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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알아듣는 진리 (고전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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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듣는 진리 (고전 14:1~9)


고린도전서 13장, 14장은 은혜와 은사 부분에 대해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은 특별히 방언 은사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값없이 하나님의 의사 결정으로 주어지는 구원의 은혜입니다. 은사는 은혜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야할 필요가 있을 때 그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수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우리가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하면 은혜는 절대적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것이 곧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런데 은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러 갈 때 마치 어떤 도구나 장비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생 은사 없이 지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절대적입니다. 구원이 곧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왜 나는 다른 사람과 같은 은사가 주워지지 않나?’라고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은사 부분은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그 사람에게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입니다. 능력을 주시면 이 은사 받은 사람은 은사를 활용해 절대적으로 사용해야 되는 의무가 주어집니다. 예수님도 “열매 맺지 않는 가지는 찍어 불에 던져버리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것이 은사 부분입니다. 주신 은사가 있는데 활용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은 은사를 빼앗아 가신다고 그랬습니다. 은사는 주신 것을 활용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빼앗아 가시는데 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번 구원이 작정된 사람은 영원합니다. 때로 그 은혜를 잘못 사용해서 타락했다든지 하면 하나님이 매를 때려서라도 다시 은혜의 자리로 회복시킵니다. 
탕자 비유에서 나타났잖아요? 택한 백성은 영원한 겁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빼앗아 가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은사는 활용하지 않으면 빼앗으십니다. 이렇게 구분해야 합니다. 은사 받은 사람들은 그 활용을 날마다 지혜롭게 해야 할 의무를 가집니다. 저는 설교 은사를 받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평생 설교를 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을 안 하면 하나님은 나의 이 영적 능력을 뺏어 가셔서 설교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제 선생님 한 분은 금년에 연세가 88세이십니다. 오래 전에 은퇴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건강하십니다. 그런데 어제 목회자 면접시험을 우리 교회에서 200명 했잖아요? 신학교 교수들이 많이 오셨는데 깜짝 놀랄 뉴스를 들었습니다. “목사님! 아무개 목사님이 88세이신데 우리 학교의 총장으로 어제 취임하셨습니다.” “뭐에요? 88세에?” 하셔도 됩니다. 왜? 은사가 있으니까요. 그분은 가르치는 은사, 특별히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은사가 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은사는 하나님이 거두어 가실 때까지 계속 해도 괜찮습니다. 이것이 은사입니다. 봉사 은사 받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봉사를 해야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건강한 것이 은사인 사람이 있습니다. 일을 많이 하라고 주신 겁니다. 우리 신체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봉사 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은 건강합니다. 교회에서 참 많이 봤습니다. 저는 아프다고 하는 사람은 자꾸 일 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면 안 아픕니다. 뭔가는 건설적인 일을 하면 마음이 즐겁고 일을 하면 세포조직이 살아나고 거기에 대해 힘을 주려고 하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렇게 됩니다. 저는 너무 많은 사람이 그런 것을 봤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습니다. ‘나는 은사가 기도이다.’라고 하는 사람은 평생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주신 겁니다. 전도가 은사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가만히 계시면 안 됩니다. 나가서 날마다 전도하셔야 합니다. 돈 많은 사람은 헌금 많이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라고 주신 게 은사란 말입니다. 자기 은사가 뭔지 아는 것조차 영적 능력입니다. 
교회에는 학교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잖아요? 주일학교 교사를 하시라고 합니다. 가르치는 게 은사인데 왜 교회에서 안하시냐고 합니다. 또 우리교회에 은행에서 일하는 분도 많이 계십니다. 재정부에 와서 일 좀 하라고 합니다. 돈 세는 거 정말 은사인거 같습니다. 한 장만 틀려도 큰일 나잖아요? 안 틀립니다. 정말 대단한 은사라고 생각합니다. 점 하나만 잘못 찍어도 큰일 나는데 은사입니다. 노래 잘하는 사람들은 성가대 하시지 언제 하실 겁니까? 은사는 주신 것을 활용해야 합니다. 안하면 “촛대를 옮겨버리겠다. 너와는 일 안하겠다.” 이것이 은사 개념입니다. 은사 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1절은 매우 중요한 은사 활용의 조건을 말합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그러니까 이 은사는 사랑을 기초로 하지 않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뭐든지 “사랑을 따라 구하라.” 바울은 전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 아닙니까? 그 은사를 평생, 죽을 때까지 온 세상을 다니면서 전도했잖아요?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은사는 쉬지 않고 주신 대로 끝까지 가지고 가야 합니다. 마치 나는 이 세상에 이것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과 같이 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위해서 나에게 은사를 주신 겁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하실 겁니까?” 뭐가 언제까지 입니까? 끝까지 해야 합니다. 건강과 시간, 여건만 주어지면 절대로 중단하지 않고 가야 합니다. 제가 우리교회에 와서 첫해 표어를 어떻게 정했느냐 하면 “중단 없는 순례의 길”이라고 정했습니다. 중단하면 안 됩니다. 끝까지 가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은사에 대해서는 그렇게 긴 설명이 없는데 왜 방언 은사에 대해서는 이렇게 긴 설명을 14장 전체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가? 이것을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방언 은사가 교회와 교인에게 유익과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길게 방언 은사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느냐? 두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는 방언을 통해서 신앙상 유익이 생겼습니다. 아주 신비한 체험의 기쁨이 교인들에게 생겼습니다. 따라서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고린도교회에 이렇게 적힌 것입니다. 방언에 대해 성경에 나타난 것은 두 가지입니다. 고린도교회적 방언이 있습니다. 지금 이 말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 다음에 사도행전적 방언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성격이 아주 다릅니다. 사도행전적 방언이 뭐냐?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각국 나라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거기 기록되어져 있는 외국인만 12개 나라 사람입니다.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메소보다미아인,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 구레네 이렇게 사도행전에 보면 적혀있습니다. 다 외국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지방에 방언이 다 다릅니다. 유대 말이나 예루살렘 말 쓰는 사람들이 아니고 다 다른 방언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때 이 특별 은사인 방언 은사를 사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때 방언이 뭐냐? 제자들이 말을 하니까 열 두 나라 사방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 방언으로 알아들었다고 했습니다. 외국어를 한 겁니다. 못 알아듣는 사람에게 알아듣게 하는 방언 은사! 이것이 사도행전적 방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방언은 뭐냐? 아무도 못 알아듣는 차이가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온 세계로 복음이 빨리 확산되어져 나가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도들에게 초능력적 방언을 주어서 그 때 예루살렘에 모여든 그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것이 “아니, 이 사람들이 다 예루살렘 사람들, 유대 사람들인데 외국어인 우리나라 말로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어찜이뇨?” 깜짝 놀란 겁니다. 그래서 그때 그 방언을 알아듣는 사람들이 다 예루살렘에서 복음의 확산이 이루어지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이 사도들의 방언 사건은 온 세계인에게 복음의 빛을 확산하는 기초적 역할 사건으로 열매를 거둔 겁니다. 이러한 사도행전적 방언은 지금도 똑같지는 않아도 일어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저는 선교지를 많이 다니잖아요? 지난번에 에티오피아, 케냐를 갔을 때도 10지방 방언을 가지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공용어도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니까 통역을 해도 에티오피아 말을 할 줄 아는 선교사가 통역을 할 것 아닙니까? 

10방언도 더 되어서 다 못 알아듣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역사는 아주 잘 일어납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설교하고 있잖아요?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도 형편이 모두가 다릅니다. 공부를 아주 많이 해서 지식이 많으신 분도 계시고, 공부라고는 전혀 해보지도 않은 그런 분도 계시고 예술가도 있고 체육인도 있고 사업인도 있고 직업도 농부가 있고 상인이 있고 공무원이 있고 의료인이 있고 문학가가 있고 요리사가 있고 변호사가 있고 다 다릅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는 한 초점으로 모두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방언은 성격이 다릅니다. 못 알아듣는 겁니다. 알아듣는 방언의 성격과 못 알아듣는 방언의 성격이 있습니다. 이것은 방언을 하는 사람 외에는 다른 사람은 절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런 방언이 고린도교회적 방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남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의 유익과 혼란이 무엇인가? 이것을 지금 바울 선생이 말하는 겁니다. 참 이 고린도전서 14장이 있기를 다행입니다. 

그때 벌써 이러한 사건이 있어 바울 선생이 이것을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잘 정리해 놨기 때문에 혼란이 없지, 그때 정리해놓지 않았으면 이 사건은 두고두고 교회에 혼란과 어려움이 될 뻔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4장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다 해결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먼저, 알아들을 수 없는 나만이 아는 방언의 유익이 뭔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신비의 영적 체험으로 신앙에 도움을 줍니다. 이것이 첫째 유익점입니다. 여러분, 이 방언이 터진다는 것은 과학적 현상이 아닙니다. 과학적으로 우리의 머리를 아무리 연구해 봐도 절대로 모르게끔 되어 있습니다. 의학적으로 우리의 혀를 아무리 연구해 봐도 방언이 터지는 것은 절대로 해석 못합니다. 영적 신비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에 대한 자신만의 확답이 주어지는 영적 이점이 방언을 통해서 자기에게 주워집니다. 그 마음이 기쁘잖아요? 그러나 이 은사는 자신의 영적 삶에 큰 영향을 주는 체험적 사건으로서 끝납니다. 다른 유익이 없습니다. 그것만으로 유익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는 방언 은사는 비기독교인들은 절대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이 체험할 수 있는 신비적 사건에 속합니다. 

보통 초기 단계 신앙인들에게 믿음의 큰 도움을 주시는 은사로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두 번째는 방언을 하면 기도를 오래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개인 기도를 시작하면 얼마나 하십니까? 30분이면 할 말이 끝납니다. 온 세계 다 돌아다녀도 30분이면 끝납니다. 기도부탁한 사람들을 다 돌아다니며 다 기억 해봐도 30분이면 다 합니다. 30분에 모든 기도를 끝낼 수가 있습니다. 사실 매일 기도 생활을 계속 하는 사람들은 기도 생활이 짧아집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똑같이 계속 반복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녹음테이프 돌리듯 할 필요는 없잖아요? 매일 똑같은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이 그러실 겁니다. “내가 기억상실증 환자인줄 아느냐? 어제 했잖느냐?” 그런데 이 방언 기도는 몇 시간을 해도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계속해서 막 나옵니다. 어떤 때는 밤새도록 해도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신비적 체험, 그리고 기도를 오래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과 비밀한 기도를 소리 내어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기도를 거짓말로 하면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어떤 때는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만 하는 그런 기도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진실 되게, 내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사람마다 다 비밀한 일이 있어서 남이 들으면 절대로 안 되는 기도도 모두에게 존재합니다. 하나님과 나만 아는 그런 것도 많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기도를 만약에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버리면 당사자가 들을 때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아버지, 사실은 제가 저 홍길동 집사가 하도 미워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회개하오니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홍길동이 옆에서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잖아요? “하나님 아버지! 그만 어쩌다 내가 마켓에 가서 물건을 하나 슬쩍했는데 도로 갖다 놓을까요?” 이것을 큰 소리로 했다고 합시다. 방언은 괜찮습니다. 남이 절대로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나는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밀한 기도를 소리 내어서 내 사정을 하나님께 말할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오늘 4절 말씀에는 자기 자신에게 덕을 세울 수 있는 은사라고 했습니다. 이 덕이란 큰 기쁨을 말합니다. 믿음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야! 내가 방언을 다 하다니!’ 큰 기쁨이 생기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통 네 가지의 유익함을 방언기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14장에 이렇게 방언에 대해서 길게 설명을 해놓은 것인가? 더군다나 오늘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이 14장의 분위기가 나옵니다. 그 분위기는 뭐냐? 방언을 절제시키는 분위기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방언보다 이것이 더 나으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방언을 약간 절제시키는 분위기로 처음부터 끝까지 나옵니다. 다음 시간에 말씀드릴 19절에 가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만약 네가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방언으로 일만 마디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러면 일만 마디 방언이 다섯 마디 가르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14장 전체에 나타납니다. 방언보다 더 좋은 은사가 많으니까 방언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분위기로 계속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저도 이 말씀 때문에 방언을 그쳤습니다. 소년 시절에, 10대 시절에 부흥회 도중에 제가 방언이 터져서 별안간 내 혀가 꼬부라지면서 이상한 말이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기해서 산에 올라가서 따발총 쏘듯 방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성경공부를 하는데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겁니다. “쟤 이상하게 되었나? 반벙어리인가? 왜 저렇게 이상한 말을 하지?” 그래서 ‘이것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다만 방언을 한번 해봤다는, 그래서 잠시 내 마음이 잠시 기뻤다는 하나님의 영적 은사가 내게 임했다는 이상의 어떤 효과는 없는 것이다.’ 제가 이렇게 판단하고 그쳤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약간 방언을 절제시키는 분위기로 바울 선생이 말했느냐 말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몇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 방언은 영적 교만이 생기기가 아주 쉽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우선 방언을 하면 방언 못하는 사람들은 다 무시하게 됩니다. 그때 저는 방언을 하고 우리 담임 목사님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목사님을 이렇게 내려다보고 ‘목사님이 돼서는 방언도 못하시고….’ 이런 마음이 금방 생깁니다. 제가 경험한 겁니다. 그 자체가 벌써 은사 교만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은사의 다양함이 여기 성경에 나타나지 않습니까? 

이 방언 은사는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하나님과 나는 영적으로 직통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때부터 몇 가지를 소홀하게 될 가능성이 생깁니다. 첫째로 성경 보는 것을 게을리 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아닙니까? 방언은 직접 통하는 게 성경 말씀으로 소개 받을 필요가 뭐가 있어?’ 직접 필요한 말씀을 방언으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남의 말을 안 듣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만 들어! 나는 하나님과 직통해!” 그래서 이 방언 잘하는 교인들은 목사 말 절대로 안 듣습니다. 이런 교만이 생깁니다. 틀림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설교를 듣는 습관도 아주 소홀해 집니다. 설교말씀도 잘 안 듣습니다. 하나님께 직접 듣는 게 훨씬 나으니까요. 이렇게 되면 은연중에 그 사람 때문에 교회 질서가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또, 어떤 때는 방언하는 것을 나타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 다 조용히 기도하는데 큰 소리로 방언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 질서가 다 깨지잖아요? 내가 받은 은사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어야지 방해가 될 때는 그 은사는 조심해야 됩니다. 

어떤 때는 상식적 에티켓도 안 지키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아주 심하게 발생합니다. 지금 우리교회 새벽기도회에 피차 약속이 있잖아요? “기도는 조용히 하자.” 그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남의 기도에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다 지켜지니까 좋은 겁니다. 그래서 방언기도는 혼자 있을 때, 방에 들어가서 해야 합니다. 왜? 다른 사람은 전혀 못 알아들으니까요. 옆에서 방언기도해보세요. 기도가 되는지…. 절대로 안 됩니다. 100퍼센트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질서가 깨어집니다. 이 공동체 생활은 성경에 보면 초대교회에서 집사를 선택할 때, 교회 리더를 선택할 때 뭐라고 그럽니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칭찬 듣는 사람” 세 가지 조건이 나옵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세 가지 역사가 없는 사람이 교회 일에 지도자가 될 때는 잔머리를 굴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어려움만 옵니다. 그 다음에 나의 성령 충만은 지혜가 동반하지 않으면 공동체 질서를 깨뜨립니다. “성령이 시켜서 그러는데 말이야!” 어려움이 옵니다. 제가 경험한 것만 해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 1~4부 예배를 드리잖아요? 먼저 있던 교회에서도 이렇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면 시간에 대해서 정확해야 합니다. 제가 강대상에다 빨간 글씨로 커다랗게 써서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놓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교회는 부목사님들이 기도를 하시지만 그 교회에서는 장로님들이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4분 이내로!” 그래야 예배 시간이 맞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지키는 장로가 한명도 없습니다. 4분 이내로 하라고 했는데 어떤 장로님은 24분을 기도하셨습니다. 장로님들 기도가 하도 예배 시간에 길어지니까 그것이 그때마다 교인들에게 불평거리가 되어서 장로님들 기도하는 것마다 시간 재는 집사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어느 장로 7분, 어느 장로 9분 50초…. 다 적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24분을 하셨으니 어떻게 하느냐 말입니다. 그날 설교를 7분 했습니다 다음 예배 때문에 어떡합니까? 그러면 나보다 나이 많은 장로님이시지만 제가 얘기를 해야 되잖아요? “장로님! 오늘 기도 몇 분 하셨는지 아십니까? 기도 재는 집사님이 그랬는데 24분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예배 1시간 드리는데 장로님 24분 기도하시면 어떻게 예배를 드립니까? 잘못하신 거니까 다음부터 수정하십시오.” 어려운 말이지만 목사이니까 그렇게 말해야 되잖아요? 장로님이 눈을 부릅뜨고 “기도는 성령님이 시켜서 하는 것인데 성령이 시켜서 하는 것을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러면 나는 성령이 시킨다고 설교를 2시간 해도 괜찮나요?” 장로님이 없었던 게 뭡니까? 지혜입니다. 나의 성령 충만은 지혜와 함께 가야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지 나에게 주어지는 대로 성령 충만하다고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문제를 일으킨다니까요. 그 다음에 그 사람의 성령 충만과 지혜는 공인성, 칭찬 듣는 사람, 온 교우들이 인정할 수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어휴! 저 사람 혼자 날마다 잘났다고 떠드는데….” 아무도 인정하지 않으면 지도자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공동체에서 잘 따라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집대로 하면 다 망가집니다. 질서는 다 깨집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방언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방언 받았다고 “성령이 주시는데 어떡합니까?” 막 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질서가 깨지는 문제가 실제적으로 왔습니다. 본래가 방언 기도는 자기에게만 덕을 세우는 것이지 남에게 절대 유익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만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남이 듣는 데서는 절대 안하는 것이 상식이요 질서입니다. 본인 혼자 있으면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성경이 그렇다면 믿어야 합니다. 그냥 성경을 초월해서 성령 받았다고 고집하니까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나의 받은 은사를 지나치게 질서 없이 극대화 하면 반드시 신앙의 밸런스가 깨지고 부작용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예배의 모범이나 규범이 그래서 나오는 겁니다. ‘이럴 때는 이렇게 해야지….’ 오늘 말씀에 이런 말을 합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라.” 여기서 말하는 예언이란 뭐냐? 미래에 어떤 사건을 미리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언은 방언에 비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다 예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예언입니다. 
장차 올 일까지 다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말씀에 충실하라 그 말입니다. “이것이 예언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나으니라.”라고 19절에 말씀하는 겁니다. 본문, 즉 말씀에 충실한 것이 예언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8절과 9절을 우리 다 같이 읽어봅시다. 시작하겠습니다.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알아듣는 말을 열심히 하라는 겁니다. 알지도 못하는 말 그렇게 해봤자 무슨 큰 유익입니까? 알아들을 수 있는 분명한 이야기를 하세요. 나팔 부는 건지, 피리를 부는 건지 그렇게 불분명한 것으로 하지 말고 아주 분명한 말, 분명한 소리를 내도록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14장에서는 이러한 방언에 대한 가르침으로 끝이 납니다. 다음 주에 또 한 번 할 텐데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을 신령하게 하는 것은 가장 좋은 은사인데 그게 뭐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듣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가르치는 것이 가장 좋은 은사입니다. 이렇게 결론합니다. 지금 방언하시는 분들은 그대로 하세요. 그런데 혼자 하세요. 골방에 들어가서 하세요. 밤새도록 해도 됩니다. 어디든 들어가서 마음대로 하세요. 다만 오늘 말씀을 잘 기억하면서 내가 받은 은사가, 이 방언은 나한테만 유익한 것이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줄 게 없습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예언을 더하라, 하나님 말씀 가르치는 것을 더하라고 이렇게 말씀하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무슨 은사가 어떤 것이 더 훌륭하고 덜 훌륭하고 그런 것은 없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신앙적으로 지혜롭게 잘 생각하여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는 이런 것인데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우리 각자가 지혜롭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모든 은사가 다 하나님 앞에 훌륭하게 쓰임 받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 방언 은사에 대한 올바른 갈 길을 정해주는 말씀을 저희들이 보았습니다. 받은 은사를 잘 활용하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에게도 유익하고 또 많은 사람에게 덕을 끼칠 수 있는 더 좋은 은사를 행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으로 본문 말씀을 저희들이 소화하고 그렇게 따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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