혼했는데, 나중에 성공적 재혼을 위해 신중하게 남편 대상을 물색하며, 컴퓨터에 자기 적성을 비롯한 모든 자료를 넣고 최종 남편감 후보를 뽑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른 가장 좋은 남편 후보감을 보니까 바로 전 남편이었습니다. 갈아보았자 소용없습니다. 가정과 교회에서는 인내해야 축복의 열매를 얻습니다. 
 
신앙 고백이 있어야 성도이고 사랑의 고백이 있어야 가족입니다. 사랑고백이 없으면 가족은 힘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인간관계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으로 상대를 보면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대상으로 보면 허물과 약점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용납이 됩니다. 사랑하면 행복합니다. 의지하면 불행합니다. 그냥 사랑할 뿐입니다.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족해도, 허물투성이어도, 사랑하면 괜찮아요. 그런데 의지하고 믿음의 존재가 되면 불행해집니다. 아이들보면 참 예쁩니다. 부모가 그 아이를 사랑하니까 괜찮지 믿음의 존재, 의지하는 존재가 되면 안 됩니다. 자녀에게 모든 것을 걸면 안 됩니다. 
 
사랑하면 사랑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도 심는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집 간 딸이 친정에 돌아오면 친정어머니에게 시어머니 빨리 죽었으면하는 이야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친정어머니가 아주 지혜롭게 대답을 했습니다. 
“연세 많은 어른은 무엇이든지 과식을 하면 빨리 죽는 법이야. 뭐든지 많이 한번 드려보렴.” 

이 말을 듣고 시집으로 돌아온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뭐든 많이 드렸습니다. 밥도 많이 드리고, 하루 세끼 밥 외에도 중간 중간에 세 번씩 떡과 과일까지 갖다 드렸습니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났습니다. 시어머니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구박하고 못살게 굴던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점점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니 며느리를 향한 시어머니의 마음이 풀어지면서 시어머니도 며느리에게 아주 잘 대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잘해주니 며느리의 마음도 달라졌습니다. 시어머니가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스럽게 보이더랍니다.

“사랑하면 행복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서 서로 사랑하여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행복의 3대 조건을 살펴봤습니다. 
첫째 조건은 안식입니다. 둘째 조건은 생명의 선택입니다. 셋째 조건은 가정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