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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하는 자의 축복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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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자의 축복 (눅 17:11~19)

 
어느 날, 두 학생이 주일예배를 빠지고 들판으로 놀러갔습니다. 그리고 들판을 걷다가 미친 듯이 날뛰는 소를 발견했습니다. 곧 그들은 근처 담으로 도망쳤는데, 미친 소도 무섭게 그들을 쫓아왔습니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자 한 녀석이 소리쳤습니다. “야! 기도해! 이제 기도밖에는 길이 없어!” 그러자 다른 녀석이 대답합니다. “못해!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남 앞에서 기도해본 적이 없어.” 

그러자 기도하라고 한 녀석이 다시 소리를 지릅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해! 소가 다가오잖아!” 기도를 못한다는 녀석이 말했습니다. “알았어! 그러면 내가 아는 유일한 기도를 할게. 아빠가 식사할 때는 항상 이렇게 기도했어.” 그러면서 그는 기도했습니다. “오! 주님! 지금 주님이 막 주시려는 것을 감사히 받게 하소서!” 그 엉뚱한 기도를 듣고 기도하라고 한 녀석이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야! 무슨 기도를 하는 거야? 소에 받쳐 죽어도 좋아! 뭘 감사하게 받아! 너나 감사해!” 

바로 그때 소가 다가와서 둘 중에서 기도하고 한 녀석을 들이받았고, 그 일로 몇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그 모습을 하늘에서 보고 베드로가 주님에게 말했습니다. “주님! 저 미친 소도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네요. 저 기도하라고 한 친구는 저와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정말 이름값도 못하네요.” 

사람이 가장 이름값을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바로 불평할 때입니다. 불평이 입에 배인 사람은 누구나 싫어하고, 미친 소도 싫어하고, 하나님도 싫어합니다. 불평은 죄 중의 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어떤 경우에도 불평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10개를 준 사람에게 한 개를 주지 않았다고 불평하면 준 사람이 얼마나 실망이 됩니까? 

어느 날, 공원에서 한 사람이 귀엽다고 어떤 아이에게 귤을 주었습니다. 아이 엄마가 말했습니다. “얘야! 아저씨한테 고맙다고 해야지.” 그때 아이가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고 아저씨에게 귤을 도로 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아저씨! 이 귤 좀 까주세요.” 이 아이의 모습이 바로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감사할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 해달라고 요구만 합니다. 결국 그렇게 요구만 하면 나중에 반드시 버림받습니다. 

진정 복된 존재가 되려면 요구는 줄이고 감사는 늘여야 합니다. 때로 큰 문제가 있어도 감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문제없는 환경은 없고, 문제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고, 구원받은 존재라는 사실만 가지고도 최대한 감사하고, 항상 감사거리를 찾아 감사해야 합니다. 사실상 많은 문제와 갈등은 감사가 없는 삶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최대 조건은 감사의 조건을 찾아 감사하는 것입니다. 

특히 어려울 때 감사해야, 그것이 진짜 감사입니다. 실패했을 때의 한 번의 감사는 성공했을 때의 백 번의 감사보다 낫습니다. 하나의 고상한 실패는 수많은 저속한 성공보다 더 귀합니다. 사람은 성공할 때보다 실패할 때 더 많은 교훈을 얻고, 그때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실패 중에도 하나님의 크고 선하신 뜻이 있음을 믿고 더 하나님께 감사하면 주님은 “네 믿음이 크구나!”고 하시면서 더 축복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레나 마리아는 날 때부터 양손이 없었고, 한쪽 발도 짧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절망하지 않고, 발로 글을 쓰고, 발로 밥을 먹고, 발가락으로 피아노를 치고, 십자수도 놓았습니다. 또한 피나는 노력 끝에 수영과 운전도 하게 되었고, 장애인 올림픽에서 상도 받았습니다. 특히 노래를 얼마나 잘하는지 ‘천상의 목소리’란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그녀는 자기를 장애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다르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항상 천사의 표정을 하고 감사하며 삽니다. 그녀에게도 기분이 저하되고 절망적인 순간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녀는 곧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감사했습니다. 성령이 언제 가장 생생하게 임합니까? 바로 감사할 때입니다. 시련 중에도 감사하며 희망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은 그를 통해 큰 영광을 받으시고, 큰 축복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살면서 시련도 있어야 합니다. 어려움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어려움을 잘 극복하면 훨씬 더 하나님의 자녀답게 됩니다. 언뜻 보면 편하고, 일이 잘 풀리고, 자녀가 잘 되면 잘 믿을 것 같지만 그때는 더 못 믿습니다. 영혼이 망하는 사람을 보면 대개 환난 때문에 망하기보다 잘 되는 것 때문에 망합니다. 일이 잘 된다고 흥청망청 살고, 음란하고 안일하게 사니까 자신 안에서 스스로 망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전혀 없기를 원하면 더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반면에 어려움도 예상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하면 어려움은 더 안 찾아오고, 어려움이 찾아와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잘 먹고, 잘 입고 돈과 권력과 지위와 건강이 있어도 사람됨이 밑바닥이고, 영혼이 병들면 그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평안히 지냈습니까? 다른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외적으로 불안하니까 만리장성을 쌓았고, 내적으로 불안하니까 아방궁을 지었습니다. 건강이 불안하니까 동남동녀 3천 명을 동해 신선도로 보내 불로초를 구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대적은 다 죽였지만 자신도 오래 못 살고 아방궁에서 마흔 아홉 살에 죽습니다. 성공하고 대적이 없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대적도 생기고 힘든 상황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하고, 그래야 바로 살고, 그래야 겸손하게 됩니다. 어려움이 없으면 자기밖에 모르게 되지만,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은 남도 생각해 줍니다. 어떤 재벌 아들이 미국 가서는 편지 안 하더니 군대 가서는 편지를 잘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부모가 “역시 군대 잘 갔다. 군대 대학이 제일 좋은 대학이구나!”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려워봐야 부모와 형제가 보이고 감사를 알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도의 삶이란 어려움이 없는 삶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이 와도 감사하며 이겨내는 삶입니다. 어떻게 감사하며 살 수 있을까요? 본문은 10명의 문둥병자 얘기를 통해서 감사를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감사는 삶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입니다. 

본문 11-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왜 문둥병자 열 명이 멀리 서 있었습니까? 구약 시대에 문둥병은 ‘불결한 병’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문둥병자들은 성막과 성전에 들어올 수 없었고, 가족들과 함께 살 수도 없었고, 성 밖에 살아야 했습니다. 또한 얼굴은 가려져야 했고, 사람이 가까이 오면 “나는 불결합니다.”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그들의 인간관계는 철저히 말살되었고 사회에서 최고의 왕따였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문둥병을 특별한 죄에 대한 징벌로 여기고, 문둥병자를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이고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문둥병자가 되면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가족도 잃었고, 직장도 잃었고, 돈도 잃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상처와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또한 랍비들의 지침에 의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최소한 100보 밖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 지침대로 본문의 문둥병자들도 예수님께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서 “예수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세요!”하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당시에는 제사장이 문둥병이 나았다고 판정해야 가족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문둥병자들은 주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러 떠났습니다. 문둥병자가 병도 낫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면 죽을 수도 있었지만 죽을 각오를 하고 순종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순종이 없는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가는 도중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10명의 문둥병자가 함께 기도했고, 10명이 함께 순종했고, 10명이 함께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0명은 모두 가족들 만날 부푼 꿈을 안고 계속 제사장에게 갔지만 그들 중에 한 명은 예수님께 감사를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제사장에게 가는 발길을 돌려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나머지 9명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들은 제사장으로부터 깨끗해졌다는 선언을 받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와 자녀들을 만나 얼싸안고 키스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만나고, 친구들과 담소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그들이 받은 축복에만 몰입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남은 한 명은 우선순위를 알았습니다. 그도 나머지 9명처럼 당장 집으로 달려가서 가족과 친구를 만나고 싶었겠지만 그는 축복에 싸여서 축복을 주신 분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족과 친구 만나는 일을 뒤로 하고, 가족과 친구를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신 주님을 찾아 감사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가 제사장에게 가라는 말씀에 불순종했다고 꾸짖지 않고 오히려 칭찬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예배와 감사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감사가 없는 순종은 형식적인 것이 되고, 계명의 참된 의미를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와 감사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주일성수에 최선을 다하고, 예배를 드릴 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면서 감사하면 그 사람은 삶의 우선순위를 아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고,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2. 감사는 더 큰 감사거리를 가져다줍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보면 그 감사한 문둥병자는 소리를 높여 긍휼히 여겨달라고 간청했고, 15절에서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소리를 높이는 강도가 같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도와달라고 할 때는 간절히 큰 소리로 하지만 감사할 때는 간절함도 줄고 소리도 작아집니다. 그러나 감사할 때도 도와달라고 할 때처럼 간절히 해야 합니다. 

그처럼 그 문둥병자가 감사했을 때, 주님은 그에게 본문 19절에서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며 구원의 은혜까지 주셨습니다. 사실 이 구원의 은혜에 비하면 치유의 은혜는 오히려 작은 것입니다. 그처럼 감사할 것에 대해 감사하면 반드시 높은 이자와 함께 축복이 돌아옵니다. ‘감사의 문’이 열리면 ‘축복과 행복의 문’도 열리지만 ‘감사의 문’이 닫히면 ‘축복과 행복의 문’도 닫힙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랍비에게 가서 불평했습니다. “선생님! 삶이 너무 힘듭니다. 방 하나에 우리 9명이 살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랍비가 대답했습니다. “염소를 방 안에 들여놓고 일주일 동안 함께 지내게.” 그 사람이 의아해하자 랍비가 주장했습니다. “내가 말한 대로 하고 일주일 후에 오게.” 

일주일 후에 그가 전보다 더욱 정신 나간 상태에서 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도저히 참을 수 없습니다. 염소가 너무 지저분합니다.” 그때 랍비가 말했습니다. “이제 집에 가서 그 염소를 내보내고 일주일 후에 다시 오게.” 일주일 후에 그가 돌아와 빛난 얼굴로 랍비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삶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매 순간이 즐겁습니다. 염소가 없고 우리 9명만 있으니 정말 행복합니다.” 

상황은 처음과 똑같지만 인식이 바뀌어 자신의 축복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처럼 성도는 끊임없이 감사를 발굴하고 죽도록 감사해야 합니다. 죽도록 감사하는 것은 죽도록 헌신하는 것만큼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도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비참하게 보도록 속삭입니다. 그 속삭임에 넘어가 불평하면 진짜 불평거리가 더 생기지만 구원의 은혜를 비롯해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면 진짜 감사거리가 더 생깁니다. 

어떤 분이 암에 걸렸습니다. 몸이 힘드니까 간호하던 사람들에게 다 짜증을 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의 심방예배를 받으면서 그는 범사에 감사하며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죽도록 감사하는 삶을 실천했습니다. 그러자 병원에 오는 사람이 오히려 그분의 감사고백을 통해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처럼 죽도록 감사하니까 암세포가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렸습니다. 감사하면 영혼과 육신의 암까지 치료되고, 더 많은 축복을 받게 됩니다. 

3. 감사는 성품으로 체질화되어야 합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보면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멸시받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 말은 감사는 환경과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감사는 성품입니다. 불평하는 성품을 가지면 범사에 불평하고, 감사하는 성품을 가지면 범사에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감사를 훈련해서 감사를 체질화시키고 감사를 세뇌시켜야 합니다. 

자녀에게도 무엇보다 가르쳐야 할 것은 바로 감사하는 삶입니다. 요새 아이들이 우상이 되었습니다. 아이들 일이라면 쩔쩔 맵니다. 그러면 감사를 모르고 자라기 때문에 힘써 감사를 가르쳐야 합니다. 풍족해도 아이들에게 풍족함을 다 쏟아 붓지 말고, 항상 감사하며 받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녀가 잘 되는 길입니다. 많이 받고도 감사를 모르는 사람보다 적게 받고도 감사를 아는 사람이 더 복된 존재입니다. 

어떤 가정에서 부모가 큰아들을 위해 논과 소를 팔아 유학까지 시켜주었습니다. 결국 큰아들은 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는데 미국에 주저앉아 편지 한 통 없었습니다. 반면에 작은아들은 큰아들 공부시키느라고 고등학교도 졸업 못하고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고생한 노부모를 모시는 사람은 작은아들이었습니다. 누가 복된 존재입니까? 복된 삶은 ‘많이 가진 삶’보다 ‘많이 감사하는 삶’입니다. 

조엘 해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원하는 것을 다 얻었을 때는 더욱 조심하라. 살찐 돼지는 운이 나쁜 돼지다.” 이 세상에서 제일 운이 안 따르는 사람은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어떤 분은 어렵게 사는데도 감사하는 말이 입에 붙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대개 보면 10명 중에 한 명이 감사가 입에 붙은 성도입니다. 이제 감사를 모르는 아홉 명에 속하지 말고 감사할 줄 아는 한 명이 되십시오. 

또한 감사한 일이 있으면 바로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아홉 명의 문둥병자 중에는 제사장에게 보여 완치 판정을 받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 감사하러 오겠다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를 미루면 대개 감사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병들었을 때는 “이 병만 고쳐주시면 제일 잘 믿겠다.”고 결심하지만 막상 병이 낫고 조금 시간이 흐르면 다시 자기 욕망대로 삽니다. 그러므로 감사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께 요구하는 모습은 많지만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은 적습니다. 사실 육체가 무감각해지는 문둥병보다 은혜에 무감각해지는 영적 문둥병이 더 문제입니다. 은혜에 무감각한 인생이 되면 그때는 행복이 끝장나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속에는 성령님이 거하지만 불평하는 마음속에는 마귀가 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사람은 은혜 받을수록 은혜를 잘 모르지만 성도는 은혜 받을수록 더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특히 감사할 때는 말로만 감사하지 말고 시간과 몸과 마음과 물질을 드려서도 감사하십시오. 지금 우리 주변에 우리의 헌신이 필요한 곳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누가 그 필요를 채워줍니까? 하나님은 감사하는 성도들이 하기를 원합니다. 감사하는 성도는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 필요를 채우려고 힘씁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나중에 조금 더 형편이 풀리면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형편이 풀리면 그때는 믿음도 풀어지기 때문에 하기가 더 힘듭니다. 감동이 있을 때 바로 시작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 지금 헌신하는 일에 힘껏 일어서야 합니다. 그처럼 헌신할 줄 아는 사람이 진실로 감사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제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힘써 사십시오. 루터는 말했습니다. “선한 사람은 있는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고, 악인은 없는 것을 생각하고 불평한다.” 이제 항상 ‘있는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자세히 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배우자가 나처럼 못난 사람과 기쁘게 살아 주는 것도 감사한 일이고, 자녀들이 잘 자라 주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때로는 집안에 아이들 떠드는 소리기 많은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어느 날, 한 작가가 가정에서 애들이 시끄럽게 하니까 줄거리가 잘 떠오르지 않고 짜증이 나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조용한 곳에 혼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다가 정말 조용한 곳에 있게 되었습니다. 심한 위장병으로 병원에 입원하니까 조용해서 처음 열흘간은 정말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그 조용한 시간이 금방 싫증이 났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오히려 글 쓰는 촉매제가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삶에서 때로는 시끌벅적한 순간도 필요합니다. 조용한 것이 좋아 보여도 신경성 정신질환은 대개 소리가 없는 환경에서 많이 생깁니다. 지나치게 조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데는 텔레비전 소리, 차 소리, 시장 소리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가정과 교회에 어린아이들 소리가 많은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런 작으면서 소중한 축복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축복의 조건이 많은 사람이 오히려 더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축복에 너무 익숙해진 것이 문제입니다. 만약에 별이 1년에 한번만 보인다면 그때마다 사람들은 별을 보며 밤을 지새울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자주 별을 보기 때문에 별을 감격 가운데 쳐다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처럼 축복에 너무 익숙해지면 감사를 잊고 영혼이 망가지기 때문에 우리는 축복 전에 끊임없이 감사를 훈련해 감사를 체질화시켜야 합니다. 

어느 날, 찰리 브라운이 추구감사절에 스누피의 저녁을 가지고 왔습니다. 사발에 담긴 평상시와 똑같은 개밥을 보고 스누피는 개밥을 한번 힐끗 보더니 불평했습니다. “정말 너무하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지금 추수감사절이라고 칠면조 요리를 먹는데, 내게는 만날 개밥만 주다니.” 그때 찰리 브라운이 스누피에게 말했습니다. “스누피! 너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 네가 칠면조처럼 되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한 줄 알아야 돼.” 

지금 우리 주변에는 우리보다 훨씬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처럼 되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한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감사는 잘 먹고,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삶을 즐기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감사는 선택에 있습니다. 잘 살면서도 불평을 선택하면 감사할 수 없고, 못 살면서도 감사를 선택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어진 현실 속에서 감사의 조건을 발견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일전에 “행복은 선택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처럼 행복도 선택이지만 감사도 선택입니다.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주님이 주신 것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의 뜻과 고민을 가슴에 품고 주님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주님 기뻐하시는 일 중에서도 주님은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진실한 감사입니다. 항상 범사에 감사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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