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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쓴물을 만났을 때 (출 1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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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쓴물을 만났을 때 (출 15:22~27) 
  

지금은 교회 절기 상 사순절(四旬節, Lent)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이전 주일을 제외한 40일 동안 지키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면서 경건 생활을 실천하는 절기입니다. 금년 부활절은 4월 12일이니까, 사순절이 앞으로 4주간 남았습니다. 오늘부터 4회에 걸쳐 십자가와 관련된 말씀을 드립니다.

십자가는 물론 신약 시대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부터 여러 차례 예고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을 잘 살펴보면, 곳곳에 십자가가 예언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시간 본문을 상고하면서 십자가의 능력을 확인하시고, 이번 사순절에 다시 한번 우리 인생 가운데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1] 마라의 쓴물 : 인생의 고통 상징 

본문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직후 광야를 통과할 때 있었던 사건의 기록입니다. 홍해 바다를 건넌 이스라엘이 수르 광야를 지나가는데 물이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가 얼마나 됐을까 추산하면 최소한 2백만 명이었습니다. 장정만 60만 명이었으니까 노인, 여인, 그리고 어린아이를 합치면 충분히 그 정도가 되겠죠? 그 많은 사람들이 광야 사막을 통과하자면 얼마나 많은 물이 필요했겠습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최소한 식수는 있어야 되는데, 물이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합니까?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본문 22절을 보시죠.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얼마동안 걸었다고 했습니까? 사흘 길입니다. 지도를 보고 대충 거리를 환산해 보면 약 53km쯤 됩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사흘 길을 걸어가는데 마실 물이 없었으니 얼마나 고생스러웠겠습니까? 

전전긍긍하면 여기 저기 뒤지다가 마라에 당도합니다. 23절.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마라에 당도해서 겨우 물을 발견합니다.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막 달려갑니다. 그런데 물을 떠서 마시는데 너무 씁니다. 도저히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이 마라가 된 겁니다. 마라(hr;m)는 히브리어로 ‘쓰다’(bitter)는 뜻입니다. 물이 없어서 탈이었는데, 이번엔 물이 있기는 한데 쓴물이라 탈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이렇습니다. 무엇을 얻고자 애를 씁니다. 그것만 얻으면 인생이 행복할 것 같아요.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속이 상하고 괴롭습니다. 그러다 천신만고 끝에 그것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별게 아닙니다. 돈을 벌어 봐도 별 게 아니고, 출세를 해도 별게 아니고, ... 여전히 괴로움이 가득한 인생입니다. 이게 바로 인생의 쓴물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맛을 비유해서 말하면 무슨 맛입니까? 단맛? 쓴맛? 시금털털한 맛? 인생이 항상 단맛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쓴맛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어 쩔쩔 매다가 간신히 물을 얻었는데 그게 쓴물이었던 것처럼 인생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야 합니다. 인생의 온갖 고통에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요? 본문에서 그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2] 마라의 한 나무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예표

이스라엘 백성들은 쓴물을 보고 원망하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달랐습니다. 바로 전에 홍해를 가르시고 맨땅으로 건너게 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능력의 하나님이 어떻게든 해결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어떻게요? 한 나무를 보여 주십니다. 25절.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게 되었더라 ... ” 하나님의 응답으로 지시된 나무를 쓴 물에 던지자 단 물이 됩니다. 그 나무 자체에 무슨 특별한 효능이 있었다기보다는 그 나무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보면 됩니다. 이 나무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본래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잔인한 사형틀입니다. 저주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대신한 십자가이므로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갈3:13 보면, 사도 바울이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신21:23 인용)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대신해 저주를 받으신 것으로,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 즉 속죄함으로 저주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벧전2:24 보면, 사도 베드로는 또 이렇게 설명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죄를 담당하시고, 대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받고 의인이 됩니다. 그리고 모든 고통에서 구원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십자가를 쓴잔으로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마26:39 “ ...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 여기서 잔은 쓴잔으로 십자가 고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인성을 갖고 있어서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십자가를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고통입니다. 인성의 측면에서 그 고통을 피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것임을 알았기에 그 쓴잔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쓴잔이 우리 인생에 축복의 잔이 됩니다. 인생의 쓴물을 단물로 바꿔주시는 겁니다. 고전10:16 보면 성찬식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고전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쓴잔을 마심으로 그를 믿는 우리 성도들은 축복의 잔을 마시게 되었다는 겁니다. 

뇌성마미 장애인으로 ‘천상의 시인’이라 불리는 송명희가 지은 시 구절이 생각납니다. 

“너의 쓴잔을 내가 마시었고 / 나는 너에게 단잔을 주었노라 / 너는 나에게로 오라 / 너의 쓴잔을 받아든 나의 사랑을 / 거절하지 말고 / 너에게 주는 단잔을 받아 마시라”(송명희「너의 쓴잔을」中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잘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쓴잔을 마심으로 우리가 단잔을 마시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 구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 인생에 영접하면, 인생의 온갖 쓴 물이 단 물로 변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마라의 쓴물을 달게 변화시킨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3] 십자가의 능력 : 구원의 능력 

십자가는 우리를 온갖 저주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를 무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성도에게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인생의 온갖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키는 신비로운 능력입니다. 

① ‘죄’에서 ‘의’로 :

무엇보다 먼저, 죄에서 의로 변화시켜 줍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과 저주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 이후 인간의 영혼에 오염된 죄의 바이러스는 인간을 고통과 저주로 몰아갑니다. 마침내 영원한 사망에 빠뜨립니다. 그러기에 인생의 근본 문제는 ‘죄 문제’입니다. 죄에서 벗어나 의인이 되어야 저주와 사망에서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인이 의인이 될 수 있습니까? 죄값을 다 치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죄값을 치르면 이미 사망입니다. 죄값을 치르지 않고 버티면 나중에 심판을 받고 영원한 사망을 당합니다. 이래저래 영원한 사망입니다. 이게 죄인이 된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받는 한 가지 길이 바로 십자가 대속입니다. 마치 보석금과 같은 겁니다. 다른 사람이 보석금을 대신 내줘도 풀려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심으로 죄값을 치러주심(대속)으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인이 됩니다. 롬3: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② ‘사망’에서 ‘생명’으로 :

그러므로 믿는 성도들은 이제 의인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제는 사망 끝입니다! 사망의 쓴물이 영생의 단물로 바뀐 겁니다. 지옥의 쓴물에서 천국의 단물로 바뀐 겁니다. 요5:24 보면,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까? 그분은 의롭지만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이미 의인이 된 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완전히 옮겨졌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확실히 믿으면 사망의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온갖 것을 다 소유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치 물을 얻었는데 쓴물인 것과 같습니다. 마실수록 씁니다. 불만족이요 고통입니다. 비근한 예로 소금물을 생각해 보세요! 목이 말라 물을 마시는데 소금물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지 않으면 인생이 세상의 소유가 있어도 문제, 없어도 문제입니다. 반대로 예수 믿고 영생을 얻으면 장차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축복이지만, 지금 이 세상 살 동안에도 영생의 단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보면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마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4:13~14 “13 ...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육신을 위해 세상의 온갖 물을 다 마셔도 참 만족이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멋진 남자를 만나면 인생에 단물이 쏟아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착각이었습니다! 여섯 남자를 만났지만, “이 남자도 아닌가봐.” “이 남자도 아닌가봐.” 하면서 갈아치웠지만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잘 살펴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다 이렇게 살잖아요! 돈을 벌면 만족이 있을 것 같아서 돈을 죽도록 따라다닙니다. 그런데 돈을 벌어도 여전히 불만족입니다. 권세를 얻으면 만족이 있을 것 같아서 죽도록 권세를 따라다닙니다. 그런데 권세를 얻어도 여전히 불만족입니다. 명예를 얻으면 쾌락을 즐기면 만족이 있을 것 같아서 죽도록 따라다닙니다. 그런데 명예를 얻어도 쾌락을 즐겨 봐도 그때뿐 여전히 불만족입니다. 이래도 저래도 공허합니다. 불안합니다. 왜 그럴까요? 영혼 깊은 곳에서 죄의 쓴물, 사망의 쓴물이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는 그 영혼에 생명수 샘물이 솟아납니다. 그 물은 영혼을 적셔주고 참 만족을 주는 단물입니다. 

여러분, 영혼을 잘 들여다보십시오! 여러분 영혼 깊숙한 곳에 이와 같은 영생의 단물이 있습니까? 이게 십자가를 믿는 성도의 최고 축복입니다!

십여 년 전 미국 달라스(TX)의 한 교회에 방문해서 설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배 후 교인 한 분을 만나 잠시 간증을 듣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대대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항상 톱(top)만 하던 분입니다. 세칭 KS 마크이고, 미국에서 물리학 박사가 되어서 대학 강의도 하고, NASA(美 우주항공국) 본부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발표한 학설이 舊 소련의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세계적인 지명도가 있었고, 노벨상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자기 논문이 다른 사람에 의해 표절되는 불상사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많은 불이익과 험담에 시달리다 노이로제에 걸렸고, 결국 직장도 그만두고 半 폐인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당연히 생계의 위협도 느꼈습니다. 부인의 권유로 교회도 나가 봤지만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 교회 저 교회 전전했으나,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교회 생활마저 고역이었습니다. 이 분의 인생은 그야말로 ‘마라의 쓴 물’이었습니다. 애쓰고 힘써서 세상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쓴물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원망과 한숨, 좌절과 콤플렉스 가운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그 교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었습니다. ‘마라의 한 나무’를 발견한 것입니다. 매일 목사님과 만나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변화된 겁니다.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아무에게도 굽히지 않던 그가 순한 양처럼 목사님 말에 순종합니다.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이제 남은 생애 예수 전하며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부인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아직 어려운 환경이지만 그 속에서 솟아나는 기쁨으로 행복해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③ ‘실패’에서 ‘승리’로 :

영생을 얻은 성도들이라도 이 세상 살 동안 고난과 역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능력으로 실패가 승리로 바뀝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마귀 사단을 이기고 승리한 사건입니다. 사망 권세를 파하고 승리한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승리입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성경에 보면 실패의 삶에서 승리의 삶으로 변화된 인물들의 예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본문과 어울리는 한 인물을 소개해 드립니다.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입니다. 

그는 본래 베들레헴 사람입니다. 그런데 흉년을 피해 모압으로 이민 갑니다. 마실 물이 없어서 광야를 헤맨 이스라엘 백성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모압 땅에서 만난 것은 쓴물이었습니다. 남편 잃고 두 아들 잃고 자기하고 청상과부 두 며느리만 남았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룻이죠. 나오미가 다 정리하고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갑니다. 그때 고향 사람들 나와 맞이하며 말합니다. “아니, 나오미 아냐?” 그때 나오미가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뭐라고 말합니까? 룻1: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그는 울먹이며 이제는 더 이상 자기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고 말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의 이름 ‘나오미’는 히브리어로 ‘희락’ ‘기쁨’이란 뜻입니다. 자기 신세가 나오미라는 이름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기에 심히 괴로워했습니다. 그렇잖아요! 너무 힘들어서 얼굴을 찡그리는 사람더러 “기쁨이!” “기쁨이!” 이렇게 부르니 얼마나 괴롭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마라라고 부르라고 말합니다. 마라는 ‘쓰다’는 듯이죠. 곧 ‘괴로움’ ‘슬픔’이란 뜻입니다. 자기더러 이제는 “슬픔이!” 이렇게 부르라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그가 고향에 돌아온 이후, 영적으로는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온 후 어떻게 되죠? 다시 나오미가 됩니다! 룻이 그 마을의 유지인 보아스를 만나 재혼합니다. 아들을 낳습니다. 나오미는 꿈인가 생시인가 하며 동네 사람들과 함께 그 아들을 안고 기쁨으로 노래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죄 가운데 있으면 인생은 무질서와 혼돈입니다. 슬픔이요 실패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나아오면,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면 무질서가 질서로, 혼돈이 평화로, 슬픔이 기쁨으로, 실패가 승리로 바뀝니다!

이건 신앙 생활의 공식입니다. 

어느 교회 전도왕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한 공기업의 중역을 지낸 분인데. 퇴직금 갖고 친구와 동업을 하다 망하고 말았습니다. 집안이 기우는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두 딸이 가출합니다. 셋째 아이는 병들어 죽을 지경입니다. 부인은 이혼하자고 달려듭니다. 좌절한 나머지 집을 뛰쳐나가 서울역 지하도에서 노숙자 생활을 시작합니다.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했는데, 어느 날 부인의 친구가 전도합니다. 부인이 변화되고 남편을 찾았습니다. 그 부부는 십자가 앞에 나아가 제멋대로 살았던 과거를 회개합니다, 그 후 하나 하나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부부가 화해하고, 가출했던 딸들이 돌아오고, 나중에 명문대 졸업하고 카이스트 박사가 됩니다. 죽는다고 했던 세째 아이도 치유 받았습니다. 쓴물 같은 가정이 단물 같은 가정으로 변화된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한 사람 한 사람 전도하다 보니 전도왕이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지금 쓴물 같은 상황에 빠져 있는 분이 계십니까? 괜찮습니다! 십자가 앞에 엎드리십시오! 진정으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리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쓴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는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4] 광야의 오아시스 엘림 : 천국의 예표 

이스라엘에 마라에서 단물을 마시고, 또 행진합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엘림에 당도합니다. 그곳은 한 마디로 오아시스입니다. 이것은 천국의 예표입니다. 본문 27절 보시죠.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12지파를 위한 물샘입니다. 그리고 70인 장로를 위한 장막입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 충분한 물과 공간을 가리킵니다.   

천국은 이런 곳입니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이런 기쁨과 축복을 누리지만, 어디까지나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단지 맛보는 겁니다. 궁극적으로 완전한 복락은 장차 천국에서 맛보게 될 것입니다.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2:1~2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완전한 만족 지복(至福)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세상에서는 쓴물이 있습니다. 천국만이 단물만 있는 곳입니다. 
  

아무쪼록 예수 십자가를 믿으심으로 이 세상 살 동안 쓴물이 단물 되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천국이 우리의 본향이기에 항상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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