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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초점을 바로 잡을 때 (신 8: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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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을 바로 잡을 때 (신 8:11~18)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전하여 주는 주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당신들이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살지라도, 또 당신들의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과 금이 많아져서 당신들의 재산이 늘어날지라도, 혹시라도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 당신들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넓고 황량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와 물이 없는 사막에서 당신들을 인도하여 주시고, 차돌 바위에서 샘물이 나게 하신 분이십니다. 광야에서는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당신들에게 먹이셨습니다. 이것이 다 당신들을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나중에 당신들이 잘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들이 마음 속으로 ‘이 재물은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모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언약을 이루시려고 오늘 이렇게 재산을 모으도록 당신들에게 힘을 주셨음을, 당신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1.  낯선 손님

도시 생활은 사람에게 고요함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집 앞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얼마 전까지 그나마 남아있던 주변의 여백마다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서 시야가 닿는 곳 어디나 건물 뿐, 녹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숨이 막혀 왔습니다. 도시에 산다는 것은 무한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이 지지부진하다고 느낄 때면 마치 이명증처럼 광야의 부름을 듣습니다. 광야라야 차를 타고 지나가 본 적밖에 없지만, 사람이 만든 어떤 구조물도 보이지 않는 그 허허로운 풍경은 제게 참 많은 말을 걸어왔습니다. 테오도르 모노라는 분은 사막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공간은 파우스트적인 인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막은 잡다한 생각을 버리고 강인해지도록 가르치는 학교이다.”(<<사막의 순례자>>, 24쪽) 그는 또한 사막은 ‘생략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면서, “한 사람에게 하루 2.5리터의 물, 간소한 음식, 몇 권의 책, 몇 마디 말이면 족하다”고 말합니다. 삶이 단출해지면 번뇌도 적을 텐데,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세속의 거미줄에 붙잡혀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어쩌면 출애굽은 고대에 완결된 사건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바로의 전제정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광야로 나갔습니다. 지금은 욕망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출애굽을 감행해야 할 때입니다. 도시가 제공하는 느른한 행복에 빠져 사느라 우리는 하늘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는 나팔소리가 우리의 잠을 깨웁니다. ‘잔치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근 30여 년 세계를 지배해왔던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은 체제임이 드러났습니다. 이 위기는 우리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낯선, 그리고 반갑지 않은 손님이 하루 속히 가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런 바람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흔히 위기는 기회라는 말을 합니다. 옳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앞에 당도한 기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저마다 생각하는 바가 다를 것입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위기의 때일수록 근본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君子는 務本이니 本立而道生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근본에 힘을 쓰는 사람이고, 본이 바로 서면 도가 발생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인은 근본에 충실하기 위해 진력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의 위기가 뿌리를 돌보지 않고 과실에만 매달려온 결과라고 확신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뿌리는 물론 하나님의 뜻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향해 돌아서야 할 때입니다. 

2.  풍요, 교만, 망각

오늘 본문 말씀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경계의 말씀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에 대한 경고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성경이 후대에 기록된 사실을 감안하면 이 말씀의 삶의 자리는 출애굽 공동체가 아니라 정착생활에 익숙해진 백성들의 삶임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부터 14절까지의 문장 구조를 간략히 하면 “Ⓐ 할지라도 Ⓑ 하지 말라”가 됩니다. Ⓐ에 들어갈 말은 다양합니다. ‘배불리 먹다’, ‘좋은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살다’, ‘소와 양이 번성하다’, ‘은과 금이 많아져서 재산이 늘어나다’ 등입니다. 그에 비해 Ⓑ에 들어갈 말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잊지 말라”가 그것입니다. 이런 경고가 주어진 까닭은 하나님을 잊는 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은 까닭을 간추리면 그들이 부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참 어쩔 수 없는 게 사람인가 봅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은 씁쓸하지만 진실입니다. 사람은 삶을 위한 도구를 바꿀 때 하나님까지 바꾼다는 말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의 시험보다 더 이기기 어려운 것이 풍요의 시험입니다. 본문 말씀을 잘 보면 Ⓐ와 Ⓑ를 매개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교만한 마음’(14a)입니다.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이런 말들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여전히 이런 현실이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능력, 경험, 판단, 결단을 자랑합니다. 말은 겸손해도 그 얼굴에 깃든 득의의 표정이 그의 교만함을 드러낼 때가 많습니다. 믿음이 좋아 보이는 이들 가운데는 자기 자랑을 하나님의 은혜로 덧칠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교만한 마음에 사로잡힐 때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무시합니다. 세상에 무시당하는 것 좋아할 사람은 없겠지요. 그러니까 그가 있는 곳에는 불화가 끊이질 않습니다. 교만한 마음이란 굳어진 마음입니다. 그들은 남과 소통하기를 싫어하고, 남에게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으로부터도 멀어집니다.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길은 이웃들을 통해 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일련의 흐름을 아시겠지요. 

풍요로움(성공) → 교만 → 타자들과의 소통 거부/불화 조장 → 하나님 망각

웨슬리 목사는 수입이 늘어도 생활비 지출은 늘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청빈한 마음은 청빈한 삶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일 겁니다. 신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때 은사이셨던 윤성범 학장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을 마친 후 가족들은 선생님의 장서를 학교 도서관에 기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책을 가져오는 임무가 당시 문예부장이었던 제게 주어졌습니다. 한 겨울 불기 없는 이층 서재는 참 추웠습니다. 그런데 사모님께서 올라오시더니 춥지 않냐면서 지나가는 말로 선생님은 평생 불기 없는 서재에서 공부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정신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제게 인상적인 장면은 지바고가 하얗게 성에 낀 창문 아래서 촛불을 밝혀놓고 손가락을 잘라낸 장갑을 끼고, 손을 호호 불며 시를 쓰던 장면입니다. 세상에는 그렇게 정신의 칼날을 서늘하게 세우며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마음을 잃어 우리는 작은 일을 만나도 비명부터 지릅니다. 다시금 광야를 돌아보아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3.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

신명기 역사가는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히브리인들을 종살이 하던 땅에서 이끌어내 자유의 새 삶으로 이끄신 해방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사람이 다 소중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세상을 미워하십니다. 스탠리 머피(Stanley Murphy) 신부의 말은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누구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어떤 상황에서든 신성한 실재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순간 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거의 무한하게 커진다.”(존 하워드 그리핀, <<블랙 라이크 미>>에서 재인용) 

애굽이란 다른 곳이 아닙니다. 사람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모든 곳입니다. 애굽은 그렇기에 지금 우리 곁에도 있습니다. 가난하다고 하여, 배우지 못했다고 하여, 연줄이 없다고 하여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받는 사람들의 현실 때문에 누구보다도 아파하고, 누구보다도 분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죄와 두려움과 부자유의 종살이에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해방 사역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황량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와 물이 없는 사막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신 분이십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말입니다.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다는 어느 목사님의 고백은 참 적실합니다.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길이 우리를 붙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도도 없이 걷는 인생길에서 길을 잃은 적은 얼마나 많으며, 주저앉아 울고 싶은 때는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마음을 추슬러 일어섰고, 또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 때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제와 돌아보니 주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쓰다듬고, 치유하고, 붙잡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선율은 스타카토 식으로 들려오기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 멜로디를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인도해주신 주님께서 앞으로도 인도해 주시리라 믿기에 우리는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은 만나로 그 백성을 먹이시고, 차돌에서 샘이 솟게 하셨습니다.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다며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홍해를 갈랐던 지팡이로 반석을 치도록 하셨고, 마침내 그곳에서 물이 솟아나왔습니다. 지난 한국기독교연구소 20주년 기념 예배 때 제가 그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했는데, 나중에 한 선배 목사님께서 김 목사가 모르는 게 하나 있는 것 같더라면서 그곳을 ‘므리바’(다툼)라고 하는 까닭은 물이(므리) 바위(바)에서 나왔기 때문이고, ‘맛사’(시험함)라고도 하는 것은 그 물맛(맛)이 싸하기(사) 때문이라고 해서 함께 웃었습니다. 어찌됐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고 계십니다. 물론 만나(manna)는 진수성찬이 아닙니다. 반석에서 흘러나온 물이 넉넉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나누어 먹고 마시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는 되었을 겁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열악했기에 광야 공동체가 경험한 것은 삶의 고락을 함께 하는 이들의 깊은 연대의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삶이 풍족한 데도 곤고한 까닭은 누군가와의 결속감정이 가져다주는 내적인 따뜻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4.  기억의 연대

신명기 역사가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기억하라’는 말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례의 절기를 지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형 에서의 복수를 피해 달아나던 길에 하나님을 만난 야곱이 베고 자던 돌을 기둥으로 세운 것도, 요단강을 건넌 출애굽 공동체가 지파 수만큼의 돌을 모아 기념비를 세운 것도, 블레셋을 물리친 후 사무엘이 미스바와 센 사이에 에벤에셀의 돌비를 세운 것도 주님의 도우심을 상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출애굽 공동체가 모시고 다녔던 언약궤는 곧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심을 상기시키는 매개물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서운했던 일은 꼼꼼히 마음에 기록해두면서, 우리가 받은 은혜는 어찌 그리 쉽게 잊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에게 받아야 할 것은 곱새기며 기억하면서, 갚아야 할 마음의 빚은 어찌 그리 쉽게 지우는지 모르겠습니다. 잊어야 할 것은 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도 우리 삶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새롭게 기억해냅니다. 자유의 길로 인도하시고, 주린 배 먹이시고, 마른 목을 축이게 해주시는 하나님, 상처에 새 살 돋아나도록 숨을 불어넣으시고, 우리 속에 착한 생각을 심어주시고, 하나님의 꿈을 품은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서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계신 한 어떤 시련도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용기 있게 살아갑니다. 용기(courage)라는 말은 ‘마음’ 혹은 ‘심장’을 뜻하는 단어 ‘cor’에서 왔다고 합니다. 용기 있다는 것은 자신 심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 심장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용기입니다. 참으로 용감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고, 전쟁과 폭력과 학대와 착취를 예방하기 위한 행동에 가담하는 사람입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는 “사순절은 초점을 바로잡는 때요 진리의 자리에 다시 들어서는 때이며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되찾는 때”(<<안식의 여정>>, 180쪽)라고 말합니다. 옳습니다. 흩어졌던 삶의 초점을 바로잡지 않고는 여전히 비틀거리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살아온 모습을 성찰하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할 때입니다. 풍요의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울지 마십시오. 오히려 소박한 삶, 정 깊은 삶, 인간적 결속감정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기뻐하십시오. 노예 정신을 가진 사람은 늘 징징거리며 삽니다. 하지만 자유로운 정신은 곤고한 삶의 자리에서도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자꾸 하나님께로 가져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우리 삶을 비끄러매지 않으면 우리는 썩어 물크러진 채소 신세를 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주님이 지금 우리의 동행이 되어주십니다. 그러니 두려움과 걱정을 떨쳐버리고, 주님의 신바람을 타고 새로운 역사를 향해 나아가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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