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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부르시는 예수님 (막 1: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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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부르시는 예수님 (막 1:14~20)


우리말에 소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를 소(召)자와 목숨 명(命)자가 합쳐진 말인데, 이 말은 ‘신하를 부르는 임금의 명령’을 의미합니다. 특히 목숨 ‘命’자의 구성을 보면 입 구(口)자와 영 령(令)자가 합해져 있습니다. ‘임금이 입으로 내리는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예전엔 임금이 백성들의 생명을 좌우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명(命)’자를 ‘목숨 命’자로 쓰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시듯이 우리말 ‘소명’에는 왕과 백성의 수직관계에서 ‘왕이 신하를 부른다’는 뜻은 강하게 드러나지만, 이 말에 종교적인 의미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가 뿌리 내린 서양에서 ‘소명’이라는 말은 아예 처음부터 종교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소명을 영어로 calling이라고 합니다. calling은 하나님께 큰 영향을 받았거나, 하나님에 의해서 내적인 강한 충동이나, 내적인 확실한 증거를 받았을 때를 두고 쓰이는 말입니다. 

또 소명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의미로 쓰이는 ‘사명’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使命은 부름을 받은 사람에게 맡겨진 임무, 책임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예부터 이 말을 많이 써왔습니다. 옛날 관청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사람을 小使라고 했습니다. 나라의 큰 심부름꾼을 大使라고 했습니다. 몰래 보냄을 받은 심부름꾼을 密使라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읽어야 할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人間을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입니다. 성경을 한 번 눈여겨보십시오. 역사의 고비마다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습니까?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십시다. 하나님은 어린 아이 사무엘을 예언자로 부르셨습니다(삼상3장). 하루는 밤에 사무엘이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 있었습니다(사무엘은 젖 뗀 후, 하나님께 받쳐진 평생 나실인).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나님께서 3번씩이나 부르셨지만, 사무엘은 너무 어려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시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때마다 어린 사무엘은 자기가 성전에서 모시고 있던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가서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합니다. 그제야 엘리 제사장은 여호와께서 어린 사무엘을 부르시는 줄 알고는 일러 주지요.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하라 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사무엘과 같은 어린 아이를 부르시기도 합니다. 부르셔서, “제사장 엘리의 집을 벌하시겠다”는 말씀을 주십니다(어린 사무엘이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에게 말하기를 두려워하였더라 합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최북단)에서부터 브엘세바(최남단)까지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삼상 3, 19-20).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나이 80의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르셨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먹이던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은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려고 다가설 때,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대면서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모세는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숨어 살던 사람입니다. 양떼나 돌보는 유목민이 되어버린 사람입니다. 나이도 80이나 되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모세는 네 번씩이나 사양합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 11) 

그러나 여러분, 430년 간 애굽의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탈출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머뭇거리던 모세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사양이 지나쳐, 하나님을 불신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께서 노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브살렐’이라는 인물을 광야에서 성막 짓는 건축가로 부르셨습니다.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출 31, 2-5). 

하나님은 이방의 페르시아 임금 고레스를, 포로로 사롭잡힌 유다백성들의 해방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상외의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돕게 하시기 위하여, 이방 나라의 임금까지도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개인만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도 부르십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열방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로 삼기 위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잘못된 선민주의에 빠지고, 배타주의에 빠지는 죄를 범한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여러 나라에 대하여 예언하는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는, 모태에 짓기 전에 그를 아셨다고 합니다. 배에서 나오기 전에 그를 성별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렘 1, 5). 사무엘은 어린 아이 때, 예레미야는 모태에 짓기 전에, 모세는 인생 늘그막 나이 80에 부르셨습니다(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예레미야도 탄식하며 부르심을 사양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6). 예레미야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에게 무능함과 두려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렘 1, 7-8). 

“여호와께서 예레미야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2. 예수님은 나(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

우리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따라갈 때에도, 간과할 수 없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의 문제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나를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서는 ‘내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외 없이 각각 부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 초기 사역에서 본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주의 깊게 한 번 보십시오. 예수님은 사역초기부터 그의 제자들을 부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부르셨습니까? 굳이 시간을 계산하자면, 공생애를 시작하신 지 불과 40일이 조금 지날 때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세례 받으신 후 곧바로, 유대 광야로 가셔서 40일간 머무시면서 금식하시고, 사탄에게 시험받으셨습니다. 그 후에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요단강 맞은 편 베다니에 가셔서(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던 지역), 갈릴리 벳세다 출신 다섯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 일입니다. 시몬과 안드레, 빌립과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첫 다섯 제자들을 부르신 때가 공생애를 시작하신 지 불과 40여일 정도 밖에 되지 않을 때입니다. 그 후,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서 첫 이적을 행하십니다. 공생애 사역을 위해서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가족이사를 하십니다. 이사 하시자마자 공생애 첫 번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지 않습니까? 거기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많은 표적을 행하십니다. 예루살렘에 머무실 때 밤에 찾아온 要人을 만나지 않습니까? 그는 바리새인이요, 유대교의 지도자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던 니고데모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지방 사역을 마친 후,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로 가십니다. 가시면서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여 가시다가, 수가 성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십니다. 사마리아 땅을 거쳐, 갈릴리로 돌아오시자 그때부터 비로소 본격적인 갈릴리 사역이 시작됩니다. 공생애가 시작 된 지, 8개월쯤 되었을 때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5)는 말씀을 외치시면서, 갈릴리 사역을 하십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대단히 중요한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제자를 부르신 일입니다(막 1, 16-20). 갈릴리로 돌아오신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갈릴리 사역을 하실 때,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직업이 어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보시자 예수님께서 “나를 (뒤)따라오라(deu/te ovpi,sw mou)하십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의 어부(을 낚는)가 되게 하리라.” 그러자 시몬과 안드레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그들도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그들도 곧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 안에 버려두고, 예수님의 뒤(ovpi,sw)를 따랐습니다. 이것이 마가복음 1, 16-20 말씀의 내용 전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공생애 40여일쯤 되었을 때, 요단강 맞은 편 베다니에서 첫 다섯 제자들(시몬, 안드레, 빌립, 야고보, 요한)을 부르심은 무엇이고, 공생애 8개월쯤 되었을 때, 갈릴리에서 바다에서 그물 던지던 시몬과 안드레, 그물 깁고 있던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 부르심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까? 같은 내용의 반복입니까? 아니면 다른 부르심을 말하는 것입니까? 질문이 생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갈릴리바다에서의 부르심은 전혀 다른 부르심입니다. 마가복음 1, 16-20절의 부르심은 두 번째 부르심입니다. 요단강 맞은 편 베다니에서 부르심은 첫 번째 부르심이었습니다. 첫 번째 부르심은, 파트타임제자로 부르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긴 받았지만 어부라는 직업까지는 버리지 않았던 것이지요(일이 있을 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갈릴리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자기들의 직업인 고기잡이를 위해서 갈릴리바다로 나갔던 것이지요. 베다니에서 예수님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이후, 시몬과 안드레, 빌립,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가족 간에, 동업자들 간에, 분명히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특히 시몬은). 이들은 모두 동업자들이었는데, 시몬은 갈릴리어업주식회사의 CEO였습니다(눅 5, 10).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돌아오신 예수님은 이번에는, 그들에게 그들의 직업까지 버리고 뒤따르라고 명을 내리신 것입니다. 보통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파트타임 제자가 아니라 풀타임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들을 풀타임 제자로 부르시는 소명을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누가복음 5장 1-10말씀에 보면 그들을 풀타임 제자로 부르실 때 상황이 어떠했는지, 아주 드라마틱(극적)하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닷가에서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였습니다. 무리들이 너무 많아서, 더 이상 바닷가에 서서 말씀하실 수가 없자, 마침 배 두 척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척의 배가 시몬의 배였습니다(야고보와 요한의 배). 그 배에 오르셔서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아서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시자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명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그 때 그들이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밤새 그물질을 했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그물 손질하고 있던 때입니다. 

시몬이 대답합니다. “밤새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순종하자 잡은 고기가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고 있었습니다. 급히 동업자 야고보와 요한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고기를 두 배에 채우게 되었는데 배가 잠기게 될 지경이었습니다. 그 때,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主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때, 그들 네 사람이 풀타임 제자로 다시 부름을 받습니다. 즉시, 어떻게 했습니까?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뒤따랐다고 말씀합니다(눅 5, 11). 중요한 것은 우리의 부르심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도 나를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그 부르심에 應答하셨습니까? 지금은 어떻게 응답하고 계십니까? 아직도 파트타임이십니까? 아니면 이제는 풀타임이십니까? 부르심이 때로는 점진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단번에 획기적인 부르심도 있습니다(사도 바울의 다메섹 부르심; 아브라함; 야곱).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 어떤 부르심이든, 하나님의 부르심은 지속적입니다. 연속적입니다. 중단할 수가 없는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 안에 내 인생의 의미가 있고, 내 삶의 경주방향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 안에 상급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을 주목해야 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지나간 과거)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또 한 가지 중요한 권면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부르심의 상) 행할 것이라”(빌 3, 13-16).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깊이 관심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내가 지금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다시 한 번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듣기 위하여,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내 성루에 서리라” 다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사순절 두 번째 주일,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을 따르고자 다시 한 번 결단합니다. 주님의 신실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이 시대 가운데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그리스도인 되게, 우리를 축복하여 주옵소서. 능력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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