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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는 사람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어야 한다 (행 6: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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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사람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어야 한다 (행 6:8~15)


요즘 저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얼굴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얼굴이 야위었습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얼굴에 뭐가 많이 났군요! 흰머리가 많아졌습니다.” 하는 말을 합니다. 제 아내가 더 신경에 쓰이는지 요즘 세수하고 나면, 싫다고 해도 아내가 무언가를 자꾸 발라줍니다. “이 화장품 발라보세요. 이것 좀 발라 보세요.” 솔직히 귀찮기도 하고 부담도 됩니다. ‘왜 얼굴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거야!’ 주님 일하다가 얼굴이 상하고 주님 앞에 가는 것이 낫지, 얼굴 뽀얀 얼굴로 가는 것보다. 그렇게 생각이 들어서 얼굴에 신경을 너무 쓰는 것은 오히려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회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 목사, 너 얼굴에 신경 좀 써라!’ 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의 명령은 피부나 흰머리나 주름에 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듯이 너도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집사의 얼굴, 성경으로만 읽었지만 묵상할수록 정말 놀라운 얼굴입니다. 생각지 못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전에는 별로 스데반 집사의 얼굴이 천사같았다는 말씀에 대해서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 엄청난 메시지가 그 말씀 속에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믿는 자를 향한 우리 주님의 계획은 우리 얼굴입니다. 우리 얼굴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주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걱정거리가 없고 잘 먹고 잘 쉬면 얼굴이 훤해집니다. 
그러나 스데반집사의 얼굴은 그래서 훤해진 얼굴이 아닙니다. 
스데반집사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는 것이 도무지 그럴 수가 없는 형편에서 그가 천사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지금 극심한 논쟁 중이었다는데 있습니다.
(9절)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여러분, 어떤 사람과 논쟁 중에 얼굴이 천사같을 수 있습니까? 게다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거짓 증언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11절)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 
이렇게 거짓 증언을 하는 의도는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천사의 얼굴과 같을 수 있습니까? 
(15절)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지난 주간 극동방송 운영위원과 직원 예배 후 식사를 하였는데 TV 방송에 나오는 얼굴 때문에 설교를 들으셨다는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솔직히 그 동안 저는 얼굴 덕을 보았다고 해야 옳겠습니다. 제 얼굴이 선해보이는 모양입니다. 교회 이름을 제 얼굴에 갖다 비교하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사람은 외모로 판단하면 안된다는 것을 저는 그때마다 절실히 느낍니다.
그러나 진정한 내면의 얼굴은 선하지만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저도 솔직히 한 성질하는 사람입니다. 가까이 있는 분들은 다 압니다. 저희 딸은 항상 마음이 아픕니다.
딸이 어릴 때 화가 나서 매를 들었던 때 제 얼굴로 인하여 딸이 6년 동안 속으로 앓았던 것을 중학교 1학년 때 얘기를 해서 알았습니다. 
저에 대한 근거없는 악한 말을 들을 때, 속으로 다스리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제 안에 저도 깜짝 놀랄 만큼 혈기와 분노가 있음을 봅니다.  
저도 싸울 때는 한 성질 합니다. 
천사의 얼굴은 결코 타고난 얼굴이 아닌 것입니다.

천사의 얼굴은 어떤 얼굴입니까? 성경에는 문자만 나오니까 스데반 집사의 얼굴의 표정이 어땠길래 천사의 얼굴 같았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잘 생긴 얼굴일까요? 아닙니다. 미인들이 많지만 그렇다고 '천사의 얼굴'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천사같다는 표현을 어떤 때 사용합니까?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을 비유하여 말합니다.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가 어떤 얼굴이었을까? 자기를 모함하고 거짓 증언하고 죽이려고 하는 살벌한 분위기에서 얼굴에 두려운 기색도 나타나지 않고 사람을 원망하는 기색도 나타나지도 않고 분노나 혈기가 얼굴에 나타나지도 않고, 당연히 그럴만한데, 그들을 향해 오히려 긍휼의 표정, 사랑의 표정이 얼굴에 나왔다는 뜻입니다. 
스데반집사는 결국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기도할 때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천사같은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사실 “예수님같은 얼굴이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스데반이 하였던 그 말을 하셨습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러므로 우리는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는 순간에 그 얼굴 표정이 천사의 얼굴같았다, 지금 자기를 죽이려고 돌 던지는 이들을 향하여 오히려 사랑하고 용서하는 얼굴이었다는 것은 그가 예수님으로 마음이 충만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는 자들조차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얼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꾸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 자기 얼굴 표정관리를 누가 할 수 있습니까? 그냥 속에 있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의 얼굴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까?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인지는 얼굴에 드러납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살 때 얼굴에서 분노가 사라집니다.


에이브라함링컨은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얼굴이야 자기가 선택을 합니까? 태어나 보니까 그렇게 생긴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들은 세월이 지날수록 자신의 얼굴에 나타난다고 믿었던 겁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할만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에이브라함링컨이 국회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그 때 상대편 당의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그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당신은 두 얼굴을 가진 위선자요!" 라고 소리쳤습니다. 이것은 미국 사회에서 굉장한 욕입니다. 어떻게 감히 연설을 하고 있는데 두 얼굴을 가진 위선자라고 합니까? 그러나 그 때 링컨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굉장히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여보시오! 내가 만약 얼굴이 두 개라면 왜 하필 이 중요한 자리에 이 얼굴을 가지고 나왔겠소!" 그의 이 말로 온 국회에 폭소가 터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꾸며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링컨 대통령은 미남이 아닙니다. 그래서 턱수염을 길렀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고 또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많이 당한다고 누구나 천사의 얼굴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림이 악마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 그도 큰 고난을 겪은 사람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 얼굴 표정도 바꿉니다. 그렇지만 다 천사의 얼굴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천사의 얼굴처럼도 변화시키지만 악마의 얼굴처럼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고난은 분명히 변화를 주지만 어떤 변화를 가져오느냐는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극심한 가난을 겪고 수전노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극심한 가난을 겪고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자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혹독한 상사를 경험하고 따뜻한 상관이 되나, 어떤 사람은 더 혹독한 상관이 되기도 합니다. 고난을 겪을수록 얼굴이 아름다워지는 사람도 있고, 고난을 겪을수록 추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난에 열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고난이 아니라 자아가 죽었느냐 안 죽었느냐 입니다. 자아가 죽지 않은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얼굴이 더 망가집니다. 그러나 자아가 죽은 사람은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상처 입을 자아가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고난이 천사의 얼굴을 만듭니다. 

지난 주간에 목사님의 아들인 어느 대학생이 자신은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자신이 없어서 하나님 뜻대로 살 결단을 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라. 기뻐하고 감사하라. 순결하고 거룩하라.” 이러한 명령이 어려운 일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미워하고 불평하고 두려워하고 염려하며 방탕하게 사는 것이 어려운 길입니다. 
한 여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나이 70이건만 일생 동안 이루어 놓은 게 하나도 없군요.” 한 평생 애쓰고 살았으면서도,[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이 살았다는 느낌이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인생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산 것입니까?
사랑하라, 거룩하라,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축복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축복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자아가 죽지 않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니까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내 자아가 죽고 예수님이 내 생명이심이 분명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렵게 느껴질 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복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스데반 집사가 왜 등장하였습니까? 
교회 안에 분쟁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여자인 과부들 사이의 분쟁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자들은 천사같다가도 한번 분쟁이 생기면 정말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돈 문제까지 걸린 일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정말 풀기 어려운 문제가 됩니다. 누가 해도 오해 받기 쉽고 양쪽에서 불평 듣기 쉬운 일입니다. 수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았을 일입니다. 교회는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스데반을 택한 것입니다.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을 듣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3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스데반이 평소에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 이것이 스데반의 인격을 설명할 때 늘 따라나오는 단어입니다. 스데반이 얼마나 성령충만했느냐 하면 논쟁 중에도 혈기나 분노로 말하지 않고, 성령의 지시대로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0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여러분, 어떤 사람과 논쟁을 할 때 자기 성질이 나오고 혈기가 나오고 자기 주장이 나오고 자기 고집이 나옵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한다는 것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는 그랬단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에서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도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사방에 원수들이 둘러싸고 있어도 천사의 얼굴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만 분명하면 됩니다. 이미 이 복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다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얼굴에 신경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14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의 빛이라! 이 말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빛을 느끼게 하라!는 말입니다. ‘아, 저 사람은 마음에 놀라운 기쁨이 있구나! 참된 기쁨을 가지고 있구나!’  
이것은 얼굴 피부관리를 잘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 되라. 참 생명을 소유한 자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한번 스스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샘솟듯 기쁨이 있습니까? 말할 수 없는 평안, 뜨거운 사랑이 있습니까?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자아의 죽음을 아직도 믿음으로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그 진리를 믿고 그 복음을 붙잡으면 예수님의 생명이 역사하는 경험을 반드시 마음 중심에서 하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그것이 뜨겁게 일어나면 얼굴이 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행복한 부부 관계는 영혼의 나이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다 겉으로는 어른이라도 영적으로는 어린 아이일 수 있습니다. 
부부가 둘 다 성인이라면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천국에서 삽니다. 
남편이 영적으로 성인이고 아내가 영적으로 어린아이일 때 아내가 칭얼거리면 남편은 그녀를 업어주고 달랩니다. 그들 부부는 별 문제없이 잘 삽니다. 그러나 남편은 영적으로 고독하게 삽니다. 
반대로 남편이 영적으로 어린아이이고 아내가 영적으로 성인일 때 그녀는 남편이 투정할 때마다 안아주고 해달라는 대로 다 해 줍니다. 그들 부부도 별 문제없이 살지만 아내는 마음 속이 허전합니다.  
영적으로 어린 사람은 상대가 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상대로부터 떨어지기를 싫어하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어린 사람은 사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그가 진정 사랑하는 것은 오직 자신 뿐입니다.  
심각한 것은 부부가 둘이 4살, 7살 수준이면 항상 싸우거나 헤어집니다. 
부부생활은 대화를 많이 한다고 친밀해지며 모든 오해가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어린 아이같은 사람은 대화할수록 싸움이 생겨서 안하는 게 낫습니다. 어린이들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며 오직 자기 주장과 자기 변호를 할 뿐입니다. 어린 아이와는 깊은 대화를 할 수 없으며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주어야 합니다. 
행복한 부부 생활을 위해서는 부부가 서로 영적으로 어른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행복한 부모, 자녀 관계도 영혼의 나이에 달려있습니다. 부모의 영혼 나이가 20세 이상의 성인이라면 그 부모는 자녀를 양육할 수 있으며 둘 다 행복합니다. 
부모와 자녀, 둘 다가 어리면 비극입니다. 그들은 평생 싸우며 원수 관계로 삽니다. 그런 가정 많이 봅니다. 
부모가 어리고 자녀가 성숙해 있다면 별 분쟁은 생기지 않지만 자녀는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영혼이 어린 사람이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된다는 것은 실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나 많은 젊은이들이 안타깝게도 겁도 없이 상대의 멋진 외모, 재산, 학벌 등에 눈이 가려져서 어린 아이를 배우자로 선택합니다. 그들이 상대를 바로보지 못하는 것은 자신도 어리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서 겪는 가정의 어려움을 상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영적으로 어른이 될 수 있습니까? 
무엇을 더 배우고 훈련받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이 그것을 해결해 줍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을 믿을 때 이루어집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살 때 비로서 어른이 됩니다. 자아는 아무리 훈련시켜도 결국은 자기 중심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옛 사람 내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고 처리되어야 하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가 될 때 비로서 그는 영적으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매사가 짜증스럽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나는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어.” “스트레스 때문에 죽을 것 같아.”그런 분 계십니까?
저도 한 동안 ‘빨리 은퇴하고 좀 쉬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책망을 받았습니다. 모든 일을 빨리 하고서 좀 쉬었으면 하였습니다. 그것도 어리석은 생각임을 알았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스트레스가 되는 일들이 없어질 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죽고 예수님으로 살 때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환경이나 사람도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 늙어갈수록 더욱 유쾌해집니다. 
저는 거듭났던 1984년 4월 28살 때에도 행복했었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 완전히 나 자신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십세 살인 지금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더 실제적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예수님에 대해서 눈이 열린 것이고, 지금은 예수님과 친밀함 속에 더 들어왔기 때문에 지금이 더 행복합니다. ‘아, 일이 없어야 편안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구나. 예수님과의 관계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거구나.’ 

지금 하는 일을 빨리 마치고 그 다음에 편안하게 놀려고 하지 마십시오. 일을 다 마쳐도 당신은 놀 수 없으며 평생토록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도 빨리 해치우고, 밥도 빨리 먹어치우고, 어차피 할 일이라면 결혼도 빨리 해치우고, 아이도 빨리 낳고, 열심히 돈을 벌고 아이들 키우고 빨리 독립시키고 드디어 당신은 자유로와졌다고 합시다. 모든 의무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자, 이제 무엇이 남았습니까? 이제 해방된 후에 얼마나 행복합니까? 근심과 짐이 다 사라진 지금 과연 기쁨의 삶이 시작되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빨리 해치우지 마십시오. 순간 순간 지금 당신이 삶을 즐길 수 없다면 모든 일을 마친 후에도 당신은 결코 즐길 수 없습니다. 휴가가서 은퇴하고 난 다음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일 속에서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살면 그렇게 됩니다. 


지난 목회자 기도 모임에서 스탠리죤스 선교사님의 [순례자의 노래]라는 책에 대하여 나누었는데,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스탠리죤스 선교사님이 6개월간 전도 여행을 떠날 때, 매리 웹스터라는 자매가 쪽지 한 장을 주더랍니다. 펴보니 “예수님과 함께 재미있게 노세요.”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전도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하는 말로는 너무 경박한 말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녀의 말이 진리임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누리고 있는 것을 정확히 꼬집은 것이다. 나는 재미를 누리고 있다. 예수와 함께하는 재미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도전을 받고 각자 임지로 떠나기 위하여 헤어질 때 이렇게 인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재미있게 놀다 오세요.” 목회 임지가 다 어려운 분들입니다. 그런데 진리 안에서 보니 그 어렵다는 모든 일들이 예수님과 함께 재미있게 놀다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옆에 있는 분들에게 그렇게 인사해 보실까요? “예수님과 함께 재미있게 놀다 오세요.” 짜증나는 분도 계시지요? “지금 집에 가면 일이 얼마나 많은데, 직장에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은데 재미있게 놀다가 오라니?” 그러나 여기에 주님이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 아닌 경우에는 가정 일 직장 일이 다 스트레스입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살게 되는 사람에게는 재미있게 놀다가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즐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복입니다. 그때 내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얼굴을 천사의 얼굴로 바꾸는 기가 막힌 화장품을 주셨습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입니다. 

우리는 어떤 형편과 만남 속에서도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자에게는 모든 곳. 모든 순간이 천국이며 삶의 기쁨과 감동을 경험하는 공간입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로 천사의 얼굴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 오늘 말씀을 붙잡습니다. 얼굴이 평안과 기쁨과 사랑의 얼굴로 바꾸어지게 해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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