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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밀하게 구제하라 (마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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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게 구제하라 (마 6:1~4)


유대인들에게는 종교 생활의 삼대 행위 즉 자선, 기도, 금식이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유대인 경건생활의 3대 덕목이라 일컬어집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의문을 가지시거나 반대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문제로 지적하신 것은, 우리의 경건생활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들이 나쁜 동기에서 행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영국의 시인 T. S 엘리어트는 “인간을 향한 사탄의 마지막 유혹은 올바른 목적을 잘못된 동기로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라는 의미 깊은 말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경건생활에서 아름다운 일들이 어떻게 잘못된 동기로 수행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우리 신앙생활의 불순한 찌꺼기 같은 것을 제거해 버리는 은혜를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1절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번역 성경을 보면 1)사람에게 보이려고 너희의 경건함을 행치 않도록 주의 하라. 2)사람에게 보이려고 너희의 신앙을 자랑하지 않도록 주의 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 하라” 주님의 이 말씀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구제, 기도, 금식 세 가지 경건생활의 전제적인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우리의 경건생활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지 말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 중심한 것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만일 우리의 신앙생활이 사람을 중심하게 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 중심한 구제, 기도, 금식에 대해서는 4, 6, 18절에서 각기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 잘못인가? 혹은 옳은 일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한 나이 많은 은둔자가 있었는데, 그는 물을 가지고 지옥의 모든 불을 꺼버리고 싶다고 했으며, 불을 가지고 천국의 모든 복락을 다 태워버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선을 위해서 선을 해야 되는 것이고, 덕은 그것 자체가 보상이므로, 보상을 받겠다는 생각은 우리들의 의식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매우 그럴듯하고 고상한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셨고, 또한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상과 벌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모든 상과 벌을 제거해 버리려는 것은, 결과적으로 불의의 승리를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종말이 하나요, 꼭 같다는 것은 너무도 불합리한 주장인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선하게 되던 악하게 되던 관여하시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떠한 생활을 해도 그 결과가 같은 것이라고 하면, 아무도 선하게 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상벌을 제하여 버리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께는 정의도 능력도 없다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받지만, 상급은 행위대로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2절에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에 있어서 구제는 중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제 생활에 대하여 성경은 어떻게 교훈하고 있습니까?

1. 구제에 대한 성경의 교훈

성경에는 구제에 관한 교훈이 많습니다. 신 15:7-8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고 했으며, 신 15:11에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고 하였고, 잠 14: 21에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고 했으며, 레 25:35에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라.”고 하였고, 잠 14:31에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했으며, 잠 19:17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규정 또한 많이 나타납니다. 
경작지, 포도원, 감람원은 7년마다 갈지 말고 묵혀 두어서 가난한 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했으며, 또한 매 3년 끝에는 그 해 소산의 1/10을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그 지방에 거하는 객과 가난한 자들에게 주도록 했습니다. 이런 규정은 엄격하게 지켜졌고, 그래서 가난한 자들과 레위인, 고아와 과부들은 주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려고 힘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날이나 오늘이나 유대인 가운데는 거지가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생기면, 꼭 그 민족들이 피차에 상부상조해서 도와주어 같이 살도록 힘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찾아 온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가 온전케 되고자 하거든,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으며, 또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 이니라.”고 하심으로써 구제를 권장하셨습니다. 그런가하면 초대교회에서 일곱 집사를 선택한 동기는, 교회로 하여금 구제하는 일을 전담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백부장 고넬료에 대하여는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 하신 바 되었으니” 라고 기록하여, 구제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경건한 일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초대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10만의 성도들이 2만에 달하는 걸인들을 구제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오늘 우리 자신이나, 우리 교회에 부끄러운 점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좇아 앞으로 구제생활에 더욱 힘을 써야만 합니다.

2. 잘못된 구제 행위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구제가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잘못 이해되고, 잘못 실천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구제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성전에서 울려 퍼지던 나팔에는 여러 종류의 나팔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구제를 해 달라’는 나팔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구제를 요청하는 그 나팔 소리가 들리면, 많은 사람들이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가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구제를 하러 갈 때 “여러분이여, 나를 보십시오. 내가 이제 구제하러 갑니다. 이 구제하는 선한 인간, 이 아름다운 일을 행하고 있는 나를 좀 봐주세요!” 하는 마음 자세로 구제를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마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가난한 사람이 많이 모인 곳, 많은 군중들이 운집하는 장소를 택하여 나팔을 불며,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구제를 하였습니다. 이렇듯 구제의 동기가 자기 P. R에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바로 이러한 범주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외식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외식’이란 가면을 쓰고 연극하는 배우를 말합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구제를 연극적인 동기에서 행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대인관계와 대신관계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아름답게 맺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지 못하는 것도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는 볼 수가 없으며, 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여도 우리의 신앙은 정상적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참 좋은 것 같은데, 사람과의 관계는 엉망으로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인정받지 못하며, 반면 사람과는 좋은 유대관계를 가지고 모두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는데 하나님에게는 신실치 못하고 형편없는 사람을 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다 올바르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두 가지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주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관하여 말하기를, 만일 그 사건이 후미진 여리고로 가는 골짜기가 아니라, 예루살렘 거리 의 한 복판에 일어난 사건이었더라면,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것을 보고 그냥 지나갔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안보는 곳이었기에 모른 척하고 지나갔지, 많은 사람이 보고 있었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사람을 반드시 도와주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람이 보지 않는 곳이었기에 할 것을 안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반대로 사람들이 보니까 하는 척하면서 행동한 일은 없습니까? 이렇듯 그리스도인의 봉사생활에는 시험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남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인기나 호평, 칭찬과 명예를 위해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돕기는 하되 어떻게든지 그 일을 알리기 위해 애쓰는 마음, 이런 유혹과 시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경고를 하셨습니까? ‘상이 없다’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아무리 구제를 많이 해도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를 하였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벌써 많은 칭찬을 받았으므로, 구제에 대하여 이미 전액을 되돌려 받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이미 세상에서 많은 박수를 받았고, 칭찬을 받았으므로, 이제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구제를 해야 합니까? 

3. 은밀하게 구제하라

주님께서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구제 했다는 것을 자신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뜻으로 재미있게 주석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칼빈은 그것을 가리켜 “하나님을 우리의 유일한 증인으로 모시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제 후에 내가 참 귀한 일, 선한 일, 좋은 일을 했다는 소리를 자신에게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기억 속에 내가 구제했다는 생각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구제라야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순결한 구제로서 기억되고 또한 상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에 어떤 교회에서는 헌금주머니에 헌금을 하도록 했다가, 방법을 바꾸어서 누구나 그 헌금 내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둥글고 넙적한 그릇에 헌금을 하도록 했더니, 헌금주머니에 헌금을 할 때보다 헌금이 훨씬 더 많이 나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분명히 헌금은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마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심리가 많이 작용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옛 사람에 속한 부패한 허영심, 명예욕 같은 것들이 종교적이라는 탈을 쓰고 신앙생활 가운데 들어와서 도사리고 있기가 쉬운 것입니다. 

일본에서 일했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동경 중심부에 한국 유학생들과 재일동포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를 짓고자 돈 많은 실업인들을 초청하여 그 취지를 설명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취지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모두가 대찬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업에 기쁨으로 동의하였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모인 20명의 실업인들에게 그러면 1/20 씩 기금을 헌납하시지요! 라고 했더니, 모두들 내가 이 다음에 더 많은 돈을 벌어서, 내가 홀로 몽땅 지어드리지요!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 기숙사는 혼자 지어 바치겠다는 사람들의 비협조로 10년이 지나도 짓지 못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힘을 모아 함께 그 일을 하면 훨씬 쉽기도 하고 또 빠르기도 할 텐데, 자기 혼자 힘으로 지어서 자기의 이름만을 내겠다는 이 허영심이 썩어빠진 영웅심이 결국 그 일을 못하게 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세상에는 또 훌륭한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영국정부가 국가적으로 크게 공헌을 한 고든(Gorden,C.G.) 장군을 치하하려고 했습니다. 동상을 세우고 기념비를 건립하려고 했지만 장군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작위(爵位)를 수여하고 포상금을 지급하겠다고 하여도 거절했습니다. 그는 33회나 전진을 누비면서 혁혁한 공을 세워온 터라, 영국정부는 어떻게 해서든지 기념을 하고 싶어서 조그마한 금메달에 그 공을 기록하여 증정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고든 장군이 죽은 후 유품을 정리하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메달이 안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궁금하여 수소문하여 보았더니, 가슴 뭉클한 사연이 숨어있었습니다. 맨체스터에 대흉년이 들었을 때 장군은 그 메달을 녹여 팔아서 굶주리는 자들을 구제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든 장군의 일기장에는 이 사실에 대해 단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던 선물을 그리스도께 바쳤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선행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을 행할 때 무엇보다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우리의 육신적 유혹을 이기고, 다만 감사로 기쁨으로 그것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즐거워하면서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위선자도 가지가지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에도 죄악을 숨기고 멀쩡한 사람으로 행세하는 철면피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의 의를 주장할 정도로 낯간지러운 자기만족에 빠져있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인기나 호평을 얻으려고 선행을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 또한 자칫하면 이와 같은 위선자가 될 위험이 매우 큽니다. 허쉘 포드 목사님은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해독 중 하나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이다. 많은 사람들이 외적으로는 선하나 내적으로는 썩어 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천사 같으나 속마음은 위선자들이다. 그들은 교회에 나가고, 훌륭한 신앙생활에 대하여 얘기하고, 자기의 업적을 나타내고, 자기의 의를 자랑하지만, 그들의 마음 깊은 곳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종교생활에서 가장 큰 결핍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의를 오로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신앙생활의 의는 하나님을 상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꼭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분을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처지와 형편을 살피고 계시며, 우리가 행하는 모든 믿음의 일들을 불꽃같은 눈으로 다 보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눈을 의식하기보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을 의식하며,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생각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는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제할 때에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나팔을 불지 말라”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일지라도 구제하는 생활이 있습니까? 그런 면에서 지난 번 월드 비전의 구제 헌금에 동참한 성도들은 참으로 귀한 일을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충북 음성 꽃동네에 최귀동이라는 걸인이 있었는데, 그 할아버지는 자신이 구걸한 것으로 18명의 다른 걸인들을 먹여 살렸다고 합니다. 그의 인생 목표는 “얻어먹을 힘이 있으면 얻어먹을 수 없는 사람을 돕는다.”라는 것인데, 이러한 그의 생활이 많은 사람을 크게 감동시켰다고 합니다. 걸인이라면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진 사람인데, 그 인생 밑바닥에서도 남을 도우며 사는 사람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남을 도울 형편이 못돼!”라고 하면서 핑계를 하면 안 될 것입니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여러분, 이 말씀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의 선행에 대해 최소로 주목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최고로 주목하신다.” “외식하는 자들은 그림자를 붙잡지만, 의로운 사람은 실체를 손에 넣는다.” “도둑질 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은밀한 구제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큰 상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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