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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겨자씨 안에 담긴 생명 (막 4: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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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 안에 담긴 생명 (막 4:30~32)
 

남성들이 모여 군대 이야기를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또 축구 이야기를 해도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부부가 함께 모였다가 남편들이 군대나, 축구 이야기가 나오면 아내들은 고개를 돌립니다. 그러다가 군대에서 했던 축구 이야기가 나오면 아주 질색을 합니다. 세 사람의 친구들이 군대에서 축구했던 이야기가 아닌 족구했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통신병으로 산꼭대기에서 군복무를 했던 친구가 말했습니다. ‘야, 너희들 산위에서 족구 하다가 공이 산 아래로 굴러 갔을 때 공을 주우러 내려가 본적이 있냐? 공이 잘못 튕겨 산 아래로 굴러가면 그 공을 주워오는데 한 나절 걸린다. 졸병 때 산 아래로 굴러간 공을 주워 오느라 죽을 고생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강을 끼고 있는 부대에서 근무했던 친구가 ‘야, 너희들 한 겨울에 족구하다가 공이 강에 빠졌을 때 강에 들어가 공을 건져온 적이 있냐? 한 겨울에 공이 물에 빠졌을 때 옷을 다 벗고 공을 주워 오는 것은 죽음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때 전방에서 근무했던 친구가 두 친구의 이야기를 다 듣고는 가소롭다는 듯이 ‘너희들 족구 하다가 지뢰밭에 들어간 공을 주워 온 적이 있냐?’ 라고 물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인내와 용기를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어려운 시간들이 지난 후에 기쁨과 감사함으로 어려웠던 지금을 웃음으로 이야기할 때가 분명히 올 것입니다. 서로 옆에 앉으신 분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힘 내십시오. 건강하십시오. 사랑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겨자씨와 관련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겨자씨와 관련해 재미있는 역사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유명한 대왕이요 장군이던 다리오스 황제가 유럽 지역을 침략하면서 첫번 째 치렀던 전쟁이 알렉산더 대제가 거느리는 군대와의 대전이었습니다. 그때 다리오스는 알렉산더 대제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병사 하나를 시켜서 참깨가 가득 들어있는 한 자루의 포대를 보냈습니다. 자루에 참깨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군대가 이렇게 많으니, 손들고 항복하라. 너희는 승산이 없다.’ 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었습니다. 전쟁을 하기에 앞서 고도의 심리전을 펼친 것입니다. 

참깨가 가득 들어있는 포대를 받은 알렉산더 대제는 답장으로 작은 봉투에다 한 일의 씨를 넣어서 다리오스 황제에게 보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겨자씨’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제가 보낸 겨자씨에는 ‘우리가 작다고 무시하지 말라. 우리는 놀라운 위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 군사들은 생명력이 있어 우리 군사 한 명으로도 깨알 같이 많은 너희 모든 군사와 싸워 승리할 수 있다’라고 응수한 것입니다. 대단한 심리전입니다. 그 전투에서 결국은 알렉산더가 승리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천국에 대해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겨자씨를 자기 밭에 심었습니다. 겨자씨는 그 어떤 씨보다도 작습니다. 그러나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기 시작하면 2미터 내지 3미터의 나무로 자랍니다. 겨자씨가 씨 중에 가장 작은 씨지만 그것이 자라면 새들이 깃들만큼 큰 나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실 때는 겨자씨의 작음을 강조하는 것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작은 겨자씨 안에 담겨 있는 생명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씨 중에 가장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겨자씨 안에 있는 생명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껍질이 썩어져야 합니다. 겨자씨가 땅에 묻혀 그 껍질이 썩을 때 그 겨자씨 안에 있는 생명이 밖으로 나와 수 미터가 되는 나무로 성장하게 됩니다. 반면에 겨자씨의 생명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껍질이 썩지 않으면 겨자씨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씨앗으로 남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육의 단단한 껍질을 벗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면 한결같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단단한 육신의 껍질을 깨거나, 껍질을 벗는 과정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두 사람을 예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모세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였습니다. 그는 궁정에서 왕이 될 수 있는 모든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한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지식과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히브리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을 위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모세는 바로왕이 두려워 미디안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며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살아갔습니다. 모세는 그 미디안 광야 40년 생활을 통해 자신의 교만과 자만심의 껍질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디안 40년의 생활을 통해 모세의 육체의 자랑이었던 껍질을 온전히 벗기신 후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단단하게 싸고 있던 세상의 가치를 중심으로 한 껍질을 벗은 후에 하나님의 진정한 일꾼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 생활을 하고 있는 베드로를 발견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아직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는 광석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예수님은 그 안에 있는 순수함과 열정을 발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나를 쫓으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를 사시면서 베드로를 훈련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베드로의 거칠고, 감정에 치우치는 다혈질과 성격의 모난 껍질을 벗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예수님과 함께 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게 되셨을 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후에 죄책감이 밀려와 언덕을 넘어가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아픔과 상처로 인해 괴로워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미움과 자괴감에 쌓여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을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물으심에 베드로는 ‘네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한 것은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세 번 부인했던 아픔을 세 번 시인함으로서 베드로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죄책감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상한 영혼을 치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서 인간적으로 높아지고자 했던 마음,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생각과 혈기, 천한 신분과 무식함에 대한 열등의식 등의 껍질을 하나씩 벗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덮어 씌우고 있는 껍질을 벗김으로 그의 내면 세계에 담겨 있는 순수함과 열정의 생명이 싹을 틔우고 복음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 왔습니다. 조금 있으면 모든 생명체들은 새싹을 틔울 것입니다. 산과 들판에 있는 모든 풀들은 파릇파릇 새싹을 돋우며 자라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산 위에서 굴러 내려온 큰 바위에 눌려 있는 풀들은 자라지 못합니다. 바위에 눌려 성장하지를 못합니다.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생명을 누르는 외부의 힘에 의해 생명을 맘껏 피우지 못합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짓누르고 있는 그 바위를 옮겨 주면 모든 풀들은 상처들을 이겨내며 눌렸던 생명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바위에 눌려 입었던 상처와 아픔들을 극복하며 쑥쑥 자라납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생명의 대단한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은 내면의 세계에 대단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남극에서 물 위에 떠있는 빙산은 빙산 전체 크기의 약 2% 정도만 바다 위로 드러낸 것이라고 합니다. 바다 밑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빙산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전체에서 일부만 드러나는 것을 ‘빙산의 일각’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일평생을 살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15% 이상을 사용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 내면의 세계에 대단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의 영혼을 짓누르는 큰 바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죄의 바위입니다. ‘죄’ 라는 바위가 그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죄’라는 바위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죄의 바위는 사람마다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욕심과 탐욕의 바위입니다. 어떤 사람은 음란과 쾌락의 바위입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와 미움의 바위입니다. 어떤 사람은 염려와 두려움의 바위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만과 자만의 바위입니다. 어떤 사람은 게으름과 열등감의 바위입니다. 이러한 바위에 눌려 상처 입은 영혼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 상처로 인해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놀라운 생명력의 힘을 꽃 피우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사역은 육체와 영혼에 죄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죄로 눌려 있는 그의 상처를 치유하심으로 그 사람 속에 있는 생명의 힘을 되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대표적인 치유 사건 중의 하나가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를 치유하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난장이로 태어나 외모적인 수치스러움과 열등의식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자신은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스스로를 자학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가까이 나가고 싶었지만 열등의식과 세상 사람들로부터 입은 상처로 인해 예수님께 다가서지 못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것에서 그가 예수님을 사모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삭개오의 마음을 아시고 뽕나무 밑으로 가셔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거하겠다.’ 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가셔서 그와 함께 음식을 나누고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며 깊은 교제를 갖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이 흠모하는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며 나누는 대화를 통해 그동안 자신을 짓눌렀던 열등의식과 저주 받은 인생이라는 멸시함의 상처로부터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세상을 향한 분노와 미움, 저주스런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지금까지 입었던 상처의 껍질을 하나, 둘 벗기 시작했습니다. 상처 입은 껍질을 벗기 시작했을 때 그의 내면에 있는 생명의 힘이 꿈틀거리며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변화를 보며 변화를 선포합니다. 그는 누구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세리의 직업에서 떠날 것을 선포합니다.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변화가 삭개오에게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의 거듭남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적입니다. 우리들은 눈에 보여지는 물질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경이로운 일을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기적입니다. 그러나 더 대단한 기적은 보이지 않는 영혼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그 변화를 보고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기적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으로 말미암아 죽은 청년의 수가 30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과 남편을 전쟁터에 내보내고 근심과 염려와 불안에 빠져 심장병으로 죽은 미국 시민들의 수가 100만을 넘었다고 합니다. 전쟁터에서 적군의 총탄에 맞아 죽은 사람의 수보다 불안과 공포로 인해 죽은 사람의 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영혼의 상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사단은 우리의 죄를 확대시킵니다. 그리고 그 죄에 눌려 옴짝 달싹 못하게 합니다. 두려움과 염려, 분노와 미움, 교만과 욕심, 게으름 등의 죄의 속성으로 우리의 영혼의 생명을 짓누르고 상처를 입힙니다. 그 상처는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내 상처는 내 상처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 상처는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날카로운 무기가 됩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줍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깊은 상처는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통해서 받게 됩니다. 특히 가족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에게로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성령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우리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는 깊은 상처가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의 생명을 둘러 싸고 있는 단단한 껍질이 어떤 것들인지를 성령 안에서 발견하고 십자가 앞에 무릎 꿇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들의 상처가 깨끗이 치유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겨자씨가 껍질을 벗고 생명이 자라나 새가 깃들만큼 큰 나무로 자라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영혼의 상처를 벗어 버리고 내 안에 있는 생명이 자라나 삶의 참된 기쁨과 감격,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내 삶의 영역에 확고하게 세우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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