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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하여 불러내었거늘 (호 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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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여 불러내었거늘 (호 11:1~11)


얼마 전에 '리더스다이제스트'에서 한 감동적인 글을 읽었는데, 미국에 살고 있던 솔로몬(Solomon) 한 부부가 루마니아의 어떤 남자아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과정을 기사로 쓴 것이었습니다.
다니엘(Daniel)이라는 이름의 그 아이는 입양되기 전에 루마니아의 어떤 고아원에서 무려 7년 동안 단 한 번도 방 밖을 나가보지 못한 가운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직원의 학대를 받으면서 자랐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부모가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으며, 그가 알고 있던 바깥세상이란 다른 열댓 명의 아이들과 함께 쓰고 있던 고아원의 방에 있던 단 하나의 창문을 통해서 어슴푸레 바라본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다가 입양기관을 통해서 이 솔로몬 부부의 양자가 된 다니엘은 새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가끔 성질을 부리는 등 정서장애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양부모가 그를 위해서 생일파티를 해 주었는데, 그 아이로서는 생전 처음으로 받아보는 생일파티 도중에 누군가가 자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다니엘은 그의 양부모가 7년 동안이나 자기를 버려두었다가 다시 데리러 온 줄로 생각하고서 터질 듯한 분노로 가득 차게 되었던 것입니다.
솔로몬 부부는 그들이 그의 생부모가 아니라고 설명해 주었지만 다니엘은 곧이듣지 않았고, 그 후로는 양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가구를 부수고 벽에 구멍을 내고 애완견의 목을 졸라 죽이려 하고 나중에는 양부모와 함께 다니던 교회에 갔다가 삽을 들고서 다른 아이들을 때리려 해서 급기야 경찰차에 실려 집으로 돌려보내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 후에도 그를 치료하러 온 사람의 배를 깨물어 7센티미터나 찢어지게 하는 등 계속 폭력적인 사고를 저지르다가 나중에 가서는 자기 양어머니의 목에 식칼을 들이대기까지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의 양어머니는 사실 그런 정서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특수교육 교사였는데, 정작 자신의 양아들이 그런 아이가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다니엘의 그런 행동이 학대를 받고 자란 어린이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애착장애 증상'이라고 판단하고서 그를 고치기 위하여 끝없는 애정을 쏟아 주면서 온갖 노력과 치료를 다 동원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다니엘은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자기의 양부모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며 얼마나 많은 것을 해주었는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교회 학생회에서 리더가 되고 자원봉사에도 참여하다가 나중에는 그 교회에서 가장 훌륭한 고등학생에게 주는 상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3백여 명의 교인들 앞에서 수상 소감을 발표하게 된 다니엘은 자신의 양부모가 베풀어준 모든 것을 감사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제일 끝으로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솔로몬 부부가 평생 결코 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말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이제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남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준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되려고 소방관이 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정말 웬만한 양부모였다면 자기를 입양해 준 양부모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아이는 벌써 포기하고 내버렸을 것이지만, 솔로몬 부부는 그야말로 일방적이고도 끝없는 사랑으로써 그런 다니엘을 끝내 자기네의 완전한 아들로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호세아서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그런 다니엘 같은 아이 정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배은하고 반역하고 영적으로 간음하는 행위는 그야말로 완전구제불능의 문제아 그 자체였습니다.
마치 칠전팔기(七顚八起)가 아니라 칠기팔전(七起八顚), 즉 '하나님께서 일곱 번 다시 일으켜 주셔도 여덟 번 또 넘어지는' 것이 이 호세아서 1장에서부터 계속 반복되는 악순환인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구원의 희망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위대한 복음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아무리 보아도 무슨 선을 행할 능력은커녕 의롭게 되려는 자세조차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절망적인 죄인에게 도대체 어떻게 해서 구원이라는 놀라운 기적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부르시는 힘이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는 능력보다 훨씬 크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악을 구별하고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는 능력에 그 미래가 달려 있는 것이라면 정말 모든 것이 절망적일 수밖에 없지만, 지극히 감사하게도 그것이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본문 1절로 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1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2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지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4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말씀은 출애굽 이후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라는 말은, 시기적으로 이스라엘의 초창기부터를 말하는 동시에 또한 현실적으로 이스라엘이 아직 스스로 아무 능력 없는 아이와 같이 약할 때를 가리킵니다.
즉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의 첫 출발점부터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적인 의지와 능력으로만 이루어졌음을 상기시켜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갓난아이와 같은 이스라엘 편에는 스스로의 구원에 대하여 아무 능력이 있을 수 없는 상태였는데, 오직 하나님 편에서 작정하시고 손을 드셔서 그들을 불러내심으로써 출애굽이라는 큰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의 말씀은 "사랑하여"라고 일견 간단하게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아니 유일한 이유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신 이유는 물론 이스라엘 편에서도 조금도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 보아도 여러 말로 설명할 필요조차 없이 간단한 단 한 가지 이유, 즉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의 "사랑"이란 말은, 특별히 '선택의 사랑'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라고 선택하셨을 때 쓰신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내용을 한 번 더 강조하시기 위하여 또 하나의 간단한 단어 "내 아들"이란 말을 이어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은 아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 간단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이보다 더 명백하고도 강렬하게 나타낼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러니 너는 내 아들이다.' - 단도직입적으로 하신 바로 이 두 문장 속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랑의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은 어떠했습니까?
한 마디로 여전했습니다.
2절에 보면 그들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좇는 것과 바알과 다른 우상들에 마음이 끌려 그 앞에 분향하는 이 선택을 앞에 두고 항상 후자를 택하고 있었습니다.
즉 자기 스스로 하나님 편을 택하는 능력이 전무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신 이후에도 계속하여 걸음마를 가르치고 팔로 안아 주기까지 하시는 인도와 보호를 받으면서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기네를 고쳐 주고 계시는 줄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열기가 식거나 약해진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도 하나님 편에서는 도리어 어떻게 하셨습니까?
4절에 보면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의 줄"로 이끄시고 그들의 목에 걸린 "멍에"를 벗겨 주시고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 주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에게는 아직 소망이 있었던 것이었으며, 그러니 우리에게도 역시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과 우상을 나란히 앞에 놓고 그 둘 중에 하나를 마음대로 선택하라고 버려둔 후에 하나님 편에서는 팔짱을 끼시고 물러나셔서 그저 지켜보고만 계셨더라면, 그리고 그 사람의 선택의 여부에 따라 사람의 구원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두말할 여지없이 우리 모두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벌써 끝장이 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저와 여러분들까지 다 포함해서, 그런 선택 앞에서 우상 쪽으로 끌려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어찌할 수 없는 악한 본성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완전 타락'과 '전적 무능력'이라고 불리는, 모든 사람이 공히 소유하고 있는, 그야말로 타고난 근본적인 천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슨 신학적 용어를 사용하고 아담을 인용하고 할 것도 없이, 그저 저와 여러분이 각자의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를 살펴보기만 해도 금세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 돈 사이에서 주인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세상의 명예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한다면, 아니 하나님과 집 한 채 혹은 차 한 대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의 원래 본성이 어디에 더 끌렸겠습니까?
정말 창피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선택이 어느 쪽이 되었을지는 '뻔할 뻔 자'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너무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의 힘은 우리 스스로 하나님 편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보다도 훨씬 크십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의 능력은 전무하며, 오직 존재하는 힘이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끌어 주시는 힘, 그것 하나만 있을 뿐인 것입니다.
바로 그 힘 때문에 죄인이라도 하나님 앞으로 끌려 나아갈 수 있는 것이며, 그 증거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의 존전에 이끌려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스스로 찾는 힘이란 아무 자성(磁性)이 없는 쇳조각에 불과하지만, 전적으로 하나님 편의 사랑이 그런 무능력한 쇳조각을 끌어 당겨 주시는 강력한 자석(磁石)이 되는 까닭에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팔에 안기며 그 분의 손으로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것을 꼭 깨닫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 긍휼로 용서해 주시는 힘이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돌아서는 힘보다 훨씬 크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을 싫어하고 더 멀리 떨어지려는 악한 본성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5절 이하 7절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5저희가 애굽 땅으로 다시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칼이 저희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 하리니 이는 저희의 계책을 인함이니라 7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5절과 6절에 기록된 말씀은 당시의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길에 빠져 들어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애굽의 도움을 구하려 "다시 가지 못할"만큼 절망적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 할" 앗수르 제국의 칼날이 이미 이스라엘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네 스스로의 계책을 따르다가 그 지경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에 있어서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아니 더 지독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정도가 아니라 "싫어하는" 즉 혐오하는 단계에까지 악화일로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간다"라고 한탄하실 정도였습니다.
배반, 배은의 극단이며 그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갈 수 있는 데까지 다 가려 하는 이스라엘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대하셨습니까?
그것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본문 8절과 9절에서 "8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 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이 정말 믿기십니까?
이런 말씀이 바로 5, 6, 7절과 같은 내용 바로 뒤에 따라 나온다는 것이 사실로 믿어지십니까?
지금 아예 작심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지려 할 정도로 하나님을 싫어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가 어찌 너희를 놓겠느냐, 너희를 버리겠느냐"고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 애타하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기하지 않습니까?
만약 이것이 성경 말씀이 아니고 세상의 다른 책에 기록된 것이라면 아마 전후 관계가 도무지 맞지 않는, 문맥이 전혀 이어지지 않는, 그야말로 책 편집이나 제본이 잘못되어서 이어진 내용으로 여겨질 만할 것입니다.
아니 사실에 있어서, 이 본문의 7절에 나오는 것처럼 행하는 사람을 향하여 8절에 나오는 것처럼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에만 기록된 놀라운 사실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신기한 말씀입니다.

그런 극한적인 배반과 증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편에서는 오히려 "나는 너를 아드마나 스보임처럼 버려두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지명은 옛날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 같이 망한 도성들입니다(신29:23).
사실을 따지자면 이스라엘의 지은 죄는 그 아드마나 스보임의 죄에 비하여 조금도 가벼울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의 죄의 경중에 그대로 비례하는 것이라면 이스라엘 역시 소돔과 고모라 신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할 뿐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만큼은 도무지 그러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라는 이 심정 때문이었습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라는 말은 이스라엘 쪽으로 돌아서신 하나님의 마음 상태가 도무지 바꾸어질 수 없는 상태로 완전히 굳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 마음이란 것은 바로 '긍휼로 불붙는 듯한 마음'이었습니다.
그처럼 이스라엘을 향하여 불처럼 타오르는 사랑은 하나님 스스로도 달리 어찌하실 수가 없는 당신의 속성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이런 사랑이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처럼 악하고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긍휼의 사랑으로 불붙는 마음이란, 사람 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하나님 편에서는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참된 하나님에게만 있는 한없는 사랑의 속성이 여실히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저와 여러분에게도 소망이 생기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속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악한 본성,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싫어하는 마음, 아니 하나님과 관계하지 않으려고 아예 작정을 하고서 가능한 대로 멀리 떠나서 살려고 하는 이런 악한 생각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것을 볼 때, 우리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또 한 번 더 용서해 달라는 기도조차 드릴 낯이 없고, 이런 나 자신이 정말 구원 얻을 가망이 있는 것인지 생각할 염치조차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우리 스스로가 계산할 수 있는 모든 가망성이 사라지는 바로 그 시점, 우리 스스로의 판단으로 생각해 볼 여지나 희망을 가져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할 바로 그 시점, 우리가 그야말로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으면 정말 하나님의 진노 외에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고 스스로 절망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시점에, 정말 희한하게도 하나님의 긍휼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아니 바로 그 시점에서 당신의 택하신 자녀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은 더욱 뜨겁게 불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서는 정말 가망 없는 탕자와 같은 저와 여러분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라고 하시면서 더욱 꼭 붙들어 주시고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인 까닭에 결코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고 끝까지 다독거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돌아서는 죄가 더욱 악할수록 진노 대신에 오히려 끝없는 긍휼만을 그 택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성부의 신비한 성품 - 바로 여기에 우리 구원의 모든 소망이 다 달려 있는 것을 꼭 확신하고 또한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개혁주의 신앙의 선구자들은 바로 이 놀라운 복음의 진리를 성경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은 "오직 은혜"라는 표어를 내걸었던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을 능력도 없고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지려는 최악의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는 '선택적 사랑'으로, '무조건적인 긍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니, 이것을 깨닫고 체험한 성도는 그저 '오직 은혜'라고 감격하는 것 외에 달리 할 말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은혜를 깨닫는 순간이 우리가 진짜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본문 10절과 11절에 기록된 내용이 그것입니다.
바로 "10저희가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는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면 자손들이 서편에서부터 떨며 오되 11저희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저희로 각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말씀 그대로인 것입니다.
어미 사자가 새끼를 찾기 위해 부르짖으면 그 소리를 듣지 못할 새끼 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사랑과 긍휼로 당신의 자녀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그 성부의 부르시는 소리를 진짜로 듣게 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소리를 듣게 되면, 마치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제 집을 찾아오는 새 같이, 비둘기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본향인 '아버지의 집'으로 순식간에 달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전적으로 무능력하며 전적으로 타락되었음을 스스로 깨닫는 자만이 이와 같은 주의 은혜의 손과 팔의 힘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종교들이 이런 구원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우상종교는 물론이요 기독교 안에서도 자신의 성찰이나 득도나 선행과 같은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종교인들이 대부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불쌍한 실패자로 끝나고 맙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소위 고승은 죽을 때에 "지옥불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으며, 세계적으로 칭송 받던 수녀 역시 "예수님은 내게 응답해 주지 않으신다."라고 끝까지 불안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지 않았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신구약 성경이 곳곳에서 증거해 주는 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알지 못하고, 순전히 자신의 '완전타락' 속에서 맴돌면서 자신의 '전적무능력'을 가지고서 구원을 얻어 보겠다는 헛수고만 평생토록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에 살고 있을 때 우리나라에 다녀오느라고 두어 주간 집을 비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와 보니 제가 어항에 키우고 있던 물고기들 중에 한 마리가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장 회중전등을 켜 들고 어항 속의 바위 틈 이 구석 저 구석을 모조리 다 뒤져보기 시작했는데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을 헛수고한 뒤에 혹시나 하고 어항 뒤쪽에 있는 필터 박스를 살펴보았더니 웬걸 바로 거기에 빠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당장 그놈을 위한 구조작전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 물고기는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를 구원해 주려는 주인의 손마저 빠져 나가려고 그 좁은 공간 안에서 이리저리 포드닥거리면서 난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그 물고기가 몸부림치면서 도망치려는 힘보다 저의 사랑의 힘이, 보다 구체적으로는 제가 그물을 이용하는 능력이 훨씬 더 강했기 때문에 결국 그 물고기는 거기서 구출되어 원래의 어항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그 물고기는 전적으로 저의 사랑의 힘 때문에 살게 된 것 아니었겠습니까?
주인이 살도록 해 준 그 좋은 어항을 스스로 뛰쳐나가서 그 좁은 공간 속에 빠져 '전적 무능력' 상태로 죽을 수밖에 없던 것을 제가 찾아 나서서 결국 발견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붙잡히지 않으려 하는 것을 제가 억지로 건져내어서 살려 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제가 그 물고기를 사랑한다는 그것이 그 물고기에게는 바로 복이었으며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자를 끝까지 찾으시는 사랑이, 한 번 당신의 양자로 삼으신 자를 끝까지 용서해 주시는 긍휼이 어디 그 정도이겠습니까?
성부의 사랑이 우리의 무능력보다 더욱 강하며 그 긍휼하심이 우리의 타락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사실은 실로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이 큰 복이요 기가 막히도록 놀라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도 이처럼 당신의 택하신 자녀를 '사랑하여 불러 주고' 계시는 음성을 듣고서 이제는 죄의 길에서 돌아서고 이제는 탕자의 삶을 청산하고서 그 하늘 아버지의 넒은 품에 편안히 안기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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