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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다운 교회" (행 2: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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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다운 교회" (행 2:42~47)


I. 이상향의 교회?

김연숙씨가 쓴 「흔들리는 신앙, 붙들어 주소서」라는 글에 22년 동안 미국 이민 교회에서 108번 교회를 옮긴 성도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년에 약 5번 정도, 평균 두 달에 한번 정도 교회를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상향의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옮기는 날로부터 그 교회의 단점을 찾기 시작합니다. 목사의 허물을 맨 먼저 찾아냅니다. 그리고 자기 눈에 드러난 허물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답니다. 교회 주보, 성가대, 주방, 교인들의 태도 등 108개 교회의 단점을 낱낱이 노트에 적어서 마치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답니다. 그가 병으로 죽게 되자 어느 교회도 그의 장례식을 해 줄 수가 없었답니다. 이유는 그가 섬긴 교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죽기 전 108번째 교회 목사님이 불쌍히 여겨 그의 장례식을 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왕 신앙생활을 할 바엔 좋은 교회, 이상적인 교회를 찾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이상향의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교회는 비신자를 전도하여 부흥하는 교회가 되어 보려고 몸부림하는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로 이사와서 등록하신 교우들, 교회의 비전과 영성을 찾아 이런 저런 이유로 등록하신 교우들도 일부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교회 또한 이상향의 교회는 못되지만 그 이상을 향해 가고 있는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함께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가길 원합니다. 우리 생애의 이사 등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이유외엔 마지막 교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끝이 나고 신앙의 방황은 건강한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납니다. 사실 한국교회의 지금 과제 중 하나가 이동성장을 막아 보는 것입니다. 큰 교회들은 이동성장을 해 보겠다는 의도적 프로그램과 몸부림을 중단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42-47은 이 땅에 존재했던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첫 번째 지상교회 예루살렘교회입니다. 그 모습은 초대교회의 실제적인 묘사이며 동시에 오고 오는 모든 교회가 본 받아야 할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적인 모습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안에서 금방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물론 소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개척된 초기교회들 속에서도 처음 예루살렘교회가 자랑했던 모습은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지상교회의 현실입니다. 

우리교회가 개척된 후 약 6개월 간은 남의 유치원을 빌려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창립을 준비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열악했지만 때로 이것이 예루살렘 교회이구나 싶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면 몇 가정 안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밥을 나눠 먹고 헤어지기 싫어서 또 기도하고 한 사람씩 가운데 놓고 기도하고 이게 교회이지 싶었습니다. 그러나 1년 2년이 채 못되어 그 교회에서도 상처받는 사람이 생기고 떠나는 교인이 생겼습니다. 초기 유치원 교회시절 이 교회를 섬기던 교우들 가운데 지금까지 교회를 꾸준히 지키는 사람은 꼭 1명 있습니다. 여든이 되신  은퇴장로님 한 분입니다. 

II. 사도의 가르침에 헌신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은 이땅 교회들이 포기하고 살아야 할 단순한 이상입니까? 저들이 누렸던 교회의 영광과 축복은 우리가 꿈도 꿀 수 없는 이상향일 뿐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분명 우리가 배우고 본받아야 될 교회의 참된 모습입니다. 건강한 교회, 참된 교회의 모습, 그 원리가 오늘 본문 안에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저자는 본문 42절에서 예루살렘교회의 멋진 모습 4가지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우리말 성경을 잘못 읽으면 예루살렘교회가 마치 기도만하고 있었던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기에 힘썼던 교회였다.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고 교제하는데 힘썼던 교회였다. 떡을 떼고 기도하기에 힘을 썼던 교회였다" 이런 뜻입니다. 

초대교회는 4가지 사역에 헌신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데에 전적으로 힘을 썼습니다. 우리말 성경엔 "사도의 가르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사도"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고 "가르침"은 단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번역해야 옳습니다. 
12사도가 시간마다 주제마다 장소마다 다르게 가르쳤지만 그들의 가르치는 내용에는 분명한 일치와 통일성이 있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하나의 가르침이었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충만 했던 초대교회들은 한결같이 예루살렘교회처럼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데 힘을 썼습니다. 

교우들 중엔 사도들보다 많이 배운 유식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구약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들도 있었습니다.(행6:7) 배우고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성경을 또 묵상했습니다.(행17:11) 참으로 겸손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예루살렘교회는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혹자들 가운데 "우리 모두 성령충만한데 무엇을 새삼스레 배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을 가르치고 교회를 조종하려 덤비는 사람이 있을 만도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체험하면 할수록 초대교회는 말씀 앞에, 사도들의 가르침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자신이 체험하고 배운 주관적 경험이 정말 바른 것인지 사도들로부터 객관적 교정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말씀이 뼈대라면 체험은 살과 같습니다. 
말씀이 뿌리라면 체험은 가지와 같습니다. 
말씀이 열매라면 체험은 잎사귀와 같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체험이 깊을수록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건강한 신앙인은 말씀을 들을수록 더욱 배고파하고 목말라 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입맛이 좋습니다. 먹는 음식들이 소화도 잘 시킵니다. 소화된 음식이 흡수가 됩니다. 병든 사람은 이래서 맛이 없고 저래서 소화가 안된다고 합니다. 

음식이 조금 짜면 왜 짜! 그러지 않고 짭잘해서 맛있다고 합니다. 싱거우면 삼삼해서 맛있다고 하거든요. 밥에 물이 많이 들어가면 질척해서 좋다고 합니다. 밥이 되게 되면 고슬고슬한게 맛있다 그럽니다. 설탕이 넉넉히 들어가면 달콤한게 맛있다 그러고 식초가 들어가면 새콤한게 맛있다고 그럽니다. 너무 매우면 매콤한게 맛있다 그럽니다. 입맛 좋은 사람들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분명한 진리가 있습니다. 건강한 교인은 비록 부교역자라 할지라도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신앙적인 신학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 교회에서 선포하고 가르치는 말씀과 교육을 맛있게 먹을 줄 알고 그것으로 배부를 줄 알고 사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어딘가 병이 든 것입니다. 

III. 바로 그 교제, 그 기도

사도들로부터 말씀과 가르침을 받는데 힘쓴 초대교회는 함께 교제하고 함께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개인적 영적 체험이 충만하면 할수록 성도들은 서로 이웃을 돌보고 교제하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또 그만큼 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여기 교제하고 떡을 떼었다는 것은 단순한 먹자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밥 먹을 것이 없어 구걸하자는 것도 아니고 배가 고파 배를 불리기 위해 교회에 모였다는 말도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모이는 사람이 한 가족이 되었다. 한 식탁에 모여 신령한 교제를 나누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천국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이 교제는 세상사람들이 서로를 이용하려는 이기적이고 허무한 교제, 피곤하고 짜증스런 그런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모여서 부정적 얘기나 하고 서로를 조종하려 들고 자기 자랑이나 늘어놓는 그런 모임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에서 "교제"란 말이 "테코이노니아" 정관사 The가 붙어 있습니다. "그 교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교제란 초대교회 성도들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함께 경험했던 교제란 뜻입니다. 다락방에 모여서 함께 사랑했던, 자기 죄를 고백하고 서로 용서했던, 허물과 약점을 덮어 주었던, 서로들 아껴 주었던, 내가 먹지 못해도 너를 먹이고 입혀주었던 바로 그 교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교제가 초대교회 안에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원문에서는 "교제와 떡을 떼며 기도하기"라고 할때 "그리고"란 접속사가 없습니다. 즉 떡을 떼며 기도하는 것 자체가 바로 교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교제가 떡을 떼는 일과 함께 기도하는 일들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교제하는 일, 떡을 나누는 일, 기도하는 일을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서로가 서로를 섬겼습니다. "전혀 힘쓰니라"

여기 "기도"란 말에도 "그 기도"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오순절날 다락방에서 함께 했던 그 기도를 말합니다. 기도란 말은 또한 "기도들"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어떤 기도는 성령의 임재가 나타나고 어떤 기도는 뜨겁게 기도하고 어떤 기도는 응답이 되고 그러나 어떤 기도는 시시하고 열정이 사라지고 성령의 응답이 없는 그런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혼자 기도하더라도 함께 기도하더라도 문제가 있어 기도하더라도 평안할 때 기도하더라도 함께 모여 통성으로 기도하더라도 바로 그 기도가 오순절 교회안에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성령 강림절 아침 함께 경험했던 그 성령의 교제와 그날의 기도가 예루살렘 모든 자리, 모든 시간에 가득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술에서 아우라(Aura)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독일의 벤야민이 만들었던 말입니다. 예술작품의 원본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고한 맛을 "아우라"라고 불렀습니다. 모조품이나 복사품에서는 도무지 느낄 수 없는 명품 진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고함 이것을 "아우라"라고 합니다. 

속초에 가면 순두부 집이 많이 있는데 모두 원조라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진짜 원조를 알고 있습니다. 여러 집에 가서 먹어 보았지만 그 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진품의 맛이 있습니다. 장충동에 가면 족발 집이 많이 있습니다. 모두 원조라 합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원조집이 있습니다. 그 집에서만 느끼는 품위 있는 맛이 있습니다. 그게 아우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아우라가 있습니다. 진품의 교회, 원형의 교회, 명품 교회의 맛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가운데 온전한 교회 이상향의 교회는 없지만 우리의 가슴속에 우리의 목장모임에 우리의 가정 안에 우리의 예배 가운데 아우라를 회복하기 위해서 평생 몸부림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이게 목회입니다. 

IV. 아우라(Aura)

초대교회 아우라(Aura)의 맛을 본 사람들의 영혼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경외감이 일고 있었습니다. 아우라 안에서는 기사와 표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저들은 자기 물질을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흔쾌히 사용했습니다. 가진 돈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재산이나 소유를 팔아 섬기는 사람들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유대교 안에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하는 자들을 출교하기로 결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결정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예수가 그리스도라 선포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오히려 유대인들이 두려워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초대교회는 모두 재산을 정리해서 공유하고 분배하여 공산사회를 건설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루살렘교회는 교우들이 너무 서로를 사랑하여 서로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 영적인 가족인 교회를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시간도 아깝지가 않고 기쁨으로 몸을 드릴 수 있었고 재산까지도 때로 팔 수 있었다는 겁니다. 

교인들이 둘만 모이면 교회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셋만 모이면 다른 교인 욕하고 다른 교회를 비난하고 다닌다면 그런 교인 그런 교회를 보고 누가 경외감을 가지겠습니까? 그런 영성을 가진 사람 가운데 성령님이 함께 계시겠습니까? 거기서 이적과 표적이 따르겠습니까? 둘 셋이 모이면 기도하고 서로 염려와 아픔을 감싸주고 불신자들에게 사랑과 섬김으로 대할 때 저들은 진품의 고고함 - 아우라(Aura)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Real Christian. 저 교회는 교회에 참석하면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 맛 본 사람은 안다. 아우라를 경험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V. 두 날개로 나는 교회

예루살렘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 교제와 떡을 떼며 기도하는 일에 헌신하기 위해 두 종류의 모임을 가졌습니다. 성도들이 함께 성전에 모이는 대그룹의 모임과 가정에서 모이는 소그룹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셀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두 날개로 나는 교회였습니다. 

특별히 여기 "집에서"라는 말은 "카트 오이콘"이란 말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 "카트"라는 전치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목장 모임을 할때 모든 사람의 집에서 모이기는 불편하고, 어떤 집에는 우리 많은 식구들이 모이기에는 불편하고, 그 집에 여러 가지 형편상 함께 모이기가 어려워서 목자의 집이나 아니면 목원들 가운데 여유있는 공간이 있는 집에서 모였다. 어느 한 집에서 모였다는 얘기가 됩니다. 

또 여기서 집에서 집으로 카트라는 전치사를 쓸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집에서 모이고 내일은 저 집에서 모이고 다음 주일은 저 건너 집에서 모이고, 집을 돌아가며 모였다는 뜻도 됩니다. 아무튼 가정에서 소그룹이 모인 것은 분명합니다. 

교회 목장모임을 위해 가정에서 모이고자 할때 여러 가지 지불해야 할 댓가가 있습니다. 모이는 사람들이 그 모임의 가치를 존중하고 세상일은 짜르고 그 모임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시간의 헌신이 따라야 합니다. 목장 모임을 위해 집을 개방한 가정의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사생활이 위축될 수도 있고 집을 정리하고 뭔가를 준비해야 합니다. 여러 사람이 모이고 철없는 아이들이라도 따라오면 집이 훼손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그런 댓가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구가 깨어지고 그릇이 손상되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우리 가정에 남기는 것이다.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그 헌신이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기쁨이 되었습니다. 

우리 가정 한 복판에서 성경이 읽혀지고 찬송과 경배가 드려지고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기도의 소리가 진동할 수 있다면 그것은 최고의 기쁨이었습니다. 우리 가정 한 가운데 성령이 임재하신다니 이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초대교회 교회의 원형은 분명히 두 날개로 나는 교회였습니다. 지금 많은 교회들과 성도들이 이것을 포기하고 살아가지만 초대교회는 큰 성전에 모이는 교회 모임을 통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 성령의 임재가 얼마나 강력하고 예배의 기쁨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소그룹 모임에서 천국을 경험했습니다.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어지고 너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어지고 서로 사랑하고 돌보는 맛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부득이하여 먼 곳에서 오시는 분들은 여러분들 함께 교우들이 모일 수 없을 때에 가정의 식구들이 가정에서 함께 모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성전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거실 한 복판에 성령의 임재가 나타나길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식탁이 천국의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침실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초대교회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구원받고 있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졌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성장되었습니다. 

언젠가부터 교회들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신약성경의 교회로 돌아가자. 주님의 가슴속에 있던 그 교회로 회복하자. 마지막 때에 성령이 세우는 그 교회로 돌아가자. 몸부림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교회일까요? 사도행전에 있던 교회입니다. 좀 더 집약해서 말하면 오늘 본문 사도행전 2:42-47에 나타나는 그 교회를 오늘 볼 수 있다면 이것은 신앙생활의 최고의 영광이다.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교회들마다 문을 열어보고 수 만명이 모이는 교회이지만 이거 이상한 종교집단이야. 내가 세우길 원했던 교회는 아니야. 그러면 끝장나는 것입니다. 다만 몇 사람이 모여도 예배에 주님께서 찾아오시고 목장 모임에 찾아가시고 그 교회 비전에 찾아가셔서 바로 이거야! 바로 이 맛이야! 내가 이것을 위해서 이 땅에 피흘리고 죽었지. 그렇다면 우린 제대로 산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우리교회 비전, 목장 교회 비전이 완전한 교회는 아닙니다. 가장 바람직한 유일한 교회는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근사한 유사한 교회인 것만은 오늘 본문을 아무리 읽어봐도 옳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루살렘교회의 모습이 우리교회안에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목장안에 넘쳐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이 교회 비전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이 행복이 넘쳐나길 축복합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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