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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쓰시는 지도자 (사 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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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쓰시는 지도자 (사 42:1~4) 


하나님은 지도자를 찾고 계신다.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지도자를 찾고 계신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사람을 지도자로 오해한다. 그러나 이는 지배자일 뿐이다. 지배자는 다른 사람들과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지배자가 있다. 

지배자가 되면, 자기의 영광이 나타나기에, 사람들이 부러워한다. 그러나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름 받았기에, 자신을 희생하며 살게 된다. 지도자는 사람의 가슴을 움직이고, 영혼을 살리는 사람이다. 

지도자는 다른 사람들을 살리려고,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기에, 다른 사람들과 싸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지배자는 자기 영광을 추구하고, 오직 성공을 향해 매진하기에, 다른 사람과 싸워 이겨야 한다. 지배자는 살아서 역사를 지배하지만, 지도자는 죽어서, 역사를 움직이기에, 이 땅에서 고통이 있다. 

예수님은 지도자로 오셨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강력한 힘으로 로마를 물리치시고, 정치적 메시아, 지배자가 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죽음을 통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지도자의 길을 가셨다. 제자들은 고난 받는 메시아, 영원한 왕자에 오르실 메시아에 대해 알지 못했기에, 영광의 자리를 탐냈다. 이 시대와 이 민족은 올바른 지도자를 원한다. 

우리는 올바른 지도자만 원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 세상을 건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쓰시는 지도자는 어떤 사람인가? 

1.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사람이어야 한다(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마4:17). 우리도 주님께 “내가 너를 사랑하고 기뻐한다.”는 음성을 들을 때,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사람과,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붙들고 사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하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정의를 베푸는 사람이 된다. 그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인생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은, 신념의 사람들이다.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말은, ‘나는 하나님 없이도 산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말이다. 신념의 사람은 실패하지 않고, 승승장구하는 것 같지만,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목이 꺾여버린다. 

골리앗을 보면, 골리앗이 돌멩이를 맞고 죽을 가능성은, 0.01%의 확률도 안 된다. 그런데 돌멩이가 어디에 맞았는가? 투구가 다 가리지 못하는, 앞이마에 맞고 그냥 죽었다. 반면 풀무 불에 들어갔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사자 굴에 들어갔던 다니엘은, 죽을 확률이 100%이었지만 살아났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차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성공할 가능성이 0.01%라도 끝내는 승리한다. ‘기적’이 따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사람은, 실패할 가능성이 없는데도 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떠나니까, 망하게 된다. 

사울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었을 때에는, 이스라엘의 구원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을 떠나니까, 미치광이, 살인마, 바보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손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능력 있게 쓰임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되면, 실패자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자가 되라. 이처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한마디로 얘기하면, 하나님 손에 붙들린 사람이다. 다윗과 같이 별 볼일 없던 사람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놀라운 사람으로 쓰임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신념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붙들린 자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두려워할 줄 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범죄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령에 충만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다. 

배의 길이가 268m가 넘은 타이타닉호가 왜 침몰했는지 아시나요? 그 동안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침몰사고의 이유는, 영화처럼 타이타닉호가 빙산에 부딪혀, 배 옆에 큰 구멍이 생겨, 침몰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이루어진 국제적 조사팀이, 음파조사를 통해 진흙 속에 묻혀 있는, 유람선을 탐사한 결과, 배의 파손 부분은 예상외로 작았다. 배 옆은 큰 구멍이 뚫리지 않고, 작은 틈새들이(불량 리벳) 6개나 있었다. 이 작은 틈새가, 거대한 유람선을 침몰시켰다고 한다. 

우리가 망하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조그만 죄 때문에 망한다. 보이지 않는 죄를 가볍게 여기기에 망한다. 개인도 무너지고, 가정도 파괴되고, 사회 나라도 망하게 된다.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망한 이유는, 온 도시에 퍼진 죄악 때문이었다. 

노아 시대가 홍수로 망했던 이유는, 죄악 때문에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했다. 로마가 망한 이유도, 죄악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조그만 죄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 이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성령 충만하면, 세상에 나가서도 죄에 물들지 않고, 죄 된 세상을 다 뒤집어엎을 수 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세상의 물이 들어와 곧 무너지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을 받아, 정욕과 세상을 이기고, 마귀와 죄악을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아, 하나님께 쓰임 받는 종들이 되시기 바란다. 

2. 하나님은 겸손히 섬기는 사람을 지도자로 쓰신다(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자기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겸손한 자를 하나님은 쓰신다. 하나님의 사역은 큰소리치는 사역이 아니다. 

목소리 높이는 사역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기를 죽이는 사역이다. 주님은 성도들을 세상의 소금이라 했다. 소금은 스스로가 녹아 없어질 때, 존재가치가 드러난다. 소금이 녹지 않으면, 배추는 생 배추가 되어, 맛도 없고 오히려 공해가 된다. 녹아야 맛을 내고, 녹아야 기쁨을 줄 수 있다. 

녹지 않으면, 맛을 낼 수가 없다. 마6장을 보면, 참된 구제, 참된 기도, 참된 금식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무엇이 ‘참됨’을 만드나? ‘감춤이다. 은밀함’이다. 우리는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자, 교만한 자를 싫어하시고, 겸손한 자를 좋아하신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고 하였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5:5)고 하였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며,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 편에 있는 사람이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사람이며,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다. 교만한 사람은 망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대적하고도 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교만한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저도 교만한 사람은 싫고, 겸손한 사람이 좋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의 장래는, 불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의 장래는, 하나님께서 밀어주시기에, 형통이 보장된 사람이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교만은 무엇인가? 

좋은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고, 자기에게 영광 돌릴 때이다(신8:14). 복의 원인을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찾으며, 자신을 과대평가할 때 교만이라 한다(신8:17). 그러면 겸손은 무엇인가? 모든 일이 잘되고 형통할 때, 하나님을 기억함이 겸손이다(신8:18). 

모든 일이 다 잘되고 형통할 때, 나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 때문이라고 말함이 겸손이다. 바리새인이 왜 예수님께 꾸중을 들었는가? 구제 안하고, 기도 안하고, 금식를 안 해서, 꾸중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드러내놓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했고, 드러내놓고 헌금을 했다. 

율법대로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이었지만, 문제는, 그 속에 교만함이 있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고, 자신에게 영광을 돌렸기에 꾸중을 들었다. 반면 세리는 불한당이다. 남의 등쳐먹으며, 겨레와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 겸손함을 보시고 품어주셨다. 사람들은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함을, 그의 가장 큰 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의 시각을 통해 보면, 사무엘하 3장에 나오는 인구조사가 다윗의 더 큰 죄였다. 그가 교만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능력을 과시했다. 

그 결과, 교만의 대가로 7만 명이 죽었다. 모세의 가장 큰 죄는, 살인이 아니다. 지팡이로 반석을 2번 내리치면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리라”는, 자기가 물을 주는 것처럼, 자기를 과시한 사건이다(민20:10-12).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교만한 사람이다. 

교만하면 우리도 꺾어버리고 싶다. 세상에서 원수가 있어도 살아나기 힘든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원수 취급하는 사람이, 어떻게 무사히 살기 바라는가? 반면 겸손하면 하나님께서, 한량없이 은혜를 부어주신다. 최고의 은혜는 겸손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왜 어려움이 있나? 사도 바울에게 왜 가시를 주셨는가? 그 육체에 가시를 주신 이유는, 교만하지 말라고 주셨다(고후12:7). 그러므로 가시도 은혜다. 왜냐하면 교만하지 않게 만드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겸손하지 않으면, 폭군이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주의 나라가 임할 때에 야고보와 요한이 좌우편에 앉기를 원한다고 했다. 여기에 다른 제자들이 분을 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곁에 부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10:42-45)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지배자는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나를 따르라 한다. 그러나 지도자는 자신을 죽이고, 많은 사람을 살리며, 나를 따르라고 한다. 겸손히 섬기는 지도자가 되자. 

3. 사랑을 베푸는 자를 쓰신다(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연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를 쓰신다. 

타락한 인간은, 상한 갈대는 보면, 꺾어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 꺼져 가는 등불을 보면, ‘훅’ 불어서 꺼버리고 싶은, 부패한 마음이 있다. 어떤 사람은 내 맘에 들지 않을 수 있다. 말하는 태도와 모습, 또한 행동들…, 완전히 제 멋대로 하는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는 지도자는, 상한 갈대라고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부둥켜 않고 기도해서 살려내는 사람이다. 그 이유는 (롬5:5)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말씀하였다. 

바울은 성령 충만을 받은 다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슴속에 차고 넘쳤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으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다. 주님의 사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주었다. 사람들이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알아주지 않고, 인기도 없는 사람들에게, 성도는 가까이 가서,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품어주는 마음이, 주님의 마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과 병자의 친구가 되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어지면, 사람들이 저 사람은 안 된다고 말할 때, 소망이 있다고 말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울면서, 기도해 주는 사람이다. 

베드로는 꺼져 가는 등불이었다. 예수님의 수제자이지만, 어린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면서 떠났던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꺾지 않으시고, 끄지 않으시고 품으셨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후의, 베드로의 모습은 꺼져가는 등불이 아니라,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베드로의 한번 설교에, 3,000명씩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났다(행2:41).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랐는데, …괴로움을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행5:15-16).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잔인하게 헤치는 사람보다, 사랑으로 감싸 안는 사람을 원한다. 사랑으로 감싸 안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죽어 가는 영혼들 붙들고, 많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영혼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께 눈물로 부르짖는다. 

하나님은 그 눈물의 간구를, 생명으로 바꿔주신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쓰신다. 우리의 가정에 믿지 아니하는 부모, 형제, 자식들을 위해, 울면서 기도해 본 적이 있나? 주님의 사랑이 우리 심령에 충만하면, 믿지 않는 이들을 볼 때 불쌍한 마음이 들어, 눈물 뿌려가며 기도하게 된다. 

자식들이 학교에 가지 아니하면 야단을 친다. 그러나 자녀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데도, 괜찮다면 정말 큰 문제다. 우리 가족이 구원받지 못했는데도, 아무렇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쓰시기 원하는 지도자는, 꺼져 가는 영혼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내 맘에 들지 않을 수 있다. 말하는 태도와 모습, 또한 행동…, 완전히 제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음 바 되면, 그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부둥켜 않고 기도해서 살려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기 바란다. 성경적 지도자는 많이 울고, 울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영적 지도자는 울리기 위해 세운 사람이다. 이런 지도자는 위대한 지도자다. 

인류 역사상 예수님보다 눈물을 많이 흘리게 만든 사람은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한 번도 눈물을 흘려보지 못했다면, 깊이 회개해야만 한다. 지도자는 골방의 눈물이 있다. 지도자는 남몰래 눈물을 흘려야 한다. 이 눈물로 영적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다. 

눈물이 없다면, 위선자가 될 수 있다. 영적으로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선지자 노릇을 하여도, 이 눈물이 없다면,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외면당할 수 있다. 많은 지도자들이 이 눈물이 없어 타락했다. 천사의 방언은 했으나, 심장은 굳어져, 비참한 삯꾼이 되어버렸다. 

4.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쓰신다(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옳은 뜻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쓰신다. 

마귀가 하는 일은, 절망케 하는 일이다. 절망은 뱀의 독과 같아서, 우리의 모두 것을 점진적으로 마비시킨다. 영혼, 정신, 육체까지 차례로 마비시킨다. 그래서 절망은 죽음의 종착역이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말한 사람이, 모세, 엘리야, 요나 3사람이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다 큰 승리를 맛보았던 사람들이다. 마귀가 바로 이렇게 집요하다. 절망은, 성공과 패배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일을 하다보면, 수많은 좌절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낙심하고, 도피하고 싶어지고, 분쟁에 휘말릴 위험에 처하곤 한다. 

그러나 믿음이 있어서,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낙심하지 않는다. 믿음은 열악한 환경을 깨뜨리는 힘이 있기에, 기도하면서 파수꾼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마귀는 언제나,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인내하는 믿음이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에 들어가도, 그 인격이 파탄 나지 않았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실컷 얻어맞고 감옥에 갇혔어도, 기도와 찬양을 그치지 않았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옥문이 열리게 되었다. 우리 가운데, 불우한 환경으로 삶이 힘든 사람들이 있다. 갑자기 부모님이 다 돌아가셔서, 고아처럼 된 사람도 있다. 

너무 가난하고, 태어날 때부터 신체적 결함 때문에, 눈물을 삼켜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불우한 환경 때문에, 인생을 포기한다면 정말 잘못된 생각이다. 지도자는 승리한 사람이요, 지배자는 성공한 사람이다.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시련은 없다. 시련의 자리에서 버티면, 영광의 자리로 바뀌게 된다. 

요셉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꺾이지 않는 믿음 때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환경이 나를 지배할 수 없다.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반대로 환경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그 사람은 필시 썩는다. 영적으로 우리를 썩지 않게 만드는, 영적방부제는 믿음이다. 

우리 안에 믿음만 있으면, 아무리 주변 환경이 어렵다고 할지라도, 버틸 수 있다. 성도는 소망의 전파자가 되어야 한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포기하는 자가 아니라, 소망의 전파자가 되자. 안타까운 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무슨 슬럼프가 그렇게 많은가? 일 좀 하려고하면 시험 들었다고 한다. 

밤낮 시험에만 들고, 언제 하나님의 일을 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은 지 10년, 20년이 넘도록 자기 사명이 무엇인지 몰라서, 사명을 찾겠다고 헤매고 있다. 밤낮 탐색만 하다가, 진짜 주의 일은 언제 할 것인가? 이제는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자. 

결론이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지도자는, 
(1) 하나님께 붙들린 성령 충만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2) 겸손한 지도자, (3) 사랑을 베푸는 자, (4) 포기하지 않고, 맡겨진 일을 완수하는 지도자다. 

이런 지도자는 바로 예수님이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형상을 많이 닮은 사람이 되어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이끌어 가는 지도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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