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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자 (마 16: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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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자  (마 16:21~26)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금년 3월호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맨로파크에 있는 맨로파크 장로교회의 존 오트버그목사님이 쓰신 “숨은 교육과정, 진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라는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수년 전에 어떤 교육학자가 교육과정을 둘로 구별하는 것을 말한 적이 있는데, 결코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교육학자는 모든 교육기관에는 두 가지의 교육과정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정식교육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숨은 교육과정으로 불린다고 했습니다.  정식교육과정은 교사진과 교육위원회와 학부모들이 모여 교육과정에 무엇을 넣어야 할지는 결정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중학생들에게 영어, 수학, 국어를 넣자는 것으로 그것을 정식교육과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숨은 교육가정은 배움과 관련이 있지만, 교육위원회에서 다루지 않습니다.  정식교육과정에서 배운 것들은 기말시험이 끝나면 증발해버리지만, 그러나 숨은 교육과정에서 배운 것은 평생 지속된다고 합니다.  

존 오트버그 목사님은 두 가지의 교육과정을 가지고 교회에 적용시키고 있었습니다.  교회에서도 정식으로 다루는 교육과정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교회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주일마다 예배 시간에 설교하게 됩니다.   성경의 각권을 공부하거나 설교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무엇이며, 찬양이 무엇이며, 헌금의 의의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전도와 선교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교회 간의 연합과 성장, 그런 것을 가르치는 것은 정식교육과정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도 숨은 교육과정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하며, 누구를 무시하고 있는가?   ・교회의 사역자들과 지도자들은 강단에서 벗어나 있을 때 그리고 아무도 보는 이가 없다고 생각될 때 어떻게 지내는가?  ・어떤 사람이 복잡하게 얽히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호소할 때 소그룹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문제가 터졌을 때 지도자들 쩔쩔매거나 화를 내는가, 아니면 자신 있고, 온화한 태도로 대하는가? ・갈등이 있을 때, 사람들은 그것에 대면하여 앞으로 나아가는가, 아니면 회피하는가?  ・교회 직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가?  이런 것들은 숨은 교육과정에 해당하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학교나 교회는 사람을 대하면서 성장과 변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교육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숨은 교육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전인교육이 이루어져야 함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숨은 교육과정에서 배우는 것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 교회도 숨은 교육과정을 중시해야 합니다. 

기독교역사에서 있는 드러나거나 숨겨진 교육과정을 잘 소화하신 교육의 거장은 위대하신 선생님,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 스스로 몸소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축복하시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분노하셨고, 채찍을 드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드리는 두 렙돈이란 적은 헌금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잔칫집에서 상석을 차지하려고 다투는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정식교육과정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숨은 교육과정을 더욱 중요시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기독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를 알고, 상식적인 수준에 오르고, 눈에 보이는 어떤 직분에 충실 하는 것, 어떤 한 조직에 속하여 의무를 감당하는 것도 좋지만, 숨은 인격,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것,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한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남녀노소,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 평생 믿은 사람, 중간에 믿은 사람, 조금은 잘 사는 사람, 좀 힘들게 사는 사람, 공부할 기회가 좀 많았던 사람, 남들이 공부하는 시간에 열심히 일해야 했던 사람, 지금 건강한 사람, 지금 좀 병약한 사람들 모든 사람들이 조금씩 사시는 환경과 형편이 다른 것을 봅니다.    우리들 중에는 교회에 적을 걸어두고 있는 사람, 교회를 습관적으로 다니는 사람, 그래도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 예수를 닮아가려고 힘쓰는 사람, 예수처럼 사는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후한 점수를 주려고 하는데, 가차 없이 후려치고, 정직하게 평가해야 됩니다.  이것은 나 자신이 살고 죽는 일이라고 하면, 조금 후한 평점을 주는 것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될 것이며, 진정한 자아를 알게 하는 것이 무엇이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지금 어디까지 오셨습니까?  지금 서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잘 믿고 있습니까? 

교육계에서는 일전에 학업성취도 평가를 하면서 큰 홍역을 치렀습니다.  그래서 학업진단평가를 연기하면서 고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문제를 놓고 생각할 때에, 왜 일선 교사들이 거짓과 위선에 미혹을 받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가르치는 교육의 현장을 바로 알아야 진단을 내리고, 학업성취를 위하여 계획을 세울 것이 아닙니까?  막연히 잘한다, 잘하는 줄 알지만 어느 정도 잘 하는지, 학습이 부진한 아이들이 많은데, 그러면 실상을 파악하여야 발전될 수 있습니다.  우리 지역이 최하위로 떨어지면 내가 무엇이 되는가?  평가하다보면 당연히 최하위도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단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가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간다면, 어디가 아픈지, 아픈 증상이 어떤지, 여러 질문에 대답할 수 있고, 자기의 아픈 증세를 말해야 고칠 수 있습니다.  진찰도 안하고, 진단 없이 무엇을 처방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사람이 하는 일이니 오진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실상을 잘 파악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요한계시록2:9에 보면 실상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고 했습니다.   이 교회는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환난이요, 궁핍 속에 있지만, 실상은 부요한 자였습니다.  우리는 실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고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어디까지 왔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중에 처음으로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엘리야라는 사람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에 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때에 처음으로 제자들이 당신이 누구라고 하느냐를 물으셨으며, ‘그리스도’라는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처음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처음 제자 안드레가 친형 시몬 베드로를 만나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하였고, 빌립도 친구 나다나엘을 만나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물음에 “주님은 그리스도라”라고 정식으로 말씀드린 것은 베드로가 처음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에게 몇 가지 칭찬과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16:18-19에 보면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다섯 가지의 축복과 약속을 주시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은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천국 열쇠를 준다, 땅에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때로부터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처음으로 말씀하신 수난의 예고였습니다.  



이때에 베드로가 나서면서 주님을 붙들고 항변하는데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든지, 잘 모르면 질문을 하던지 해야지, 예수님이 말씀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의 몸을 붙잡고 항변하면서 “주님 안 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달려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뒤에서 예수님의 몸을 붙잡고 말한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 몸을 돌이키시면서 돌아서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라고 책망했습니다.  “사탄이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은 저주요, 욕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일만 생각하던 사람도 하나님에게 붙잡혀 있지 아니하면, 사람의 일을 추구하고 사람의 생각대로 처신하게 됩니다.  



1.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의 목숨입니다.  (26) 



우리 주님은 이런 심각한 사건이 있은 후에 진지하게 제자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26절에서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사람에게 있어 목숨이라는 것, 생명이란 것은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죽으면 천국 가지만, 살아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성경 전도서9:4에는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이라고 하셨습니다.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합니다.  



이 세상이 앞으로 4만 불, 5만 불 시대를 구가하면서 전쟁을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다고 하여도 그가 살아 있어야 그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죽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의 생명이란 잘 보존하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물론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병에 걸리지 않게 예방하고 건강관리도 잘 해야 합니다.  건강관리도 하나님의 일이요, 목회자에게 있어 건강관리는 목회의 하나로 알아야 합니다.  목사가 아프게 되면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한두 달이지요, 일 년을 넘기고 이년에 들어서도 계속하여 아프고, 강단에 서지 못하면, 좋아하실 교인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목사가 건강한 것도 복된 교회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수명이라는 것이 90세를 넘기기가 매우 힘듭니다.  대부분이 80세에서 90세 사이에 소천하십니다.  우리 모두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나이가 될 것입니다.  우리 노인대학에는 150명 정도의 어르신이 참석하는데, 제가 설교 시간에 물어 보았습니다.  이 중에 90이 넘으신 분 손들어보라니, 우리 교회 최권사님 한 분뿐이 없습니다.  사람이 90을 넘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망구라는 말은 좋은 말입니다. 팔십을 넘기면 망구라고 부릅니다. 구십을 바라보는 나이라는 말입니다.  바랄망, 아홉구 구십세를 살라는 말입니다. 할망구라고 하는 말은 나쁜 말이 아닙니다. 



90세를 넘기셨어도 출입할 수 없어 집안에 칩거하고 소대변 받아내면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건강하신 중에 90을 넘기고 바깥출입이 자유로우신 분이 장수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노인대학에 출석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의 목숨입니다.  우리의 생애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시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찬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2.  가장 소중한 생명을 구원해야 합니다. (25)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생명을 어떻게 유지할 것입니까?   우리 주님은 아주 역설적인 말씀을 주셨습니다. 



25절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목숨이란 영혼, 생명, 단순히 육체적인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 인격의 중심, 그 사람의 자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지나친 애착을 가지고 자신만을 생각하고, 생명을 유지하고 조금이라도 건강을 해치는 일이면 벌벌 떨고 육신의 생명에 집착하면, 그의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생명이 있을 때에,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자기의 육신의 생명을 바치고, 헌신적으로 섬긴다면,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내려놓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음에 넘기면, 그는 종말에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일시적인 생명을 단호하게 버릴 줄 아는 신앙의 용기가 있어야겠습니다.  구원하려고 하면 잃을 것이요, 잃으면 찾는 것은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원리는 세상에서는 맞지 않는데, 다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항상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원리입니다.  



요11:25-26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잃으면 찾고, 찾으려면 잃게 된다는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3.  성숙한 제자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합니다. (24) 



우리교회는 “성숙한 제자로 살아가는 교회”라는 표어를 제창하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습니다.  



1) 성숙한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 스승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며, 스승을 그대로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순종하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그대로 닮아가는 사람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순종하고 행하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영원한 스승이신 주님의 닮아가고 주님의 말씀이 나의 행동강령이 되고, 나의 가치관을 이루고, 그래서 작은 예수로 살아가야 합니다. 



2) 성숙한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일생에 걸친 자기와의 씨름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과제요, 우리는 그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당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를 부인한 사람들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고 위임할 수 있어야 자기를 부인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전 삶을 다 주님께 맡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3) 성숙한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십자가가 없다면 부활도 없습니다.  옛날 사형당하는 죄수는 그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죽이려는 형장으로 가야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다만 상징적인 의미로 남아 있는데, 엄숙한 제자로서의 결단이어야 합니다.  적은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목걸이 십자가, 배지십자가 정도로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깨가 걸리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견딜 수 없어, 넘어지는 그런 십자가만이 십자가입니다.  어느 날 하루 잘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고 좇아가는 것은 하루만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 제자라는 말을 하니, 제자훈련학교를 나온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지 마십시오.  예수 믿는 이들은 누구나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당하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라는 말씀을 종종 드리고 있습니다. 완전무결하게 주님을 따르고 닮았다고 할 사람은 없지만, 항상 부족함을 느끼면서 오늘도 주님을 바라보면서 따라가야겠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동안 우리 주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주님과 동행하여야 고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서 나의 물질도 시간도, 내 자존심도, 나의 인내를 희생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었어도 목숨을 다해 섬기지 않았다고 하면 사실 섬기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사랑이 진정 사랑이 되려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내려놓는 헌신이 주님을 따르는 성숙한 제자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간섭하시는 은총이 함께 하시고, 주님이 받으신 고난에 참여하시고 부활의 아침을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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