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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충성하는 이유 (삼하 15: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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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충성하는 이유 (삼하 15:13~23)


시101:6절 [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라 ] 
누가 충성된 자이겠습니까?

기원후 79년에 이탈리아의 폼페이 근처에 베스비우스 산이 용암을 내뿜어서 
폼페이 시 전체를 완전히 페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 후 고고학자들이 폼페이 시가지를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가운데 발굴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모습이 하나 발굴되었는데, 
그것은 폼페이 성의 문을 지키는 보초병이었다. 
그는 그 도시의 성문 앞에 무기를 손에 들고
부동자세를 한 채 죽은 모습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영국 런던의 워커 미술관에 이 군인을 모델로 하여 <콘트러>라는 화가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그 그림 아래는 충성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충성이란 이렇게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아니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성경에 충성을 어떻게 보여 주고 있습니까? 영국 성경학자 <바클레이> 박사는 
성경 속에서 가장 충성스러운 일군의 모델을 곱는다면 자신은 오늘 본문 말씀 속에 나오는 가드 사람 잇대 장군을 꼽겠다고 합니다.  다윗의 생애 중 가장 곤경을 당한 때에 부각 되어진 가드 사람 잇대 장군을 통해 주님 앞에 충성된 일군이 될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 배경을 살펴 보면 
1. 본문말씀의 배경을 말해 보세요(참조/13:1-15:8절)
다윗에게는 대상3:에 보면 19명의 아들과 소실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셋째 압살롬은 외모가 가장 뛰어났지만 그 속에 야심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누이 동생 다말을 겁탈했던 이복 형 암논을 살해하고 달아났다가 몇 년의 객지 생활 끝에 돌아왔지만 아버지가 만나주지 않자, 그는 아버지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밉니다. 
그는 자신의 매력과 젊음을 야망을 충족시키는 데 사용합니다.
그는 군대를 양성하여 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전쟁이 사라진 평화의 시기가 계속되면서 왕궁의 사법체제가 해이해지면서 
힘있는 자들의 횡포가 커지고 억울한 이들이 늘어나자, 압살롬은 그들에게 다가가 따뜻하고 겸손한 말로 위로하면서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노력을 하니 사람들의 마음은 자연히 젊고 매력적이고 따뜻하고, 낮은 데 처한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는 압살롬에게로 쏠립니다. 

마침내 때가 이르렀다고 생각한 그는 다윗 왕에게 헤브론에 가서 예배를 드리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많은 고관들을 그 자리에 초대합니다. 
그는 측근들에게 나팔소리가 들리거든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고 외치라고 지시해놓았습니다. 마침내 반란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에게 가담했고 그를 따르는 백성도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리고는 반역을 일어키게 되니 다윗이 왕궁에 있지 못하고 피난을 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난 것을 보면 이제 막 다윗이 왕위에 올라서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긴 후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 가는 곳 마다 승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토록 영웅으로 생각하는 다윗의 치적이 채 소개도 되기 전에 그의 치부였던  밧세바의 사건이 기록되었고, 뒤이어 급격하게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윗의 권위가 추락하는 것을 보게됩니다.

지금 다윗이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그 곤경이 어느 정도인가를 살펴 보면
2. 지금 다윗의 곤경이 어느 정도 이며 왜 이런 곤경을 당했습니까?(13-18절)
다윗은 전령의 보고를 받고는 상황이 위급한 줄 알고 빨리 예루살렘 궁에서 도망하자고 합니다.  
그리고는 후궁 열 명을 왕궁에 남겨 두고 
온 가족과 더불어 피신하자 백성들이 그를 따라나섰습니다. 
그 행렬이 ‘벳메르학’, 곧 ‘먼 궁’에 이르렀을 때 왕은 잠시 멈추어 서서 점검을 합니다. 
왕과 동행한 군인들이라고는 몇몇 측근 장군들과 외국에서 온 용병들뿐이었습니다. 
왕의 행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처한 위기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다윗의 권위가 쉬이 무너져서 피난길을 떠나야 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압살롬의 반역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지파간의 분쟁을 들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사울의 추종자들이 사울왕가의 몰락이후에 
쉬이 다윗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조금만 서운한 일이 있다면 언제고 반기를 들 준비가 되어 있고 그런 지파들의 분쟁에서 압살롬은 악용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을 하나되게 하지 못한 지도력이 결국은 반역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배다른 왕자들의 분쟁이 다윗의 입지를 불안하게 했습니다. 
이미 첫째 아들인 암논이 왕위 계승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이 암논이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배다른 동생인 압살롬의 동생 다말을 욕보인 죄로 인해서 치밀한 압살롬의 계획하에 암살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이후에 있을 아도니아의 반란에서도 마찬가지 계속된 왕자들의 난은 
다윗은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으로 난처하기에 충분했고 그런 혼란을 틈타 불만 세력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다윗정권을 흔들었던 것입니다. 셋째는 다윗의 병이 악화 일로에 있지 않나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이즈음에 지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시편41편과 55편의 내용에서 다윗이 심히 아프고 
사망의 위험이 미쳤다(시55:4)는 표현 등에서 추측해 볼 수 있으며 이 일로 인해서
결국 백성들이 송사를 제대로 재판하지 못하고 그런 사람들을 세우지 못한 부재로 인해서 
정국이 여러 가지 일들로 무법천지가 되어 국가의 상태가 혼란에 빠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성경의 증언은 다윗의 잘못된 욕망으로 자행된 간음과 살인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비록 용서 받았지만 자신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영적인 교훈 한 가지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변에 사람들이나 환경이 나를 외면하며 곤경에 빠지게 되는 이유가
1) 내부 갈등에 요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2) 왕자의 난같이, 가정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데 있을 수 있습니다.
3) 자신이 영육 간에 약하여 지면 항상 환경이 나를 삼키게 됩니다.
4) 그러나 성도는 무엇보다도 성경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라고 생각되어 진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묵묵히 하나님의 손길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급박한 상황을 전하는 성서 기자는 마치 잠시 호흡을 고르는 것처럼 어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3. 다윗이 가드 사람 잇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이 무엇입니까?(19-20절)
다윗이 벧메르학에 도착하여 정신을 가다듬고 주변에 따르는 사람들을 점검하게 됩니다.
벧메르학 이란 먼 궁이란 뜻으로 어느 정도 압살롬의 포위 지역에서 벗어났음을 시사하는 지명입니다.
그때 블레셋 출신의 가드 군인 육백 명이 왕의 앞으로 지나가는데
다윗은 그 대장인 잇대를 불러 뜻밖의 말을 합니다. 
19절 [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게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이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 즉 네 부하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있다가  새 왕을 모시라는 것이지요. 
그의 마음을 떠보려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진정이었을까요? 후자일겁니다.
잇대는 블레셋에서 쫓겨나 다윗에게 그 몸을 기탁하러 온 사람입니다. 
다윗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들여 자기 수하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쫓기는 신세가 되자, 
그들은 또 다시 뿌리 뽑힌 유랑민의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자신이 지난 날 유랑민으로 떠돌았기에 다윗은 유랑민들의 고생의 삶을 너무도 잘 알았던 것입니다. 
자기 코가 석 자나 빠졌는데도 그는 다른 이의 고통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잇대에 대한 관대는 참으로 다윗의 신앙인품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박남준 시인이   
바위 위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 한 그루에 눈길을 주며 <아름다운 관계>라는 시를 썼는데, 그 의미를 말하자면 처음부터 그 바위에 식물이 자란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 바위는 애초에는 이끼조차 살 수 없었고, 날아온 풀씨가 어렵게 싹을 틔워도 곧 시들 수 밖에 없는 불모의 바위였습니다. 그런 바위가 소나무를 키우다니 어찌된 일인지요? 
시인은 그 놀라운 기적은 바위가 세월에 늙어 품이 넉넉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품이 넉넉해지는 사람이라야 성숙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품이 넉넉한 사람 - 참 듣기 좋으네요. 벤댕이 속과는 정반대이지요.
어떻게 자기도 피난가는 신세에 나그네의 신세 걱정까지 할 수 있습니까?
지금 가지 코가 석자인데 남의 사정이 눈에 들어오겠습니까만 남달리 다윗은 품이 넉넉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보여 주는 리드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희대학교에 계신 도정일 교수는 - 영문학 교수 
현대 한국인을 나포(拿捕)하고 있는 정신상태를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공포의 문화입니다. 일종의 두려움과 불안 의식인데, 
특히 1997년의 금융위기 시기를 지나면서 생긴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이제 사람들은 늘 고용 불안, 실직의 위험, 
사회적인 열등아로 전락할 가능성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삶의 토대가 흔들리면서 마음조차 을씨년스럽게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은 새로운 겨울 공화국입니다. 

다른 하나는 선망(羨望)의 문화 즉 로또 문화입니다. 세상이 불안정해질수록 사람들은 극적인 인생역전을 꿈꿉니다. 로또 열풍이 그것입니다. 
‘뜬다’는 말 한 마디가 이런 풍조를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매스컴은 높은 연봉을 받는 사람과 물질적인 성공을 거둔 소수의 사람들을 영웅으로 포장하여 내보입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처럼 되지 못하면 무능력자가 된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해 얼굴을 뜯어고치고, 학력을 위조하고, 사회적 불의에 대해서 침묵합니다. 선망은 영적 빈곤의 증거입니다. 
내적인 빈곤함을 채울 길 없으니까 외적으로 치장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허영과 천박함이 우리 시대의 표징이 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럴 것 같애요 공포와 선망의 문화로 대표되는 이 사회 속에 
넉넉한 품을 같고 산다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까요?
다윗이 잇대 장군에게 말합니다.
4. 가드 사람 잇대의 맹세가 어디에서 나왔으며 오늘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입니까?
20절 [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 없이 가니 오늘 어찌 너를 우리와 함께 떠돌아다니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 
잇대의 처지와 우리의 처지가 다르지 않습니다. 본디 마음을 잃어버린 채 우리는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다.  영락없는 나그네요, 쫓겨난 자입니다.
물론 잇대에게는 부하들과 식구들이 안심하고 살만한 땅과 보호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필요했던 것은 살아야 할 이유였습니다.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윗은 잇대에게 살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21절에
[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 ] 
<바클레이>는 
충성이란 가드 사람 잇대 장군같이 변절하지 아니하는 것이라 합니다.
비록 돈 받고 팔려온 용병이었지마는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선택한 다윗의 군인이었지마는
그러나 넉넉한 품의 소유자 다윗의 인품에 감동을 받아  다윗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잇대 장군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잇대 같은 충성된 종을 붙여 주었기 때문에  다윗 왕국이 강성해 질 수 있었고 삼하를 통해서는 이런 왕의 충신들이 다윗 휘하에는 부지기수였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다윗과 잇대의 관계는 바로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잇대가 다윗을 만난 후 비록 다윗을 따라가는 삶에 고난이 따르지만 다윗의 인격 속에서 자신의 무덤을 발견했기에  다윗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잇대의 결심 -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주님에 대한 충성의 이유입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밖는 원수들까지라도 용서해 달라는 예수님의 넉넉한 품 때문에 
그 품이 내가 안기고 묻혀야할 마음의 고향인 것에 눈이 뜨여지면 사나 죽으나 주님 계신 곳에 나도 그곳에 있을 줄 믿습니다..  

잇대와 다윗 사이의 감동적인 대화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백성들의 마음은 다윗에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5. 다윗을 따르기를 결심한 가드 사람 잇대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참조/삼하18:2절)
잇대와 다윗 사이의 감동적인 대화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백성들의 마음은 다윗에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왕의 행렬이 기드론 시내를 건널 때 온 땅이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행렬은 광야 쪽을 향했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절망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다윗과 함께 가는 고난의 길이지만 
선고난 후 영광의 길입니다.

23절에 [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길로 행하더라 ] 
수많은 사람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 다녔을 터이지만 다윗 왕이 기드론 시내를 건넜다고 성경에 기록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내포된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기드론 시내를 오가며 건너 다녔지만
성경에는 오직 두 분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는데 한분은 다윗 왕이요 또 한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요18:1절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으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후 예루살렘 다락방을 떠나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신 것입니다. 두 분 다 생의 분기점이 되는 기드론 시내를 건넜다는 점에서 
다윗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되는 것입니다. 

잇대 장군도 다윗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 고난의 광야로 따라갔습니다.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삼하18:2절 보면 다윗이 대세를 가다듬어 압살롬의 반역을 제압하려고 할 때
군대를 삼분하여 일대는 요압의 휘하에 이대는 아비새의 휘하에 삼대는 가드 사람 잇대의 휘하에 두었다고 합니다.
지금 말로 하면 3군 참모총장 가운데 한 자리를 맡겼다는 말입니다.  
주님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인디안 선교사 <브레이드너>의 말처럼  좋은 것을 잃어면 최상의 것을 얻을 줄 믿습니다. 

<맺는말>
변치않는 D.N.A처럼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도 잇대 D.N.A를 간직한 성도들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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